| ▲ 1895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 |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 238번지, 이곳은 국내 최초의 극장 애관극장이 위치한 곳이다.인천의 애관극장은 110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이다. 애관극장은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되던 시점에 인천 경동 네거리에 협률사(協律舍)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02년 황실에 의해 서울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선 극장이며,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것이다. 다만, 협률사에 관한 정사(正史)가 존재하지 않고 인천의 시사(市史)에만 자료가 남아있어 공식적인 기록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1895년 협률사(協律舍)는 부산 출신의 인천 갑부 정치국에 의해 단층 창고 형태로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에서부터 신파극이나 창극, 남사당패들의 땅재주 등 각종 공연물들이 공연되었다. 1905년 인천 중구 사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회전무대가 설치된 공연장 가무기좌(歌舞技座)가 세워졌다. 주로 일본 신·구극을 공연하면서, 가끔씩 마술 같은 흥행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공연장은 1930년에 화재로 사라졌다. 그리고 1909년 지금의 신포동 외환은행 자리에 표관(瓢觀)이란 극장이 개관하였다. 당시 표관은 주로 일본영화와 뉴스를 상영했는데, 객석은 약 800석 규모로 대형 공연장인 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좌석은 남좌여우(男左女右)로, 남자는 왼편 줄에, 여자는 오른편 줄에 앉도록 엄중하게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문화관(文化觀)으로 개칭되었으며 인천시에서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 2층 벽돌 구조의 애관극장 | 한편, 협률사는 잠시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를 따서 축항사(築港舍)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20년대부터 애관(愛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애관이라 함은 곧 ‘보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매혹적인 이름인 것이다. 이름이 변화하면서 건물형태도 뒤바뀌게 된다. 초창기 단층 창고 형태에서, 왼쪽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2층 벽돌 구조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관극장은 한국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되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애관극장(愛觀劇場)이라는 이름은 1960년 9월 재개관 때부터 사용된 것이다. 좌석규모는 약 400석이었는데, 영화와 악극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이미자, 나훈아 리사이틀이 있는 날이면 몰려드는 인천 관람객들로 인해 사고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또한, 애관극장이 위치한 인천 경동거리는 그야말로 '시네마천국'이었다. 오성극장, 피카디리극장, 명보극장, 중앙극장 등 인천의 주요 극장들이 모두 이곳에 위치했고,인근에는 제물포고와 인화여고가 있어 학생들이 주요 고객들이기도 했다. 특히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같은 영화는 이곳에서 직접 제작, 배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애관극장의 열기는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현재 극장 운영주인 탁경란 사장은 1960년 애관극장을 재건한 이봉열씨에게서 1972년 극장을 인수한 탁상덕씨(91년 별세)의 막내딸이다. 아버지의 별세 후 애관극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외환 위기 때 부도를 맞자 미국에서 들어와 경매로 이 극장을 재인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99년 11월 18일 화려하고 세련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대명사 CGV인천14(약 4000석 규모)의 개관으로 경동거리에 있던 애관극장, 씨네팝극장, 피카디리극장, 미림극장 등 기존 극장들은 시설 개보수라는 맞불카드로 맞섰다. 그러나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의 관객이탈은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그리고 중심가 상권 역시 남동구 쪽으로 옮겨가는 터라 예전의 부흥을 다시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 현재의 애관극장 | 이후 애관극장은 2004년 1월, 5개관 86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했다. 애관극장의 탁경란 사장도 멀티플렉스라는 시대적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이다. 현재 경동거리에는 애관극장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110년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준 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아버지의 가업을 다시금 일구어내고픈 탁경란 사장의 의지이다. 또한, 지역상권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네 상인들은 애관극장이 다시 일어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에 보내는 응원이다. 110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 아직은 비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애관극장은 우리의 극장사에서 반드시 다시 되돌아봐야 할 과제이다. 자유당 시절의 영화 상징 ‘평화극장’ | 평화극장과 임화수 | 김준기 _ 영화평론가 | | | | ▲ 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
종로 4가 5번지, 보령약국 인근에 자리한 평화극장. 지금 그 자리는 한일빌딩이라는 고층 건물로 변해 있지만, 1950년대에는 평화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은 당시 한국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던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 임화수가 사장으로 있었던 공간이다. 임화수는 1924년생으로 경기도 여주군 갑천면 가야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권중각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임화수’로 개명하였다. 1941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절도와 장물 수수죄로 복역을 하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후 평화극장의 전신이었던 제일극장에서 매점 일을 하며 극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화수의 가파른 성장은 전후를 기해서 이루어진다.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1996)를 보면 부산 피란시절 도박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부산의 거부 손종록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본격적인 연예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임화수는 종로 4가 제일극장을 염가로 불하받고 1951년 8월 24일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재개관하여 당당히 극장주로 영화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면서 예술과 정치를 넘나드는 줄타기를 시작하였다.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영화배우, 연극배우, 악극단배우 등 연예계를 총망라하여 선거행사 등 각종 정치적 모임에 참여 시키고, 연예계 유명 여배우들을 자유당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소개를 하는 로비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 임화수의 사업 범위는 다양하였지만 초창기에는 악극단을 통한 공연물로 재력을 쌓아나갔다. 평화극장이 종로 4가에 위치하고서도 여전히 재개봉관으로 남아있었던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영화보다 악극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악극단은 한국 연예 주식회사를 통해 운영되었는데 당시 김희갑, 양훈, 양석천, 김진규, 김승호 등이 전속되어 활동하였다. | 임화수 일대기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1996) |
임화수는 연예계 폭력 건으로도 유명한데 전속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김승호를 구타해 3일 간의 치료를 받게 하였고, 주선태를 연행하여 7일 간 폭행했으며, 김진규, 윤일봉, 박암이 다른 회사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다. 또, 희극배우 김희갑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벌금 3만환의 형만 받기도 했다. 1950년대 당시 임화수의 직함은 다양하다. 전국 극장 연합회 부회장, 서울시 극장 협회장, 한국 영화 제작가 협회 부회장, 한국 연예 주식회사 사장, 반공 예술인 단체장, 평화극장 사장 등 자유당 정권과 부침을 함께 한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전국 극장 문화단체 협의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은 국내 연예계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훗날 그는 전국 극장 문화단체 협의회 산하에 스스로 제4대 대통령 이승만과 제5대 부통령 이기붕 당선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영화배우와 예술인들을 강제로 부정선거에 가담시켜 문교부장관의 물망에 까지 올라가기도 하였다. 임화수가 행한 영화계 행보로는 1954년 『연예시보』를 창간해 6년 간 발행하였고, 『카오스』라는 연예 월간지를 발행해 한국 연예계의 나갈 길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6년 영화진흥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 그리고 1957년 외국과의 첫 합작 영화 등이 그가 이룬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연예계를 자유당 정권의 끄나풀로 만들었던 일들과 각종 반공 행사에 소속 연예인을 총 동원하여 부패한 권력과 밀접하게 결탁되었던 점이 곧 한국 영화를 좌지우지하던 실력자로서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임화수가 일구어낸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국내 최초의 외국 합작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국내 최대 영화사인 임화수의 한국 연예 주식회사와 홍콩의 쇼브라더스(당시“소씨부자”)와 함께 <이국정원>이라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감독은 한국에서 전창근이 참가하였고, 홍콩에서는 도광계가 참여하였으며, 쇼브라더스의 제안으로 일본인 감독 와가수기 미츠오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인의 참여를 엄격하게 규제하였기 때문에 영화가 소개될 때 일본인 감독의 이름은 삭제되었다. 당시 합작을 추진하였던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대표 임화수는 “합작의 상대방이 동남아 일대 제작흥행의 절대세력자인 소씨부자인 만큼 그들의 무대인 동남아 전역에의 한국영화진출이 새로운 문화교류와 상로를 열게 될”것을 기대하였다. 쇼브라더스 역시 같은 기대를 가졌다. 막 홍콩으로 본거지를 옮겨 최초의 ‘이스트만 컬러’ 영화를 제작할 것을 결심한 쇼브라더스에게 한국이라는 미개척 시장을 덤으로 안고 가는 것은 위험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국정원>은 한국에서 크게 성공하였지만 홍콩과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판권이 없었던 쇼브라더스는 큰 이익을 얻지 못했고, 한국연예주식회사 역시 쇼브라더스가 동남아 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로 시장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국정원>의 한국 내에서의 성공은 다른 영화사들이 홍콩의 군소영화사들과 합작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홍콩의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국제적인 영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 합작 역시 59년을 고비로 주춤한다. 한국 내에서의 흥행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중에서) | 사형직전의 임화수 모습 | 그 외에도 임화수는 <길 잃은 사람들>, <논산 훈련소에 가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등 3년간 15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자유당 정권을 위한 정치적 목적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평화극장은 1960년 4월 26일 3.15 부정선거에 따른 분노한 시위군중들에 의해 간판이 떨어지고 극장 일부가 불에 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5.16 혁명군에 의해 임화수는 자유당 정권의 대표적인 정치 깡패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패척결 대상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5.16 혁명재판은 1961년 4·18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는 고려대생 10여명을 부하 폭력배를 동원하여 무차별 폭행하도록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도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처형 전 임화수는“나는 한국영화제작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고, 첫 홍콩 합작영화도 만들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후 평화극장은 임화수의 부인이 운영하다 한일극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한일극장은 이후 1976년까지 종로가 2번관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다 강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천호동의 한일극장이 원래 종로 4가 평화극장 자리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당시 임화수의 몰락은 곧 새로운 영화계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60년대 군사 혁명 정부도 폭력과 반공을 통한 질서유지라는 형식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 |
한국 영화계의 산 역사, 스카라극장 | 약초극장에서 수도극장, 그리고 스카라극장으로 | 김준기 _ 영화평론가 | | | | ▲ 1951년 3월16일 수도극장 모습 |
서울 중구 초동 41번지. 스카라극장의 출발은 일본 자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1935년 개관 당시 극장명은 약초(若草)극장 혹은 약초 동보 극장(이하 약초극장)으로 불렸다. 동보라는 명칭은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인 동보영화사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일제시대 당시, 일본 영화사들의 국내 투자가 부분적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극장 운영자는 일본인 오까모도로서 아현동에 있던 대정관(1913년 개관)이라는 극장을 폐관하고 약초극장 운영을 맡게 되었다. 당시에는 영화상영과 공연물 등이 극장에 함께 선보였는데 1944년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 씨가 약초극장 산하에 “약초가극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약초극장 지배인이던 홍찬 씨가 극장을 인수하여 수도극장으로 극장 명을 바꾸고 이후 단성사, 국도극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59년 당시 수도극장은 1,172석을 보유한 대형극장으로서, 그 외에 서울에서 1,000석 이상을 보유한 극장으로는 국제극장(1,613석), 명보극장(1,498석), 국도극장(1,322석), 단성사(1,210석), 중앙극장(1,170석), 시공관(1,082석), 씨네마코리아(1,002석) 총 7개 극장이 있었다. 한편, 수도극장은 한국영화사에서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었던 공간이다. 국내 최초의 키스 신이 나오는 영화상영에서부터 하길종 감독의 갑작스런 요절에 이르기까지 수도극장과 얽힌 영화계의 활동상은 다양한 사료들로 남아있다. 1954년 12월 14일 수도극장에서는 국내 최초의 키스 신이 나오는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감독)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카바레 마담으로 나오는 윤인자와 방첩단 장교역의 이향의 키스 장면은 약 2초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로서는 영화 속에서의 키스일지라도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심지어 유부녀인 윤인자의 남편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한형모 감독을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6.25 전쟁 이후 미국식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면서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 혹은 애정관과 서구문물이 상호 갈등하고 충돌하는 시기임을 알게 한다.
1955년 당시 수도극장은 대형극장이라 외화상영을 주로 하였는데, 수도극장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중앙극장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개봉하여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도극장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상영시간이 길어 중앙극장에 비해서는 관람객 수가 많지 않았다. 1956년 3월 16일 수도극장에서는 다시 한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한형모 감독의 영화 <자유부인>이 개봉된 것이다. 1954년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이 최초의 키스 장면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유부녀의 바람으로 한국사회를 온통 <자유부인> 논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 1956년 개봉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
<자유부인>은 1954년 가을부터 서울신문에 약 8개월간 연재되면서 교수 부인의 외도라는 소재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한형모 감독의 상업적인 영화 감각과 어우러지면서 영화 <자유부인>은 일약 대중들의 논쟁적인 화두로 다가선 것이다. 영화 <자유부인>은 당시 서울지역에서 약 15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였다. 1958년 7월 16일 우리나라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생명>(이강천 감독)이 수도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수도극장 대표인 홍찬 씨가 자신의 영화사인 수도영화사를 통해 제작한 것인데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기술력의 부족으로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 1958년 4월 20일에는 수도극장 인근에 20세기 폭스사의 설계로 지어진 대한극장이 외화 <잊지못할 사랑>으로 개관하였다.
1957년 수도극장 홍찬 대표는 안양 석수동 소재 3만평의 대지위에 스튜디오 2개동, 수중 촬영장, 현상소등을 갖춘 동양 최대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도극장, 수도영화사 그리고 안양종합촬영소까지 설립하고 더 나아가 평화신문 대표까지 역임하는 등 영화계에서 언론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이후 사업 부진과 친일파의 행적으로 인해 영화사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후 수도극장은 수익악화로 1962년 4월 성업공사의 공매로 넘어가고, 결국 김근창 씨에게 낙찰되었다. 그리고 안양종합촬영소는 1961년 홍성기 씨에게 인수되었다가 1966년 신상옥 감독이 재인수하여 신필름의 주요 제작 거점으로 활용하게 된다. 1962년 9월 13일 수도극장은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한다. 스카라극장은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당시에도 스카라극장은 70미리 영사기와 대형상영관이라는 현대식 시설로 서울 10대 영화관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스카라극장 시절에도 이 공간은 영화계에 끊임없이 화제를 안겨주곤 하였다. 1979년 2월 9일 하길종 감독의 영화 <병태와 영자>가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하길종 감독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미국 UCLA 유학파 출신이었는데, 2월 25일 자신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스카라극장을 찾았다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충무로의 호사가들은 하길종 감독이 몰려드는 관객을 보고 흥분하여 쓰러졌다고도 하였다. 아무튼 한국 영화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왔던 젊은 지성파 감독의 요절은 우리 영화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까지 스카라극장은 초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다. 국내 극장 중에서 단성사, 대한극장, 피카디리 등이 재개관하고 국도극장이 폐관을 하였지만 스카라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70년이라는 긴 역사를 버텨온 것이다. 물론, 지금은 예전 10대 개봉관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한국 영화사 곳곳에서 드러나는 약초극장과 수도극장 그리고 스카라극장과 뒤얽힌 영화계 역사들은 이 공간의 소중함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한국 영화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 곳이 더욱 의미 있는 역사적 공간으로 되살아나길 희망해본다 |
중앙시네마와 벽산그룹 | 1950년대 ‘극장왕’ 벽산 김인득 회장의 발자취 | 김준기 _ 영화평론가 | | | | ▲ 벽산(碧山) 김인득 회장 |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4년 마산공립상업학교(현 마산상고) 졸업. 1951년 무역과 영화수입업을 하는 동양물산 설립. 이후 전국 주요 17개 도시에 여러 극장을 소유하며 “극장왕”으로 불리워짐. 1962년 단성사,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시네마)등을 매각하며 한국스레트공업 주식회사 인수. 1972년 자신의 아호를 딴 벽산그룹으로 사명을 바꾸며 그룹 회장에 취임. 1997년 벽산 김인득회장 타계.
벽산 김인득 회장은 해방후 부산일보 총판국장 신분으로 신문용지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갔다가 재일동포 영화사업가 이현수(李鉉琇)씨를 만나게 된다. 이현수는 당시 부산의 부산극장, 시민관, 동아극장, 봉래관 등을 소유한 부산 극장가의 거부였다. 그러나 적산기업을 경영하던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치부하여 사직당국에 고발하는 사회풍조가 만연한 터라 그의 극장 실무자들 또한 탈세,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는 등 극장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 김인득 회장은 이현수 씨의 권유로 그의 소유였던 부산 동아극장의 지배인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흥행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50년 흥행업에 발을 내딛게 된 김인득 회장은 외국영화를 수입하여 전국의 영화관에 배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서울에 동양물산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5월 경영난에 직면하여 도산위기 상태에 있던 단성사를 동양물산이 인수하게 된다. 이것은 배급업에서 흥행업으로의 사업 확대를 뜻하는 것이며, 이후 단성사의 인수가 동양물산의 성장에 큰 디딤돌로 작용하게 된다. 동양물산의 외국영화 배급이 점차 사업궤도에 오르면서 동양물산의 외화배급 물량은 전국 배급의 약 60%까지 차지하게 된다. 특히, 동양물산은 직영체제의 운영방식을 확대하기 위해 인천의 동방극장, 대구의 만경관, 부산의 명성극장, 진주의 시공관, 대전의 중앙극장 등을 임차경영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에는 단성사를 증축하여 객석수를 확대하고 외화상영 전문관으로 자리매김시키면서 국내 최고의 흥행수입을 거두기도 했다.
| 1934년. 단관의 중앙극장 | 그리고 1956년 5월 서울지역에 또 하나의 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명동에 자리한 중앙극장(현 중앙시네마)이었다. 당시, 중앙극장도 경영난에 직면한 때였다. 이에 김인득 회장은 재개봉관에 머물러있던 중앙극장을 단성사와 차별화하여 멜로나 순수예술작품 전문관으로 자리매김시키며 개봉관으로 승격시킨다. 그것은 주효한 전략이었다. 당시 명동입구는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주로 멜로물을 상영하면서 젊은 연인들의 눈물샘을 자극시켰다. 당시 공개된 작품 중 문희 주연의 <내 몫까지 살아주>에서는 문주란의 구슬픈 노래가사로 인해 여성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 김인득 회장의 극장인수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57년에는 부산의 대영극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서울 단성사 건너편에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시네마)과 부산에 부영극장을 신축하면서 김인득 회장은 실로 흥행업계의 ‘극장왕’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그러나 이 무렵 김인득 회장은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사업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김인득 회장은 1962년 한참 흥행사업의 전성기에 단성사와 반도극장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한국스레트공업 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인수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에 따른 농가주택 개량 사업에 힘입어 사업은 날로 확대 성장세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것이 훗날 벽산그룹의 중추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극장 흥행업은 벽산그룹의 모태 사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김인득 회장이 극장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전환을 한 배경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영화 흥행업이 TV의 등장으로 인해 사업이 축소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기도 하다. 극장업은 일요일이 대목인데 주일을 교회에 나가는 그로서는 모순된 사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 2005년, 5개관의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의 역사도 시나브로 70년 이라는 긴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 이후 김인득 회장은 동양물산 소유의 극장을 모두 처분하고 명동 입구에 자리한 중앙극장만을 남겨두게 된다. 1960년대 중앙극장은 단성사, 대한극장, 을지극장, 아카데미와 함께 외화관으로, 국제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수도극장은 방화관으로 분류되었다. 중앙극장이 상영한 외화로는 아카데미 수상작들인 <록키>, <사관과 신사>, <디어 헌터>, <토요일 밤의 열기> 등으로 영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 모은 극장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초 삼성, 현대, 대우, 선경등 대기업의 연이은 영화업계 진출 시 벽산그룹에서도 부산에 동양영화사를 설립하며 극장 인수를 타진하였으나 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1991년 9월 벽산그룹의 40주년 기념행사는 중앙시네마에서 개최되었다. 이 날, 김인득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김인득 회장의 장남 김희철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김인득 회장은 사업의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경영을 마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픈 맘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1997년 김인득 회장은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좌우명을 남긴 채 삶을 마감하게 된다.
2005년 현재 중앙시네마는 청계천 복개 공사를 지켜보며 벽산그룹의 상징적인 모태 기업으로서 극장 리모델링을 논의한다고 하니 그 향방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 대한극장 | 반세기 동안의 끊임없는 자기 변화 | 김준기 _ 영화평론가 | | | | ▲ 국쾌남 회장 |
국쾌남 회장. 1922년 전남 담양 출생.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출신. 제 4대 전남 담양 국회의원. 세기항공 사장. 세기상사 회장. 체조협회 회장 등 역임 1952년 국쾌남 회장은 외화수입업체인 세기상사로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한극장 개관을 이루게 된다. 대한극장은 1956년 미국 20세기 폭스 사가 설계하여 만들어진 창문이 없는 무창 건물 제 1호였다. 1956년에 착공하여 1, 2차의 공사를 거쳐 1958년 4월 18일 좌석 수 1924석으로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 작품으로는 게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가 주연한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이었으며, 1960년에 도입한 국내 최초의 70미리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대한극장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은 외화 <벤허>를 7개월간 장기상영하면서 무려 70만 명이라는(당시 서울 인구 약 250만명)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였던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벤허>는 35밀리 판으로 계열극장이었던 종로 3가의 세기극장(현 서울극장)에서 3개월을 더 상영하였고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그야말로 돈방석을 깔고 앉는 대흥행을 거두게 된다. 대한극장은 1972년, 1982년, 1997년 등 <벤허>를 여러 차례 재상영하면서 대중들에게 70미리 대형 상영관의 웅장함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63년 국내 영화법 개정으로 국산영화 제작업과 외화수입업의 일원화가 이루어지자 외화수입 업체였던 세기상사가 한국영화 제작에까지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이후, 세기상사는 홍세미 주연의 영화 <춘향>으로 흥행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 1960년대 당시의 <벤허> 광고 | 세기상사는 영화제작과 흥행업 그리고 항공사업 등의 비즈니스를 통해 1968년 12월 27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주식 상장 인가를 취득하고 공개법인 요건을 구비하여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된다. 현재에도 세기상사는 국쾌남 회장의 장남인 국정본 회장이 약 36% 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는 업체이다.한편, 1969년 8월 22일 세기상사의 자회사였던 세기항공이 안성 상공에서 추락하여 공화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5명의 사상자를 내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종사였던 신문섭 씨의 보상금 처리가 지연되고 후일 보상 조치가 부도처리까지 되면서 세기상사의 사업은 정부의 감찰을 받게 된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세무사찰 등을 벌이며 국쾌남 회장의 구속에까지 이르게 된다. 보상금 부도처리에 대한 사유는 언론지상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보상금 지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다 3년여의 시간이 지난 1972년 7월 14일 밤 국쾌남 회장이 관세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후, 1975년 세기상사마저 부도에까지 이르면서 외화수입과 영화제작, 배급 그리고 전국 6개 극장을 직영 소유한 거대 메이저 영화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서울의 대한극장, 세기극장(현 종로의 서울극장), 부산의 문화극장, 인천의 피카디리극장 등이 세기상사의 소유였다. <닥터 지바고>, <도라 도라 도라>,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운드 오브 뮤직>, <남태평양> 등 70미리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았던 대한극장의 웅장함과는 달리 그 뒤안길은 무척이나 신산하였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 충무로 극장가는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에 따라 기존 극장들의 세력재편이 이루어지는 시점이었다. 특히,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들은 극장 인수와 임대에 경쟁적으로 나서게 된다. 삼성, 대우, 현대, 제일제당 등이 당시 극장 흥행업에 진출하였던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 현재의 대한극장 | 대우는 1996년 10월 대한극장, 스카라 극장과 임대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1995년에는 이미 씨네하우스 4개관을 300억에 인수한 상황이었다. 삼성은 서울극장 1개관, 명보극장 2개관, 씨네코아 1개관을 임대하였으며, 이후 삼성생명 지하와 분당, 부산 등에 극장을 신축할 계획이었다. 또한, 현대그룹의 금강기획은 압구정에 극장을 신축하여 씨네플러스라는 극장을 개관하였다.마지막으로, 제일제당은 강변역에 호주의 극장전문업체인 빌리지 로드쇼와 함께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공동 개발하였다.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시대를 알리는 영화관 1호였다. 1998년 4월 4일 개관한 제일제당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1호 CGV 강변점이 도심이 아닌 부도심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단관 영화관의 유효기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극장도 이러한 흐름을 간과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2000년 5월 21일 영화 <징기스칸>을 마지막으로 대한극장의 70미리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2001년 12월 15일 8개관, 275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대한극장은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2005년 현재 대한극장은 2개관을 추가하여 10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하였으며, 2004년 극장의 관람객 수도 약 200만 명에 육박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한극장의 이러한 성공은 아마도 끊임없는 자기 변화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 대한극장이라는 자사의 홍보문구처럼 항상 거듭나는 영화관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다시 한 번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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