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영화관의 자존심, 단성사(團成社)
멀티플렉스로 새롭게 나다
김준기 - 맥스무비 극장팀장

글을 시작하며

기성세대에게 영화관은 어두운 슬럼(slum)을 연상시키지만, 신세대에게 그 곳은 화려한 팝콘 하우스(popcorn-house)(미국에서 영화관은 movie theater, movie house, movie palace, cinema 등으로 표현된다. 1960년대 미국에서 멀티플렉스가 들어서면서 영화관은 문화적 체험의 장소라기보다 일종의 비즈니스 장소라는 측면이 강조되면서 영화티켓의 수익보다 팝콘 수익이 워낙 큰 지라 영화관을 팝콘 하우스라는 용어로 종종 비유하여 사용된다. 국내 놀이공원에서의 팝콘의 원가는 약 155원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티켓 한 장의 원가를 고려한다면 그 비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로 상징된다.

1989년 봄, 기형도가 사랑하던 시(時)를 버리고 생을 마감한 곳은 종로 3가 파고다 극장이라는 심야영화관에서였다. 그러나, 2005년 봄 국내 멀티플렉스 영화관에는 이동통신카드로 할인을 받고 핸드폰으로 입장을 하며 디지털 상영과 고급 시트(seat)의 스크린 그리고 화려한 네온사인속에서 팝콘 냄새 가득 머금으며 영화를 즐기려는 형형색색의 젊은 연인들로 북새통이다. 너무나 단순한 도식적 비유지만 영화관은 어둡고 암울한 아웃사이더의 문화공간에서 21세기 화려한 대중문화를 이끄는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영화관이라는 문화적 공간을 시대의 흐름을 아우르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여 영화사를 바라보는 문화적 시선을 조금더 확대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필자의 능력이 일천하여 단지 영화관의 시대적 부침과 그 흥망성세만을 시시콜콜하게 다룰지라도, 이러한 글이 국내 영화관에 대한 또 다른 시선과 그 공간에 대하여 다양한 이론적 그물망으로 의미를 상호소통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나위 없을 것이다.

국내 영화관의 자존심, 단성사(團成社)

1907년에서 2005년까지, 단성사의 산 역사는 이제 100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멀티플렉스라는 광풍이 한반도 이남을 휩쓸고 있지만 국내 영화관의 자존심은 단연 단성사라는 맏형에게 돌려져야 할 것이다.

그 배경은 1919년 10월 27일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연쇄극은 일종의 연극물에 영상이 조금씩 가미된 공연형식을 일컫는 것이다. 비록완전한 영상은 아니지만 국내 자본이 투여된 최초의 영상물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한때, 일부 영화 서적에서는 이 공연의 제목을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로 잘못 표기한 적이 있었다.)의 공연과 1926년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신화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국내 영화계에서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의 공연일인 10월 27일을 영화의 날로 지정하였으며, 그것은 국내 자본이 투여된 최초의 영상을 선보인 날이기 때문이다.

일제하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영상으로 옮긴 <아리랑>은 당시 전 민족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으며 오랫동안 <아리랑>의 상영이 민족의 아픔을 대변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기 떄문에 단성사라는 공간은 국내 영화관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후 단성사는 '한국 영화 상영관의 메카(mecca)' 혹은 '한국 영화관 1번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197∼80년대 한국 영화의 신기록을(197∼80년대 영화관은 필름 프린트 벌수가 제한되어 있어서 개봉작은 단 하나의 영화관에서만 상영되는 경향이 많았다. 1993년 개봉된 <서편제>는 당시 단성사에서만 154일을 상영하여 1,035,741명의 관객(서울 관객 기준)을 동원하는 흥행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작금의 멀티플렉스 구조에서는 단관 개봉이 아닌 광역 개봉(wide release)이라는 방식의 배급을 하는데 다량의 프린트를 준비하여 여러 상영관에 동시다발적으로 상영하는 방식을 취한다. 짧은 시일 내에 많은 관람객을 동원하는 배급 방식이다. 영화 흥행의 주기가 빨라져 자본회수 기간을 줄이는 장점도 있지만 틈새시장에 있는 예술영화들이 광역개봉에 따라 영화관을 찾지 못하는 불상사도 발생한다.) 연거푸 갈아치우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관객 기준으로 1977년의 <겨울여자>는 약 58만, 1990년의 <장군의 아들>은 약 67만, 1993년의 <서편제>는 약 100만으로 한국 영화 흥행의 신기록을 단성사가 상영목록으로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07년 7월 17일에 개설된 단성사의 국내 극장 1호 라는 표현은 여러 사료를 통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부산의 영화 사료 연구가 홍영철씨는 『부산 영화 100년』(2001)에서 1907년 7월 15일 일본인과의 합자로 세워진 부산좌(좌(座) - 일제시대, 청계천을 경계로 영화관은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지는데 일본인들이 주로 출입한 남촌 영화관의 명칭은 대부분 명치좌, 어성좌, 경성좌등 좌(座)라는 용어를 쓴다. 이것은 일본의 극장이 대부분 다다미 방 구조처럼 앉아서 영화나 연극을 보는 문화에 기인한 것이다.)가 단성사보다 2일 먼저 개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955년 단성사 전경

또한, 이용남씨의 「해방 전 조선영화극장사 연구」(2003)에 따르면 국내 극장 1호는 1907년의 단성사나 부산좌가 아닌 1895년 인천의 협률사(協律舍)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영화관은 1902년 서울의 관립극장인 협률사(協律社)와는 다른 곳으로서, 현재는 인천 애관극장이라는 이름의 영화관으로 남아있다. 이에 단성사가 국내 극장 1호 혹은 국내 최초의 영화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사료에 기반한 사실은 아닌 것이다. 다만 단성사는 한국 최초의 영화인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공연하고, 영화 <아리랑>을 통해 일제하 민족의 아픔과 설움을 함께 어루만져 주었던 우리의 터전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기억하고 아로새겨야 할 대상이자 자존심인 것이다.

2005년 2월 2일, 단성사는 7개관 153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장하면서 종로 극장의 전성시대를 다시금 만들고자 한다. 대기업들의 멀티플렉스가 국내 영화관의 지형도를 뒤흔들어 놓는 작금의 상황에서 100년의 역사를 눈앞에 둔 단성사의 자존심이 과연 지켜질 수 있을 것인지가 자뭇 궁금하다.

단성사(團成社) 연대기

ㅇ 1907년 7월 17일: 실업가, 유지, 동대문상인 출신인 지명근, 박태일, 주수영등이 발기인이 되어 단성사를 개장. 당시 단성사는 "조선의 연예계를 발달시키고 일반 재인의 영업을 위하기도 하며 극장 운영을 통해 얻은 수익을 교육과 자선사업에 투자할 것"을 약속하며 시작하였지만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ㅇ 1914년: 그 후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 무라다라는 일본인 소유로 넘어간다. 무라다 역시 극장 흥행에 별 재미를 보지 못한다.

ㅇ 1918년: 무라다는 단성사의 운영권을 한국인 흥행사 박승필에게 임대로 넘겨준다. 그리고 그 해 12월 21일 대대적인 개축을 통해 영화 중심 극장으로 본격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ㅇ 1919년 10월 27일: 한국 최초의 영화, 연쇄극 <의리적 구토> 공연

ㅇ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 상영

ㅇ 1932년 1월 4일: 이런 어려움 속에서 박승필은 57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다. 오랫동안 단성사의 지배인이자 사원의 대표격인 박정현이 정상화를 모색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명치좌나 약초극장(현 스카라극장)처럼 새로운 설비와 서비스를 갖춘 새 극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배급회사들 또한 설비가 부족한 극장에 좋은 영화를 공급할 이유가 없었다. 단성사는 이래저래 흥행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ㅇ 1934년 12월: 현대식 철근 건물 신축(750석)
ㅇ 1935년 10월 4일: 국내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상영
ㅇ 1939년 2월: 단성사의 경영이 장기 적자를 면치 못하면서 소유권은 여러 사람을 거치게 된다. 마침내 단성사는 1939년 2월 명치좌의 소유주인 이시바시(石橋)에게 넘어갔다.

ㅇ 1939년 8월: 단성사의 소유자인 이시바시(石橋)는 단성사라는 간판을 내리고 대륙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다.

ㅇ 1945년 8월: 단성사는 일본인의 경영자가 손을 떼고 한국인의 소유로 넘어옴

ㅇ 1955년 7월:1934년 현대식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

1934년의 단성사 전경



ㅇ 1970년대: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 3가의 단성사와 피카디리를 양대 축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아래의 대한극장, 스카라극장, 명보극장, 국도극장, 세기극장 등이 있었지만 종로 3가 극장가에 비하면 그 명성은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ㅇ 1977년: 영화 <겨울여자> 한국 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58만 동원
ㅇ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 한국 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67만 동원
ㅇ 1993년: 영화 <서편제> 한국 영화 흥행 1위, 서울 관람객 약 100만 동원

ㅇ 1998년: 소극장 2관 완공(1관 865석, 2관 205석)

ㅇ 2001년: 단성사 신축공사 착공

ㅇ 2005년 2월 2일: 단성사 7개관 153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개장

단성사의 역사는 한국 영화사를 고스란히 품어 안고 있다. 일제시대에서의 한국영화의 시작과 <아리랑>의 흥행 그리고 외국 직배 영화의 공세 속에서도 꾸준히 한국영화의 흥행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멀티플렉스 상영관으로의 변신은 영화관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만큼 다양한 나이테를 보유한 영화관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 영화사의 깊이와 너비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인터뷰] 단성사 사료 수집의 대가, 조상림 상무를 만나다

단성사에 관한 많은 사료들을 확보하고 계십니다. 계기가 무엇인가요?
1966년 단성사에 입사하여 회계업무와 회사관리 등을 하면서 무심코 뒤진 창고속에서 단성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와 사진을 하나 둘씩 모으게 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단성사에서 상영된 영화 목록을 다시 정리하고 있는데 약 75%까지 IMDB등을 뒤져가면서 현대화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25%는 워낙 외화 제목이 엉뚱하여 어떤 영화인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단성사의 현재는 <아리랑>의 상영에 있습니다. 그런데 조희문 교수의 경우 <아리랑>의 감독이 나운규가 아닌 일본인 스모리 히데까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요?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스모리 히데까즈는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당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한 충무로 모자점의 할머니 요도 도라조의 아들이 스모리 히데까즈입니다. 그가 한 작품으로 세 작품이 있지만 그는 영화도 잘 모를 뿐더러 단지 이름만 내건 것일 뿐이죠. 이건 논쟁의 가치도 없습니다.

<아리랑> 상영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으신지요?
단성사에는 남아있지 않구요. 신문기사 등을 통해 1953년 대구에서 상영되었다는 사료가 있습니다. 그 이후 필름의 상영여부나 존재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도 아마 없을 것 같아요. 후일 <아리랑>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 소유하고 있다가 임수호라는 단성사 직원이 필름을 구매한 후 상영을 해왔으며 그는 아리랑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고 합니다. 또 그는 국내 배급의 1호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 외에 <아리랑>과 관련된 뒷얘기가 있는지요?
나운규의 고향이 회령입니다. 그 외에도 친구 윤봉춘 등이 있지요. 저도 고향이 회령입니다만, 북한에서는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의 고향이 회령인지라 그 곳이 영화의 성지로 알려지고 있답니다. 물론, 김정일도 영화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나운규와 김정숙의 고향인 회령을 우상화에 엮는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단성사는 197∼8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을 주도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여자> 58만, <장군의 아들> 68만, <서편제> 100만은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이러한 흥행을 단성사가 주도한 배경은 무엇일까요?
일제시대 국내 영화촬영기가 단 두 대였다고 합니다. 한대는 박승필이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한대는 일본인이 소유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내 영화인들은 단성사의 박승필을 통해서 영화촬영을 하였는데, 박승필은 한국영화의 촬영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상영은 항상 단성사가 해야 함을 내걸었다고 합니다. 이후 단성사가 민족의 영화관이라는 이미지가 자리잡으면서 당시 서울극장이나 대한극장 등 시설 측면에서 더 좋은 극장보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흥행을 선두하는 극장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습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확대로 인해 개인극장들의 경영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멀티플렉스 이전 단성사는 한국 영화관이라는 브랜드 포지셔닝(brand positioning)이 강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멀티플렉스 이후 단성사의 포지셔닝은 어디입니까?
영화관은 비즈니스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업입니다. 300억 가치의 부동산에 연간 3억의 이익을 바라보는 시절도 있었는데, 이처럼 극장산업은 비즈니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단성사는 비즈니스도 중요하지만 문화사업이라는 관점에서 영화관을 이끌어 나갈 것입니다.


아듀! 소격동, 서울아트시네마
예술영화의 메카, 둥지를 옮기다
김준기 _ 영화평론가
아트선재센터
▲ 아트선재센터

내가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이다. 안국역에서 풍문여고를 끼고 정독도서관 방향으로 돌담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면 한국 예술영화관의 메카,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 2002년 5월, 문화의 향기가 가득하던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내에 둥지를 튼 서울아트시네마가 2005년 4월 낙원상가에 위치한 허리우드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국내 시네마떼끄의 흐름

1970~80년대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 등을 배회했고, 90년대에는 대학로에 위치하였던 ‘영화사랑’이나 ‘영화공간 1895’ 그리고 ‘문화학교 서울’ 등의 시네마떼끄를 찾아 헤매었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으로 한국시네마떼끄협의회(최정운 대표)는 서울아트시네마라는 소중한 공간을 확보하며 국내 예술영화관의 선도자로서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하였다. 최근까지 60여회의 영화제를 통해 300여 감독의 800여편을 상영하며 예술영화 팬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대만의 휴샤오시엔,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이탈리아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등의 감독전은 매진 사례가 속출하였다. 2005년 4월 14일 서울아트시네마는 ‘후원의 밤’ 행사와 함께 낙원동 시대를 시작한다. 개막전은 ‘시네필의 향연'이란 제목으로 <카사블랑카>, <정사>, <사이코>, <닥터 지바고>, <이지라이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등 194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영화사를 장식한 고전 15~18편을 상영한다(www.kotheque.org).

서울아트시네마 - 예술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

흔히 예술영화관이라고 불리는 공간이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하는 아트플러스 소속의 예술영화관은 대부분 상업영화관에서 예술영화관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수익이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하이퍼텍 나다와 씨네큐브 역시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품들로 상영작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울아트시네마는 그들 영화관과는 성격이 다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영화도서관이자 영화계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행하는 곳이다. 전 세계의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선별하여 상영하는, 그야말로 예술로서의 영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소격동 가는길

내 집 없는 설움

서울아트시네마는 매년 적자 운영을 한다. 물론 영화진흥위원회가 매년 약 3억 4천만 원을 지원하지만, 임대비 1억 5천만 원과 번역자막지원 등 기획비만으로도 빠듯한 실정이다. 그래서 인건비와 운영비는 영화요금을 통해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시네마떼끄의 전용공간이라도 있다면, 자금의 여유는 생길수 있을 것이다. 이에 서울아트시네마는 임대 해약을 눈앞에 두고 끊임없이 안정적인 둥지를 찾아보려 하였으나 낙원상가의 허리우드로 결국 귀착되고 말았다.

한국의 대표적인 시네마떼끄가 임대 계약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는 현실은 한국영화계의 현재를 말해주는 것이다. 영화산업은 1000만 관객 동원이라는 화려한 홍보문구를 내세우지만 그 뒤안길에서는 시네마떼끄 운영도 힘겨운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1960년대 프랑스의 누벨바그를 이끌었던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는 최초의 시네마떼끄인 ‘시네마떼끄 프랑세즈’가 그들의 미래를 밝히는 장소였다. 그들에게 시네마떼끄에서 상영하는 고전영화는 영화사를 관통하는 미학을 학습하는 기회였으며, 다시금 변형하고 재창조하는 훌륭한 교육장소였던 것이다. 이에 한국영화가 미래에도 전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은 영화의 기본체력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시네마떼끄의 안정적인 운영일 것이다.

기업이나 공공단체의 지원

외국 영화 감독 회고전을 할 때면 민간단체인 한국시네마떼끄협의회의 요청만으론 필름을 렌탈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때때로 영상자료원의 보증이나 영화진흥위원회의 서면 보증 등을 요청하여 귀한 고전 필름들을 입수하게 된다. 서울아트시네마가 약 3년간 그토록 상영하고 싶어도 상영할 수 없었던 감독 회고전이 있다.이탈리아 감독 비스콘티의 회고전이 그것이다. 서울아트시네마는 그 원인이 곧 든든한 후원자가 없음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 <아사히신문>이 오래 전부터 예술영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행하고 있다. 비스콘티 감독 회고전을 개최하는데 <아사히신문>의 대표가 이탈리아로 직접 가서 회고전 행사에 계약하고 필름을 가져온다. 미국의 경우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가 예술영화관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행하기도 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고려할 때 기업들과 예술영화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시네마떼끄 전용 아카이브(archive) 구축

한국영상자료원의 역할은 국내외 영화필름과 영화문헌를 발굴하고 수집, 보관, 전시 등을 행하는 문화관광부 산하 기관이다. 하지만 현재 외국필름을 모으기에는 예산이나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영화 모으고 관리하기에도 역부족인 상황인 것이다. 이에 시네마떼끄는 외국감독 회고전을 개최하려면 외국으로부터 필름 렌탈료와 필름 회당 상영료 그리고 운송료까지 포함하여 영화 한 편당 약 200만원이 소요되는 실정이다. 제대로 된 아카이브가 없다는 것이 필름 상영에 드는 비용을 두세 배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 국민의 혈세이기도 하다.

시네마떼끄에 대한 법률적 지원

아트선재센터 내부

2004년 서울아트시네마는 스크린쿼터를 모두 채우지 못해 20일 상영정지라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시네마떼끄에 대한 명확한 법률적 규정이 없어서 스크린쿼터의 적용에서부터 혼란이 생긴다.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에 적용되는 법률은 예술영화의무상영과 한국영화의무상영(스크린쿼터)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우선 예술영화를 1년에 219일 이상 상영하되 그 중 70일은 한국영화를 상영해야 한다. 그리고 1년에 총 106일의 한국영화 의무상영도 아울러 준수해야 한다. 하지만 더 우스운 것은 상영할 국내 예술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70일을 채우기도 힘들다는 것이 각 예술영화관의 목소리이다.

예술영화에 대한 판정은 영화진흥위원회 소분과인 예술영화 인정 심사위원회의 인정을 받거나, 서울 시장점유율이 1% 이내인 국가의 작품(2005년의 경우 한국, 미국, 홍콩, 일본 제외), 영화진흥위원회 제작배급지원작 등을 분류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법규는 현실적인 잣대없는 법률적 규정이라 서울아트시네마마저 이 법률을 위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행히 장소를 옮긴다고 하니 20일 법률정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제 국내에서도 시네마떼끄에 대한 법률적 지원을 규정하고 그에 대한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할 것이다. 예를 들자면, 부산의 시네마떼끄는 부산시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 부산의 영상산업육성과도 맞물리는 사안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도 예술영화관에 대한 관심이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 가치가 있음을 인식해주었으면 한다.

시네마떼끄여, 영원하라!

한국영화의 힘은 곧 시네마떼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허리우드극장으로 옮겨가는 곳에는 필름포럼이라는 2개관의 예술영화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올 10월에는 서울역사에 2개관의 예술영화관이 더 들어선다고 한다. 예술영화관의 확대는 점점 활발해질 것이다. 이에 예술영화에 대한 의미와 예술영화관의 현실을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국제극장, 이강우 회장의 행보
지금은 사라진 공간의 추억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로 개봉한 국제극장.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로 개봉한 국제극장.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재일교포 출신 이강우(李康友) 회장. 1913년 5월 18일. 밀양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출신. 전국경제인연합회 해외위원. 삼아약품공업(주) 회장. 동아흥행(주) 회장. 재일 한국인 상공인 연합회 최고 고문. 그의 화려한 삶의 이력에 비해 국내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명성은 낮설기만 하다. 더군다나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극장도 지금의 2030 세대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름이다.

국제극장은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의 단관 영화관으로 개관하였다. 영문명으로 International Theatre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개관작으로 안소니 만 감독의 <세레나데>(1956)를 상영하였다.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걸려 있다.

당시 국제극장 건물의 위용은 극장 앞의 넓은 광장과 대형 분수대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허리우드 극장의 하우종 상무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로서는 고급인력들이 국제극장 직원으로 채용되었으며 약 50여명의 직원들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극장 상영업계로서는 드물게 직원 체육대회와 조기 축구회, 산악회등의 모임이 활성화 될 정도로 국제극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한편, 1961년 1월 18일 국제극장은 한국 최초의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상영하게 된다. 홍성기 감독, 김지미, 신귀식 주연의 <춘향전>이었는데,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신상옥 감독, 최은희, 김진규 주연의 <성춘향>과 함께 동일한 고전을 영화화한 작품으로서 감독들의 기 싸움 또한 대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국제극장의 역사상 ‘한국 최초의 총 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대참패를 하게 되고 신상옥감독의 <성춘향>은 공식집계 관객 150,000명, 비공식 집계 360,000명을(당시 서울인구 250만명) 동원하게 된다. 한국영화사에서 신상옥 감독의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이다.

이강우 회장은 당시 동아영화흥업(주)을 통해 영화수입과 제작에도 나섰는데 <타워링> <러브스토리> <대부> <로미오와 쥴리엣> <용쟁호투> <모비딕> <헬 라이트> 등 화려한 수입작품들을 보유하였으며, 경기도 파주에 영화제작 촬영소를 소유하면서 현재까지 약 79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1968년 동아영화흥업(주)은 동아흥행(주)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74년에는 신상옥 감독의 명보실업(주)이 소유하고 있던 허리우드 극장까지 인수한다. 당시 서울의 10대 개봉관 중 동아흥행(주)이 2개를 소유한 것이다.

제작과 수입 그리고 상영까지 이렇듯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국제극장은 당시 법적으로는 임시 가건물로 지어진 건축이라 후일 광화문 도심재개발 정책에 따라 1985년 4월 14일 폐관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으로 내걸린 <사막의 라이온>의 간판이 철거되는 모습은 서울시민들과 울고웃던 화려한 시대를 마감짓고 쓸쓸히 돌아서는 국제극장의 뒷모습을 보여주는듯 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애잔한 맘이 들게 한다.

국제극장은 근대 건축물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상황이라 근대 건축물 보존의 차원에서 그 사료를 충분히 남기지 못하였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천승(李天承)의 설계로 1957년에 세워진 이 극장은 장차의 도시계획을 감안하여 임시 가건물이라는 조건이 붙었다고는 하나, 구성면에 있어서 당시로서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것이다. 즉 스틸 말리온(steel mullion)을 사용한 전면 유리면의 근대성과 거기 대조된 측면의 중후한 처리 등이 그것이며, 내부좌석도 갤러리식이 아닌 스타디움식으로는 처음의 시도였다고 한다. 1957년 9월에 준공되었다.

- 서울특별시 서울육백년사 홈페이지(http://seoul600.visitseoul.net)

한편, 현재 동아흥행(주)을 맡고 있는 이창무 회장은 허리우드 극장 대표로서 2001년부터 서울시극장협회 회장까지 역임하고 있다. 이창무 회장이 이강우 회장과의 연을 맺은 것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다만, 그가 일본에 있으면서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인 최배달의 수제자였다는 점과 이강우 회장 가계와의 연으로 허리우드 극장의 운영을 도맡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이강우 회장은 1990년 1월 3일 동경에서 작고하게 된다. 영화상영업으로는 전국적인 규모는 아니었지만 한국영화 제작과 외국영화 수입에 있어서 그의 뚜렷한 발자취는 분명 더 깊게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박정희의 근대화 시대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국내에서의 이강우 회장의 행보 또한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동아흥행(주)는 재일교포의 자본으로 국내 영화업계에 투자한 사례라는 점과, 당시 박정희는 외자 유치를 갈구했다는 점 때문에 서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강우 회장은 당시 일본에서도 영화업을 하였으며, 지금도 동경 신주쿠에는 동아흥행(주) 소유의 극장과, 더 나아가 대만에까지 극장을 소유한 거부였다.

이러한 배경을 놓고 볼 때, 국제극장이라는 공간은 한국영화사 속에서 날실과 씨실처럼 얽혀있으며 이강우 회장은 일본과 한국이라는 두 국가의 영화산업을 횡단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주목하고픈 대상이다.

애관극장, 국내 최초의 극장
110년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꿋꿋이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895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
▲ 1895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애관극장

인천광역시 중구 경동 238번지, 이곳은 국내 최초의 극장 애관극장이 위치한 곳이다.인천의 애관극장은 110년의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이다. 애관극장은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되던 시점에 인천 경동 네거리에 협률사(協律舍)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02년 황실에 의해 서울 정동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선 극장이며,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선 것이다. 다만, 협률사에 관한 정사(正史)가 존재하지 않고 인천의 시사(市史)에만 자료가 남아있어 공식적인 기록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1895년 협률사(協律舍)는 부산 출신의 인천 갑부 정치국에 의해 단층 창고 형태로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흥부놀부전>과 같은 인형극에서부터 신파극이나 창극, 남사당패들의 땅재주 등 각종 공연물들이 공연되었다.

1905년 인천 중구 사동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회전무대가 설치된 공연장 가무기좌(歌舞技座)가 세워졌다. 주로 일본 신·구극을 공연하면서, 가끔씩 마술 같은 흥행물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공연장은 1930년에 화재로 사라졌다.

그리고 1909년 지금의 신포동 외환은행 자리에 표관(瓢觀)이란 극장이 개관하였다. 당시 표관은 주로 일본영화와 뉴스를 상영했는데, 객석은 약 800석 규모로 대형 공연장인 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좌석은 남좌여우(男左女右)로, 남자는 왼편 줄에, 여자는 오른편 줄에 앉도록 엄중하게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문화관(文化觀)으로 개칭되었으며 인천시에서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2층 벽돌 구조의 애관극장

한편, 협률사는 잠시 개항장 인천의 이미지를 따서 축항사(築港舍)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1920년대부터 애관(愛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애관이라 함은 곧 ‘보는 것을 사랑한다’라는, 매혹적인 이름인 것이다.

이름이 변화하면서 건물형태도 뒤바뀌게 된다. 초창기 단층 창고 형태에서, 왼쪽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2층 벽돌 구조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애관극장은 한국전쟁 중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되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애관극장(愛觀劇場)이라는 이름은 1960년 9월 재개관 때부터 사용된 것이다. 좌석규모는 약 400석이었는데, 영화와 악극을 함께 보여주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이미자, 나훈아 리사이틀이 있는 날이면 몰려드는 인천 관람객들로 인해 사고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또한, 애관극장이 위치한 인천 경동거리는 그야말로 '시네마천국'이었다. 오성극장, 피카디리극장, 명보극장, 중앙극장 등 인천의 주요 극장들이 모두 이곳에 위치했고,인근에는 제물포고와 인화여고가 있어 학생들이 주요 고객들이기도 했다. 특히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같은 영화는 이곳에서 직접 제작, 배급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애관극장의 열기는 차츰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현재 극장 운영주인 탁경란 사장은 1960년 애관극장을 재건한 이봉열씨에게서 1972년 극장을 인수한 탁상덕씨(91년 별세)의 막내딸이다. 아버지의 별세 후 애관극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외환 위기 때 부도를 맞자 미국에서 들어와 경매로 이 극장을 재인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99년 11월 18일 화려하고 세련된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대명사 CGV인천14(약 4000석 규모)의 개관으로 경동거리에 있던 애관극장, 씨네팝극장, 피카디리극장, 미림극장 등 기존 극장들은 시설 개보수라는 맞불카드로 맞섰다. 그러나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의 관객이탈은 막을 수 없는 대세였다. 그리고 중심가 상권 역시 남동구 쪽으로 옮겨가는 터라 예전의 부흥을 다시 기대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재의 애관극장

이후 애관극장은 2004년 1월, 5개관 86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개관했다. 애관극장의 탁경란 사장도 멀티플렉스라는 시대적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었을 터이다.

현재 경동거리에는 애관극장만 유일하게 남아있다. 110년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지금까지 꿋꿋하게 버텨준 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인,) 아버지의 가업을 다시금 일구어내고픈 탁경란 사장의 의지이다. 또한, 지역상권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네 상인들은 애관극장이 다시 일어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국내 최초의 극장에 보내는 응원이다.

110년 역사를 지닌 국내 최초의 극장. 아직은 비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애관극장은 우리의 극장사에서 반드시 다시 되돌아봐야 할 과제이다.

자유당 시절의 영화 상징 ‘평화극장’
평화극장과 임화수
김준기 _ 영화평론가
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 임화수는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를 정도로 그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영향력을 바탕으로 영화계의 황제로 군림하게 되었다.

종로 4가 5번지, 보령약국 인근에 자리한 평화극장. 지금 그 자리는 한일빌딩이라는 고층 건물로 변해 있지만, 1950년대에는 평화극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은 당시 한국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던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 임화수가 사장으로 있었던 공간이다.

임화수는 1924년생으로 경기도 여주군 갑천면 가야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권중각으로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개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임화수’로 개명하였다. 1941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절도와 장물 수수죄로 복역을 하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후 평화극장의 전신이었던 제일극장에서 매점 일을 하며 극장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임화수의 가파른 성장은 전후를 기해서 이루어진다.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1996)를 보면 부산 피란시절 도박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된 부산의 거부 손종록의 조카사위가 되면서 본격적인 연예 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임화수는 종로 4가 제일극장을 염가로 불하받고 1951년 8월 24일 평화극장이라는 이름으로 극장을 재개관하여 당당히 극장주로 영화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과 결탁하면서 예술과 정치를 넘나드는 줄타기를 시작하였다.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영화배우, 연극배우, 악극단배우 등 연예계를 총망라하여 선거행사 등 각종 정치적 모임에 참여 시키고, 연예계 유명 여배우들을 자유당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소개를 하는 로비도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졌다.

임화수의 사업 범위는 다양하였지만 초창기에는 악극단을 통한 공연물로 재력을 쌓아나갔다. 평화극장이 종로 4가에 위치하고서도 여전히 재개봉관으로 남아있었던 이유도 1950년대 당시엔 영화보다 악극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악극단은 한국 연예 주식회사를 통해 운영되었는데 당시 김희갑, 양훈, 양석천, 김진규, 김승호 등이 전속되어 활동하였다.

임화수 일대기 영화
<충무로 돈키호테>(1996)

임화수는 연예계 폭력 건으로도 유명한데 전속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김승호를 구타해 3일 간의 치료를 받게 하였고, 주선태를 연행하여 7일 간 폭행했으며, 김진규, 윤일봉, 박암이 다른 회사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이유로 주먹을 휘둘렀다. 또, 희극배우 김희갑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벌금 3만환의 형만 받기도 했다.

1950년대 당시 임화수의 직함은 다양하다. 전국 극장 연합회 부회장, 서울시 극장 협회장, 한국 영화 제작가 협회 부회장, 한국 연예 주식회사 사장, 반공 예술인 단체장, 평화극장 사장 등 자유당 정권과 부침을 함께 한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더 나아가 전국 극장 문화단체 협의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은 국내 연예계가 모두 그의 손아귀에 있었음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훗날 그는 전국 극장 문화단체 협의회 산하에 스스로 제4대 대통령 이승만과 제5대 부통령 이기붕 당선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으며 영화배우와 예술인들을 강제로 부정선거에 가담시켜 문교부장관의 물망에 까지 올라가기도 하였다.

임화수가 행한 영화계 행보로는 1954년 『연예시보』를 창간해 6년 간 발행하였고, 『카오스』라는 연예 월간지를 발행해 한국 연예계의 나갈 길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또한, 1956년 영화진흥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점 그리고 1957년 외국과의 첫 합작 영화 등이 그가 이룬 성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하여 연예계를 자유당 정권의 끄나풀로 만들었던 일들과 각종 반공 행사에 소속 연예인을 총 동원하여 부패한 권력과 밀접하게 결탁되었던 점이 곧 한국 영화를 좌지우지하던 실력자로서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임화수가 일구어낸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국내 최초의 외국 합작 영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957년 국내 최대 영화사인 임화수의 한국 연예 주식회사와 홍콩의 쇼브라더스(당시“소씨부자”)와 함께 <이국정원>이라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감독은 한국에서 전창근이 참가하였고, 홍콩에서는 도광계가 참여하였으며, 쇼브라더스의 제안으로 일본인 감독 와가수기 미츠오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인의 참여를 엄격하게 규제하였기 때문에 영화가 소개될 때 일본인 감독의 이름은 삭제되었다. 당시 합작을 추진하였던 한국연예주식회사의 대표 임화수는 “합작의 상대방이 동남아 일대 제작흥행의 절대세력자인 소씨부자인 만큼 그들의 무대인 동남아 전역에의 한국영화진출이 새로운 문화교류와 상로를 열게 될”것을 기대하였다. 쇼브라더스 역시 같은 기대를 가졌다. 막 홍콩으로 본거지를 옮겨 최초의 ‘이스트만 컬러’ 영화를 제작할 것을 결심한 쇼브라더스에게 한국이라는 미개척 시장을 덤으로 안고 가는 것은 위험의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이국정원>은 한국에서 크게 성공하였지만 홍콩과 다른 나라에서는 그리 흥행성적이 좋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 판권이 없었던 쇼브라더스는 큰 이익을 얻지 못했고, 한국연예주식회사 역시 쇼브라더스가 동남아 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로 시장을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국정원>의 한국 내에서의 성공은 다른 영화사들이 홍콩의 군소영화사들과 합작을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홍콩의 이국적인 풍경을 담은 국제적인 영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러 합작 역시 59년을 고비로 주춤한다. 한국 내에서의 흥행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중에서)

사형직전의 임화수 모습

그 외에도 임화수는 <길 잃은 사람들>, <논산 훈련소에 가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등 3년간 15편의 작품을 만들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은 자유당 정권을 위한 정치적 목적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평화극장은 1960년 4월 26일 3.15 부정선거에 따른 분노한 시위군중들에 의해 간판이 떨어지고 극장 일부가 불에 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5.16 혁명군에 의해 임화수는 자유당 정권의 대표적인 정치 깡패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패척결 대상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5.16 혁명재판은 1961년 4·18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마치고 귀교하는 고려대생 10여명을 부하 폭력배를 동원하여 무차별 폭행하도록 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도 자유당 정권의 몰락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처형 전 임화수는“나는 한국영화제작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고, 첫 홍콩 합작영화도 만들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후 평화극장은 임화수의 부인이 운영하다 한일극장으로 넘어가게 된다. 한일극장은 이후 1976년까지 종로가 2번관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다 강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천호동의 한일극장이 원래 종로 4가 평화극장 자리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당시 임화수의 몰락은 곧 새로운 영화계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60년대 군사 혁명 정부도 폭력과 반공을 통한 질서유지라는 형식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바뀌었을 뿐.

한국 영화계의 산 역사, 스카라극장
약초극장에서 수도극장, 그리고 스카라극장으로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51년 3월16일 수도극장 모습
▲ 1951년 3월16일 수도극장 모습

서울 중구 초동 41번지.

스카라극장의 출발은 일본 자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1935년 개관 당시 극장명은 약초(若草)극장 혹은 약초 동보 극장(이하 약초극장)으로 불렸다. 동보라는 명칭은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인 동보영화사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일제시대 당시, 일본 영화사들의 국내 투자가 부분적으로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극장 운영자는 일본인 오까모도로서 아현동에 있던 대정관(1913년 개관)이라는 극장을 폐관하고 약초극장 운영을 맡게 되었다. 당시에는 영화상영과 공연물 등이 극장에 함께 선보였는데 1944년 이난영의 남편이었던 김해송 씨가 약초극장 산하에 “약초가극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약초극장 지배인이던 홍찬 씨가 극장을 인수하여 수도극장으로 극장 명을 바꾸고 이후 단성사, 국도극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959년 당시 수도극장은 1,172석을 보유한 대형극장으로서, 그 외에 서울에서 1,000석 이상을 보유한 극장으로는 국제극장(1,613석), 명보극장(1,498석), 국도극장(1,322석), 단성사(1,210석), 중앙극장(1,170석), 시공관(1,082석), 씨네마코리아(1,002석) 총 7개 극장이 있었다.

한편, 수도극장은 한국영화사에서 끊임없이 화제를 만들었던 공간이다. 국내 최초의 키스 신이 나오는 영화상영에서부터 하길종 감독의 갑작스런 요절에 이르기까지 수도극장과 얽힌 영화계의 활동상은 다양한 사료들로 남아있다.

1954년 12월 14일 수도극장에서는 국내 최초의 키스 신이 나오는 영화 <운명의 손>(한형모 감독)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카바레 마담으로 나오는 윤인자와 방첩단 장교역의 이향의 키스 장면은 약 2초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당시 대중들로서는 영화 속에서의 키스일지라도 그야말로 문화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심지어 유부녀인 윤인자의 남편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한형모 감독을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6.25 전쟁 이후 미국식 문화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면서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 혹은 애정관과 서구문물이 상호 갈등하고 충돌하는 시기임을 알게 한다.

1955년 당시 수도극장은 대형극장이라 외화상영을 주로 하였는데, 수도극장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중앙극장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개봉하여 관람객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도극장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상영시간이 길어 중앙극장에 비해서는 관람객 수가 많지 않았다.

1956년 3월 16일 수도극장에서는 다시 한번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가 상영되었다. 한형모 감독의 영화 <자유부인>이 개봉된 것이다. 1954년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이 최초의 키스 장면으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면, 이 영화는 유부녀의 바람으로 한국사회를 온통 <자유부인> 논쟁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1956년 개봉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자유부인>은 1954년 가을부터 서울신문에 약 8개월간 연재되면서 교수 부인의 외도라는 소재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한형모 감독의 상업적인 영화 감각과 어우러지면서 영화 <자유부인>은 일약 대중들의 논쟁적인 화두로 다가선 것이다. 영화 <자유부인>은 당시 서울지역에서 약 15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였다.

1958년 7월 16일 우리나라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인 <생명>(이강천 감독)이 수도극장에서 개봉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수도극장 대표인 홍찬 씨가 자신의 영화사인 수도영화사를 통해 제작한 것인데 시네마스코프에 대한 기술력의 부족으로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 1958년 4월 20일에는 수도극장 인근에 20세기 폭스사의 설계로 지어진 대한극장이 외화 <잊지못할 사랑>으로 개관하였다.

1957년 수도극장 홍찬 대표는 안양 석수동 소재 3만평의 대지위에 스튜디오 2개동, 수중 촬영장, 현상소등을 갖춘 동양 최대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도극장, 수도영화사 그리고 안양종합촬영소까지 설립하고 더 나아가 평화신문 대표까지 역임하는 등 영화계에서 언론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이후 사업 부진과 친일파의 행적으로 인해 영화사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후 수도극장은 수익악화로 1962년 4월 성업공사의 공매로 넘어가고, 결국 김근창 씨에게 낙찰되었다. 그리고 안양종합촬영소는 1961년 홍성기 씨에게 인수되었다가 1966년 신상옥 감독이 재인수하여 신필름의 주요 제작 거점으로 활용하게 된다.

1962년 9월 13일 수도극장은 스카라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재개관한다. 스카라극장은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인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당시에도 스카라극장은 70미리 영사기와 대형상영관이라는 현대식 시설로 서울 10대 영화관으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스카라극장 시절에도 이 공간은 영화계에 끊임없이 화제를 안겨주곤 하였다. 1979년 2월 9일 하길종 감독의 영화 <병태와 영자>가 스카라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하길종 감독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미국 UCLA 유학파 출신이었는데, 2월 25일 자신의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스카라극장을 찾았다가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충무로의 호사가들은 하길종 감독이 몰려드는 관객을 보고 흥분하여 쓰러졌다고도 하였다. 아무튼 한국 영화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왔던 젊은 지성파 감독의 요절은 우리 영화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까지 스카라극장은 초기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이다. 국내 극장 중에서 단성사, 대한극장, 피카디리 등이 재개관하고 국도극장이 폐관을 하였지만 스카라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70년이라는 긴 역사를 버텨온 것이다.

물론, 지금은 예전 10대 개봉관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못하지만 한국 영화사 곳곳에서 드러나는 약초극장과 수도극장 그리고 스카라극장과 뒤얽힌 영화계 역사들은 이 공간의 소중함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한국 영화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 곳이 더욱 의미 있는 역사적 공간으로 되살아나길 희망해본다

중앙시네마와 벽산그룹
1950년대 ‘극장왕’ 벽산 김인득 회장의 발자취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벽산(碧山) 김인득 회장
▲ 벽산(碧山) 김인득 회장

1915년 8월 17일,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4년 마산공립상업학교(현 마산상고) 졸업. 1951년 무역과 영화수입업을 하는 동양물산 설립. 이후 전국 주요 17개 도시에 여러 극장을 소유하며 “극장왕”으로 불리워짐. 1962년 단성사,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시네마)등을 매각하며 한국스레트공업 주식회사 인수. 1972년 자신의 아호를 딴 벽산그룹으로 사명을 바꾸며 그룹 회장에 취임. 1997년 벽산 김인득회장 타계.

벽산 김인득 회장은 해방후 부산일보 총판국장 신분으로 신문용지 구입을 위해 일본에 갔다가 재일동포 영화사업가 이현수(李鉉琇)씨를 만나게 된다. 이현수는 당시 부산의 부산극장, 시민관, 동아극장, 봉래관 등을 소유한 부산 극장가의 거부였다. 그러나 적산기업을 경영하던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치부하여 사직당국에 고발하는 사회풍조가 만연한 터라 그의 극장 실무자들 또한 탈세,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되는 등 극장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 김인득 회장은 이현수 씨의 권유로 그의 소유였던 부산 동아극장의 지배인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흥행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50년 흥행업에 발을 내딛게 된 김인득 회장은 외국영화를 수입하여 전국의 영화관에 배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서울에 동양물산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1952년 5월 경영난에 직면하여 도산위기 상태에 있던 단성사를 동양물산이 인수하게 된다. 이것은 배급업에서 흥행업으로의 사업 확대를 뜻하는 것이며, 이후 단성사의 인수가 동양물산의 성장에 큰 디딤돌로 작용하게 된다.

동양물산의 외국영화 배급이 점차 사업궤도에 오르면서 동양물산의 외화배급 물량은 전국 배급의 약 60%까지 차지하게 된다. 특히, 동양물산은 직영체제의 운영방식을 확대하기 위해 인천의 동방극장, 대구의 만경관, 부산의 명성극장, 진주의 시공관, 대전의 중앙극장 등을 임차경영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56년에는 단성사를 증축하여 객석수를 확대하고 외화상영 전문관으로 자리매김시키면서 국내 최고의 흥행수입을 거두기도 했다.

1934년. 단관의 중앙극장

그리고 1956년 5월 서울지역에 또 하나의 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 명동에 자리한 중앙극장(현 중앙시네마)이었다. 당시, 중앙극장도 경영난에 직면한 때였다. 이에 김인득 회장은 재개봉관에 머물러있던 중앙극장을 단성사와 차별화하여 멜로나 순수예술작품 전문관으로 자리매김시키며 개봉관으로 승격시킨다. 그것은 주효한 전략이었다. 당시 명동입구는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주로 멜로물을 상영하면서 젊은 연인들의 눈물샘을 자극시켰다. 당시 공개된 작품 중 문희 주연의 <내 몫까지 살아주>에서는 문주란의 구슬픈 노래가사로 인해 여성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히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 김인득 회장의 극장인수는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57년에는 부산의 대영극장을 인수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서울 단성사 건너편에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시네마)과 부산에 부영극장을 신축하면서 김인득 회장은 실로 흥행업계의 ‘극장왕’으로 자리 잡아 나갔다.

그러나 이 무렵 김인득 회장은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의 사업방향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김인득 회장은 1962년 한참 흥행사업의 전성기에 단성사와 반도극장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한국스레트공업 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다. 인수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 운동에 따른 농가주택 개량 사업에 힘입어 사업은 날로 확대 성장세에 놓이게 된다. 바로 이것이 훗날 벽산그룹의 중추적인 기반이 되었으며, 극장 흥행업은 벽산그룹의 모태 사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김인득 회장이 극장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전환을 한 배경은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영화 흥행업이 TV의 등장으로 인해 사업이 축소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기도 하다. 극장업은 일요일이 대목인데 주일을 교회에 나가는 그로서는 모순된 사업이기도 했을 것이다.

2005년, 5개관의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의 역사도 시나브로 70년
이라는 긴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후 김인득 회장은 동양물산 소유의 극장을 모두 처분하고 명동 입구에 자리한 중앙극장만을 남겨두게 된다. 1960년대 중앙극장은 단성사, 대한극장, 을지극장, 아카데미와 함께 외화관으로, 국제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수도극장은 방화관으로 분류되었다. 중앙극장이 상영한 외화로는 아카데미 수상작들인 <록키>, <사관과 신사>, <디어 헌터>, <토요일 밤의 열기> 등으로 영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 모은 극장으로 자리 잡았다.

1990년대 초 삼성, 현대, 대우, 선경등 대기업의 연이은 영화업계 진출 시 벽산그룹에서도 부산에 동양영화사를 설립하며 극장 인수를 타진하였으나 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1991년 9월 벽산그룹의 40주년 기념행사는 중앙시네마에서 개최되었다. 이 날, 김인득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김인득 회장의 장남 김희철 부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김인득 회장은 사업의 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와 경영을 마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픈 맘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후 1997년 김인득 회장은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좌우명을 남긴 채 삶을 마감하게 된다.

2005년 현재 중앙시네마는 청계천 복개 공사를 지켜보며 벽산그룹의 상징적인 모태 기업으로서 극장 리모델링을 논의한다고 하니 그 향방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 대한극장
반세기 동안의 끊임없는 자기 변화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국쾌남 회장
▲ 국쾌남 회장

국쾌남 회장. 1922년 전남 담양 출생.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출신. 제 4대 전남 담양 국회의원. 세기항공 사장. 세기상사 회장. 체조협회 회장 등 역임

1952년 국쾌남 회장은 외화수입업체인 세기상사로부터 시작하여 1958년 대한극장 개관을 이루게 된다.

대한극장은 1956년 미국 20세기 폭스 사가 설계하여 만들어진 창문이 없는 무창 건물 제 1호였다. 1956년에 착공하여 1, 2차의 공사를 거쳐 1958년 4월 18일 좌석 수 1924석으로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 작품으로는 게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가 주연한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이었으며, 1960년에 도입한 국내 최초의 70미리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대한극장의 대표적인 상징물이 되었다.

1962년 2월 1일 대한극장은 외화 <벤허>를 7개월간 장기상영하면서 무려 70만 명이라는(당시 서울 인구 약 250만명)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였던 것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에도 <벤허>는 35밀리 판으로 계열극장이었던 종로 3가의 세기극장(현 서울극장)에서 3개월을 더 상영하였고 수입사인 세기상사는 그야말로 돈방석을 깔고 앉는 대흥행을 거두게 된다. 대한극장은 1972년, 1982년, 1997년 등 <벤허>를 여러 차례 재상영하면서 대중들에게 70미리 대형 상영관의 웅장함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63년 국내 영화법 개정으로 국산영화 제작업과 외화수입업의 일원화가 이루어지자 외화수입 업체였던 세기상사가 한국영화 제작에까지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이후, 세기상사는 홍세미 주연의 영화 <춘향>으로 흥행에서도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60년대 당시의 <벤허> 광고

세기상사는 영화제작과 흥행업 그리고 항공사업 등의 비즈니스를 통해 1968년 12월 27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주식 상장 인가를 취득하고 공개법인 요건을 구비하여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게 된다. 현재에도 세기상사는 국쾌남 회장의 장남인 국정본 회장이 약 36% 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로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는 업체이다.

한편, 1969년 8월 22일 세기상사의 자회사였던 세기항공이 안성 상공에서 추락하여 공화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5명의 사상자를 내는 사고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 조종사였던 신문섭 씨의 보상금 처리가 지연되고 후일 보상 조치가 부도처리까지 되면서 세기상사의 사업은 정부의 감찰을 받게 된다. 급기야 정부에서는 세무사찰 등을 벌이며 국쾌남 회장의 구속에까지 이르게 된다. 보상금 부도처리에 대한 사유는 언론지상에는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보상금 지체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다 3년여의 시간이 지난 1972년 7월 14일 밤 국쾌남 회장이 관세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후, 1975년 세기상사마저 부도에까지 이르면서 외화수입과 영화제작, 배급 그리고 전국 6개 극장을 직영 소유한 거대 메이저 영화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당시 서울의 대한극장, 세기극장(현 종로의 서울극장), 부산의 문화극장, 인천의 피카디리극장 등이 세기상사의 소유였다.

<닥터 지바고>, <도라 도라 도라>, <아라비아의 로렌스>, <사운드 오브 뮤직>, <남태평양> 등 70미리 대형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았던 대한극장의 웅장함과는 달리 그 뒤안길은 무척이나 신산하였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 충무로 극장가는 대기업의 영화산업 진출에 따라 기존 극장들의 세력재편이 이루어지는 시점이었다. 특히,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들은 극장 인수와 임대에 경쟁적으로 나서게 된다. 삼성, 대우, 현대, 제일제당 등이 당시 극장 흥행업에 진출하였던 대표적인 기업들이었다.

현재의 대한극장

대우는 1996년 10월 대한극장, 스카라 극장과 임대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1995년에는 이미 씨네하우스 4개관을 300억에 인수한 상황이었다. 삼성은 서울극장 1개관, 명보극장 2개관, 씨네코아 1개관을 임대하였으며, 이후 삼성생명 지하와 분당, 부산 등에 극장을 신축할 계획이었다. 또한, 현대그룹의 금강기획은 압구정에 극장을 신축하여 씨네플러스라는 극장을 개관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일제당은 강변역에 호주의 극장전문업체인 빌리지 로드쇼와 함께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공동 개발하였다. 본격적인 멀티플렉스 시대를 알리는 영화관 1호였다. 1998년 4월 4일 개관한 제일제당의 멀티플렉스 영화관 1호 CGV 강변점이 도심이 아닌 부도심 관객몰이에 성공하며 바야흐로 단관 영화관의 유효기간이 종료되었음을 선언하였다.

대한극장도 이러한 흐름을 간과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2000년 5월 21일 영화 <징기스칸>을 마지막으로 대한극장의 70미리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리고 2001년 12월 15일 8개관, 2750석 규모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대한극장은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 2005년 현재 대한극장은 2개관을 추가하여 10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하였으며, 2004년 극장의 관람객 수도 약 200만 명에 육박하는 서울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대한극장의 이러한 성공은 아마도 끊임없는 자기 변화의 결과물로 여겨진다.

대한민국 대표 영화관, 대한극장이라는 자사의 홍보문구처럼 항상 거듭나는 영화관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대중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영화관으로 자리매김하길 다시 한 번 기대한다.

by 100명 2007. 3. 20. 0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