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실패한 우등생 3인의 '솔직 토크'

'명문대 진학'은 모든 중고생의 일생일대 목표다. 내로라하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긴다. 정말 그럴까? 여기, "인생의 과녁을 대학에 맞춰선 안 된다"고 말하는 세 청년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때 '명문대 합격'의 감투를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 언뜻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셋의 주장엔 분명한 '근거'가 있었다. "익명을 보장해주겠다"는 다짐 끝에 얻어낸 이들의 진솔한 얘기에 귀 기울여보자.

조언1ㅣ'1등 강박관념' 빨리 떨칠수록 좋다

A(31)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모 자산운용사 펀드매니저로 3년간 근무했다. 하지만 지난겨울, 돌연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제주도에 정착했다.

중고생 시절, 그는 '자타 공인' 모범생이었다. 전문직 종사자인 부모님은 아들에게 최적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해줬다. 집 안은 늘 책으로 가득했고 노력한 만큼 성적도 괜찮게 나왔다. '1등 강박관념'이 생긴 건 그 무렵부터였다. 다른 과목에 비해 유독 수학 점수가 잘 안 나왔던 그는 "이과 가면 1등을 놓칠 것 같아" 문과를 택했다. 대학 전공도 취업률에 맞춰 기계적으로 경영학을 골랐다.

취업 직후 본격적 고민이 시작됐다. 일단 입사 초기부터 업무량이 엄청났다.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했고 오후 10시 넘어서야 겨우 퇴근길에 나섰다. 주말 출근도 다반사였다. 그는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루 10시간 넘게 하다보니 너무 고역이었다"며 "그제서야 '고민 없이 대세에 맞춘 선택'이 얼마나 잘못된 건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흔히 명문대 졸업 후 좋은 데 취직하면 장밋빛 인생이 절로 펼쳐질 거라 생각하잖아요. 저 역시 그랬고요. 하지만 진짜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지금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면 '무슨 대학에 들어가느냐'보다 '어떤 일을 할 거냐'부터 고민하겠습니다."

조언2ㅣ진짜 창피는 '실패하고도 못 배운 것'

B(24)씨는 명문대 법학과 08학번이다. 하지만 요즘 그의 직업은 '레스토랑 서빙 담당 아르바이트'다. 학교엔 휴학계를 낸 상태. 장래 희망도 '외식업 종사자'로 바뀌었다.

B씨는 교육열 높기로 소문난 대구 수성구 출신답게 초등학교 때부터 치열하게 노력했다. 모 자율형사립고 입학 후 조바심은 한층 심해졌다. "고 1 첫 시험에서 전교 12등을 했어요.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제겐 충격적 사건이었죠.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어요. 밤잠 줄여가며 노력한 끝에 겨우 전교 5위권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경쟁은 이어졌다. 1학년 때부터 학점에 매달리는 동기들을 보며 그는 점차 지쳐갔다. 전에 없던 폭식 습관까지 생겼다. '머리 식힐 곳이 필요해' 시작한 레스토랑 일은 뜻밖의 울림을 줬다. "처음엔 요령 부족으로 만날 혼났어요. 마냥 서럽고 억울했는데 차츰 '나도 못하는 게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맘이 편해지더라고요."

2년쯤 전, 우연히 사촌동생의 수시 전형 출제용 자기소개서를 봐주던 그는 '실패한 경험을 적고 그것에 대해 느낀 점을 쓰라'는 문항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실패다운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어쩌면 실패가 무서워 발버둥쳐 왔는지도 몰라요. 실패의 원인은 무조건 '능력 부족'인 줄만 알았거든요. 하지만 실패 없는 인생이 어딨겠어요. 후배들에게도 '진짜 비참한 건 실패 자체가 아니라 실패하고도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조언3ㅣ오롯이 '나 자신의 행복'에만 집중해라

C(23)씨는 부모 의사를 좇아 고 1 때 경기 성남시에서 서울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이후 과목별 '학원 순례'가 이어졌다. 힘들었지만 내색 한 번 안 했다. '살림 규모까지 줄여가며 자식 교육에 전념하는'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C씨 부모는 아들에게 기대가 컸다. "우린 좋은 대학 못 갔지만 넌 꼭 가야 한다." 거듭되는 당부를 들으며 자연스레 그의 꿈은 '서울대 진학'이 됐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일 당시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 했지만 서울대 모 비인기 학과 입성에 성공했다. 부모는 기뻐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불안했다. 갑자기 늘어난 시간을 주체하지 못했고 모든 일정을 직접 관리하는 대학 생활도 낯설었다. 1학년 과정을 마친 그는 곧바로 입대했다. 제대 이후에도 복학을 미룬 채 여행 등으로 소일하고 있다.

C씨는 "중고생 시절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이 성인이 돼 갑자기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전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해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뭘 위해서'는 생각지 않았죠. '부모님의 행복'은 그 정답이 될 수 없어요. 부모님 그림자를 지우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비로소 행복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by 100명 2013. 7. 8. 08:37

남아공 국민들, 쾌유 기원하면서도 담담

(요하네스버그 AFP=뉴스1) 이지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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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News1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라카공화국 대통령(94)이 폐렴으로 재입원한 지 이틀째로 접어든 가운데 9일(현지시간) 그의 쾌유를 기원하는 남아공 국민들의 기도가 이어졌다.

정부 관계자들은 지난 8일 오전 만델라 전 대통령이 프리토리아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며 병환이 "위중하지만 안정된 상태"라고만 밝히고 추가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남아공 대통령실에 따르면 그는 현재 스스로 호흡이 가능한 상태다.

만델라의 병상은 부인 그라사 마셸이 지키고 있다. 마셸 여사는 앞서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한 자선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지만 취소했다.

최근 수개월간 만델라 전 대통령이 건강 악화로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국민들 사이에는 그의 안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할 때가 왔다는 분위기다.

현지 선데이타임스(ST)는 이날 1면에 "이제 그를 보낼 시간"이라는 문구와 함께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만델라 전 대통령의 사진을 게재했다.

지난해 12월 이래 만델라 전 대통령은 이번까지 벌써 네 차례나 입원을 반복했다. 지난달에도 폐렴으로 입원했다 상태가 호전돼 퇴원했다.

정부 측에서는 그가 현재 병원에서 무슨 치료를 받고 있는지 확인해주지 않았지만 가족들이 심장질환 진료소를 떠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와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동료 앤드루 음랑게니(87)는 "마디바(만델라 애칭)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의 가족들이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ST에 말했다.

음랑게니는 "일단 가족들이 그를 놓아주면 남아공 국민들도 따를 것"이라면서 "그를 우리에게 주심을 신께 감사하고 그를 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한 시민은 "94세인 그에게 무얼 더 기대하는가?"라고 반문하며 "그는 자신의 생을 살았고 우리를 위해 일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께 기도하는 것이며 무슨 일이 벌어진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by 100명 2013. 6. 10. 15:29

<앵커>

벤처 창업 활성화 여러 번 들어본 얘기지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성공 비결을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겠습니다.

김범주 기자입니다.

<기자>

최첨단 풍속 측정기를 개발해 전 세계 풍력발전소에 수출하는 사기 자즈카 씨.

이번이 세 번째 창업입니다.

이미 광통신 관련 회사로 두 번의 창업에 성공해서 400억 원 이상을 벌었습니다.

[사기 자즈카/3차례 창업 기업가 :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로운 물건을 만드는 데 열광적입니다. 대기업에 다녀서는 하기 힘든 일이죠.]

이스라엘에선 이렇게 취직보다 창업이 젊은이들의 꿈입니다.

작년에만 벤처회사 50곳이 증시에 상장을 하거나 혹은 매각하는 방식으로 평균 1천200억 원씩, 6조 원이나 벌어들이면서 벤처 창업 희망자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창업투자사들은 우리와 달리 창업자의 실패 경험을 중시합니다.

[토드 돌린저/창업투자사 회장 : 우리는 전적으로 실패 경험이 있는 사업가에게 투자합니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으니까요. 기업가만 훌륭하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재투자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문화의 큰 장점입니다.]

정부는 조연 역할을 맡을 뿐, 창업활동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야할 질카/창업투자사 회장 : 이스라엘 정부는 국내와 해외 자본 대신 위험을 껴안는 역할을 맡았는데, 아주 좋은 방식입니다.]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시스템과 과학기술 투자까지, 사회적 뒷받침이 있어야 벤처 창업이 성공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교훈입니다.

by 100명 2013. 5. 16. 07:37

가장 먼저 아이폰 3G를 구입한 각 나라 사람의 모습

기사입력 2008-07-28 09:33
[쇼핑저널 버즈]
지난 11일부터 14일까지 애플 아이폰 3G가 1백만 대 팔렸다고 한다. 작년에는 미국에서만 판매돼 6월 말부터 9월까지 약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올해 3G 모델은 21개국에서 판매돼 한 주 만에 1백만 대를 팔았다고 한다.

비록 21개국에서 동시에 팔았다고 하지만 정확히 미국 내에서 전년과 비교 시 더 많이 팔았는지 아니면 판매가 떨어졌는지 파악은 안 된다.

하지만 올해도 작년과 같이 몇 시간씩 애플 스토어에서 기다렸다는 뉴스를 보면 2008년 애플 아이폰 3G의 판매 또한 비슷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아이폰3G에 대한 전 세계의 반응이 뜨겁다는 것이다.

애플 각 매장에서 첫 번째로 구입한 사람을 모아봤다.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한국도빠른 시일 내에아이폰 출시 국이 되었으면 한다.
뉴질랜드

‘Fareastgizmos’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애플 아이폰을 구입한 사람은 뉴질랜드 사람이다.
일본

일본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사람.
스위스

스위스 취리히에서 구입한 사람.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홍콩

홍콩에서는 ‘Jealous?’가 가장 먼저 구입했다.
캐나다

캐나다 토론토의 구입자는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다.
영국

영국에서는 가장 먼저 구입한 사람은 가장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호주

호주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사람.
by 100명 2008. 7. 28. 23:09

[R&D가 힘이다] "65명 미니기업이 첨단 화장품 개발했죠"

기사입력 2008-07-23 03:46 |최종수정2008-07-23 09:38
<9> 화장품 제조 '제닉' 유현오 대표

화장품 병·튜브 필요없어 필름에 물 묻혀 붙이면 돼

석·박사 연구원 9명… 매년 10억원 이상 투자


"자동차나 전자제품은 중국과 기술격차가 2~5년밖에 안 되지만 화장품은 50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한류(韓流)를 돈으로 만들 기술이 바로 화장품입니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제닉(Genic)은 충남 논산 공장까지 합해 직원이 65명밖에 안 되는 '미니기업'이다. 하지만 화장품 세계 시장 1, 2위를 다투는 프랑스 로레알, 미국아베다만 만들 수 있던 '필름 화장품(film cosmetics)'을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할 정도로 기술력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손톱 크기의 얇은 필름에 물을 묻혀 얼굴에 붙이면 필름이 녹으면서 얼굴 전체에 바를 수 있는 화장품이 된다. 병이나 튜브로 된 화장품은 비행기에 들고 갈 수 없지만 필름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갑에 들고 다니다가 언제 어디서든 손상된 피부를 관리할 수 있는 차세대 첨단 화장품이 제닉의 '간판상품'이다.


제닉 유현오(劉玹旿·38) 대표는 1997년까지만 해도 대기업의 장학금을 받고 KIST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전도유망한 과학도였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는 취업과 유학 사이에 고민을 하던 그를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았다. 작은 벤처기업에 들어가 거의 혼자 힘으로 80억원을 수출하는 성과를 냈지만 회사설립을 도와주겠다던 미국 본사는 이내 얼굴을 돌렸다. 유 대표는 "그때 반드시 이공계 연구원도 기술력으로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이를 악물었다"고 말했다.

창업 아이템을 고심하던 유 대표의 머리에 호주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피부가 상해 고생했을 때 큰 덕을 본 마스크 팩이 떠올랐다. 당시 마스크 팩은 물 티슈와 같은 재질에 화장품 용액을 녹인 저가(低價)형과 근육통에 바르는 파스와 같은 형태의 고가(高價)형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 대표는 전공인 고분자화학을 살려 화장품을 젤리 같은 하이드로 겔 상태로 만들었다. 마스크를 얼굴에 덮으면 겔이 체온에 녹아, 화장품 성분은 피부로 스며들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얇은 필름만 남는다. 덕분에 기존 제품보다 착용감이 좋고 피부 흡수율도 뛰어났다.

하이드로 겔 마스크는 국내 유명 화장품회사에 OEM(주문자표시생산방식), ODM(주문자개발생산)으로 납품돼 현재 국내 마스크 시장의 30%를 장악하고 있다. 과학기술부 KT마크와 장영실상, 산업자원부 차세대 일류상품, 대한민국보건산업대상, 벤처기업대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유 대표는 직접 섭씨 60도가 넘는 미국의 물류 창고와 캐나다 혹한의 날씨에 운행하는 트럭에서 안정성을 테스트해 3년 이상 걸린다는 화장품 수출을 1년 만에 성공시켰다. 덕분에 매년 매출이 두 배 이상 늘고 있다.

하이드로 겔 마스크가 성공하자, 유 대표는 해외 전시회에서 점찍었던 연구원들을 영입했다. 현재 박사급 2명, 석사급 7명의 연구원이 있으며, 학부 출신 중 뛰어난 직원은 회사 경비로 대학원에 진학시켜 연구원으로 양성하고 있다. 또 매년 10억원 이상을 R&D에 투자해 하이드로 겔 마스크 이후를 대비했다. 그 성과가 바로 필름 화장품. 해외진출을 위해 CGMP(우수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공장도 준비했다.

유 대표는 "필름 화장품 기술은 약을 먹기 힘든 환자를 위한 필름 약품으로도 발전할 수 있다"며 "국제특허를 출원한 독자적인 필름 기술로 곧 상처치료용 필름 약품도 출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by 100명 2008. 7. 23. 22:32

브랜드 컬러마케팅 활성화를 위한 국내기업 실태와 해외기업 성공사례

감성에 근거한 컬러 마케팅


감성 소비시대의 새로운 마케팅 패러다임이 바로 컬러마케팅이다. 컬러 마케팅의 기원은 1920년대 미국 Parker사의 빨간색 만년필이라는 것은 많이 알려진 것으로 남성위주의 마케팅시대에서 여성을 타겟으로 한 빨간색이 도입된 것이다. 컬러마케팅이 등장하게 된 것은 새로운 제품의 구매기준, 즉 제품의 부가적 효용이 중요하게 되면서 컬러마케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브랜드 마케팅에서 미학적 마케팅으로 이행하는 시대이다. 마케팅의 초점이 제품의 속성에서 생활양식, 가치체계 등으로 변화해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컬러마케팅이다. 미학적 마케팅에서 컬러 마케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시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선명하게 인식이 되고 가장 강력하게 구매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시각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컬러마케팅의 의미

컬러 마케팅은 상품 컬러 기획이다.

컬러 마케팅은 기업의 컬러 전략이다.

컬러 마케팅은 감성소비시대의 주도적 마케팅 기법이다.


제품개발 및 계획, 머천다이징, 패키징 등의 상품 및 서비스 요소

광고, PR, POP(Point of Purchase), 디스플레이, 인테리어의 커뮤니케이션 믹스

사옥, 점포, 창고, 유통센터, 수송수단 등의 물류 및 유통믹스


컬러 마케팅을 하는 이유는 컬러에 의해서 브랜드 가치를 up grade시켜 매출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소비자 감성에 어필하는 차별화 포인트로 컬러를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상품 경쟁 요소가 되며 컬러에 의한 기업/브랜드/상품의 아이덴티티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기업 매출 증대에 도움이 된다.


① 컬러 상품으로 성공한 'United Colors of Benetton'

② 코카콜라의 브랜드 컬러 '빨강색'

③ 애플사의 아이맥(iMac)

④ 20가지 색상의 M&M 초콜릿


국내 컬러마케팅의 역사

1950 - 1960년대에 가전제품이 우리생활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컬러마케팅이 시작되었지만 1970년대까지 특별히 컬러마케팅을 한 예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컬러 TV가 많이 보급되면서 백색가전제품에 차별화를 두고 싶어하는 세대가 되면서 본격적인 컬러를 이용한 마케팅이 도입되었다. 상품이 개성화, 고급화, 다양화된 시기를 1980년대로 보면 될 것이다. 1990년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동차의 색상이 다양해진 것이다. 이때 여성 운전자의 증가도 컬러 다양화의 큰 요인이 될 것이다. 편리성만 추구하던 자동차에 멋과 개성이 들어갔다는 점이 컬러마케팅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볼 수 있다. 2000년대에 와서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컬러이다. 식음료, 화장품, 가구, 가전, 자동차 등 우리 주변의 모든 상품들이 컬러화되었다. 고정관념을 깨는 차별화 전략에 컬러가 쓰였으며 변화와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자들이 많아지면서 컬러가 중요하게 대두되었다.


상품 컬러 기획으로서 컬러 마케팅 전략

산업간에는 유기적인 컬러 트랜드의 영향관계가 있다.

컬러 유행전파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고 산업간 디자인 연결고리에 의해 유기적인 변화를 하고 있다. 1차 패션에서 2차 인터리어/자동차, 3차 전자제품으로 컬러 트랜드가 흘러가고 있다.


국내 컬러 마케팅 현황

- 컬러마케팅에 관한 전문가 집단 심층 면접 (In-depth Interview)


국내 산업의 컬러 정보 활용 수준을 보면 산업별 컬러 정보와 트랜드 컬러가 제시되지 않아 디자인 기획시 보조 자료로만 컬러 정보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제품 기획은 판매율보다 시장환경에 따라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패션 트랜드를 참고하여 인테리어 또는 자동차 컬러로 활용되고 다시 전자제품에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희망 컬러 정보는 산업내 제품 트랜드 정보, 트랜드 동향의 파악을 원하고 있고 디자인과 결합된 세분된 컬러 배색 정보, 트랜드 컬러의 적용 및 활용, 지역별/소비자군별 선호하는 컬러 정보, 마켓 동향의 파악/소비자 동향의 파악 등의 정보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런 정보는 굉장히 부족했다.

컬러 업무 운영 현황을 보면 조사 대상은 3개 산업 분야의 해당 실무 경력 3년 이상자가 72%로 자료의 타당도, 신뢰도 확보하였다. 컬러 관련 업무 운영형태가 비전문인력 활용이 59% 수준인데 이것은 컬러전문가가 아닌 비전문인력이 결정해서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미비한 수준의 컬러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전문 인력 활용 시에도 조직적인 팀 업무처리보다 담당자 개인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컬러의 중요도 인식 정도와 활용도를 보면 브랜드 활동 각 분야에서 컬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상품 판매 단계와 상품 기획 및 디자인 단계에서 컬러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실제로 컬러의 중요성 인식 정도에 비해 활용도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활용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컬러 정보의 부족하고 컬러 중요성 인식 부족, 컬러 기획 전문 인력의 부족 때문이다.

현재 가장 의존도가 높은 컬러 정보원은 트랜드 정보와 같은 유행예측 정보인데 비해 업계에서 보완을 요구하는 정보는 마켓 동향 정보이다. 상품기획시 활용하는 정보원은 정보수집 방법에 따라 유행예측정보가 가장 많았고 마켓동향정보, 문헌자료의 순이었다.

보완이 요구되는 컬러 자료는 특히, 소비자 선호 컬러와 같은 마켓 컬러 자료와 산업별 마켓 동향 자료의 보완이 요구되었다. 현재 시장조사를 통해 자체 해결을 하지만 주요 수출 지역의 소비자 선호 컬러에 대한 조사나 산업별 마켓 동향 자료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해외 수출상품 기획시 영향요인을 보면 아직까지 해외 수출 기획은 수동적인 공급의 수준에 있다. 해외 수출상품 기획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수출국 소비자들의 선호 컬러 및 현지마켓 동향인 것으로 나타나 지역 마켓 특성 분석이 수출 기획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업체조사를 통해 검증되었다.

컬러 마케팅 활성화를 위한 전문가 의견을 보면 전문가들은 세분화된 컬러 정보 요구하고 있다. 국내 전문가집단이 요구하는 컬러 정보 요구수준은 산업분야별로 전문화되고 구체적으로 실무에 적용 가능한 실체적인 정보, 구체적인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컬러 마케팅을 위한 조사사업의 사례 : 해외 주요 수출지역의 선호컬러 분석


산업별 해외 마켓 현황

정보통신과 생활가전 분야도 타산업 분야에 비해 컬러에 민감한 제품군으로 범주화되었다. 최근 가장 컬러 트랜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품군은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의 컬러에 따라 소비자 반응이 확연하게 차이가나 판매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색가전이라 불리던 가전용품, 냉장고는 인테리어의 한 분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제품컬러 선택에서 가구나 바닥재, 마감재의 영향을 받아 마켓에서 보여지는 컬러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보통신은 주요 수출 품목으로 등장하여 글로벌 마켓을 리드하는 trend setter로 컬러 트랜드에 민감하고 변화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생활가전의 경우 컬러 트랜드에 민감한 산업분야로 최근 트랜드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인테리어의 경우 소비자 라이프스타일과 연령, 경제력에 따라 요구사항이 다양하고 산업 내 선두업체가 트랜드를 리드하고 있다.


수출 지역 산업별 컬러 동향

정보통신 분야는 마켓 전개 컬러의 특징은 글로벌 브랜드의 영향으로 전개 컬러에 지역 특성의 차이가 크지 않다. Silver와 Gold 컬러가 메인 컬러로 사용되고 있고 배색 컬러로 사용되는 악센트 컬러에 트랜드 컬러를 적용하고 있다. 컬러 분포도를 보면 다양한 메탈릭 컬러를 선호도가 무척 높다.

생활가전 분야는 인테리어 color와 color coordination이 용이한 color군으로 전개되고 있고 Neutral color는 metal 느낌으로 전개하는 것이 좋다. 인테리어 컬러와 Cross Coordi Color가 될 수 있는 컬러가 좋다.

인테리어의 경우 독자적 산업 color가 존재한다. 다양한 tone의 Wood 컬러 군이 강세를 보이고 있고 디지털 트랜드의 영향으로 플라스틱 소재와 메탈 소재가 트랜드 컬러에 영향을 주고 있다. 컬러 분포를 보면 타 산업 분야에 비해 Color range 넓고 Green, Purple 계열이 타 산업컬러에 비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다양한 Wood color와 Color coordination이 잘되는 따뜻한 Red부터 Orange, Yellow Green, Green color가 전개되고 있다.


해외 소비자들의 제품 선택 기준

제품 구매시 우선 고려사항은 가격(67.5%), 품질(64.5%), 디자인(50.8%), 기능성(45.9%)의 순이었다. 디자인 구성요소 중 중요시 여기는 요인은 모양(45.4%), 컬러(34.1%), 유행(11.2%)의 순이었다.

정보통신 부분은 디지털 트렌드의 영향으로 펄컬러와 차가운 느낌의 PB가 강세지만 선호컬러 내에 다양한 컬러전개가 보이지는 않는다. 소비자들이 인지하는 컬러는 제품의 메인컬러이고, 트렌드 컬러가 반영되는 배색컬러에 대한 지각력은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활가전 부분은 트랜드의 영향으로 메탈느낌의 실버 컬러에 대한 소비자 선호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아직까지 생활가전은 white 컬러가 강세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특징적인 것은 생활가전이 인테리어 부분에 흡수되어감에 따라 가구색과 어울릴 수 있는 Y~YR컬러군도 선호 컬러에 나타나고 있다.

인테리어 부분은 사용 소재에 따라 활용될 수 있는 컬러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선호 컬러가 집중되어 나타나지 않았지만, 대체적으로 yellow 계열의 컬러가 다양한 tone으로 보여 졌으며, 새로운 소재의 도입으로 밝은 컬러에 대한 선호 경향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해외 소비자 브랜드 선호

소비자들이 제품 구매 시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것은 브랜드 이미지와 디자인 때문이다. 정보통신분야는 소수의 글로벌 브랜드가 전 지역의 마켓을 주도하고 있고 생활가전 제품군별 선호 브랜드의 조사 결과 대형가전과 소형가전의 market leader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테리어부분은 아직까지 브랜드화되지 못해 그 영향력이 작고 각 지역 브랜드에 의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정보통신의 경우 휴대폰은 디자인력이, 노트북은 브랜드 이미지가 브랜드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생활가전의 경우 구매시 대형 가전인 냉장고보다 소형 가전인 전자렌지가 제품의 디자인이나 컬러를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생활가전 분야에서는 이미 마켓 리더브랜드가 존재 하고 소비자들이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어 브랜드 선택에서 브랜드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인테리어 부분은 브랜드 파워보다 디자인력이 중요하다. 디자인 및 컬러, 브랜드 이미지, 가격 순으로 중요도가 달랐다. 소비자들이 브랜드 선택 시에도 브랜드 이미지보다 디자인 및 컬러를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 라이프스타일

라이프스타일별 소비자 군집화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5요인(독창성 지향, 유행지향, 기능 중시, 실용 중시, 타인 무관심)을 가지고 5가지 요인의 영향력 정도에 따라 소비자집단을 creative group, trendy group, functional group으로 각각 명명하였다.

creative group은 밝은 은색 펄과 PB계열에 대한 선호가 높았고 Dark한 PB와 Black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 트랜드 컬러인 YR, GY, Y계열에 대한 선호도 높았다.

trendy group은 밝은 은색 펄과 PB계열을 선호했으며 좀더 무난한 트랜드 컬러인 B와 PB에 대한 선호가 높았다. YR, GY, Y계열에 대한 선호도도 조금 나타나고 있다.

functional group은 독자적으로 선호된 컬러는 없으며, 은색 펄보다는 무난한 White에 대한 높은 선호를 보이고 있다.


해외 컬러 마케팅 성공 사례 연구

해외 컬러 마케팅 성공 사례 - Philips

필립스사는 소비자의 86%가 필립스를 인지하고 있고 세계 3대 가전브랜드로 매년 6천만 명 이상의 소비자에게 판매하고 있다.

필립스의 지자인 및 컬러의 트랜드 및 전략은 문화인류학자, 사회학자, 문화 및 소비자 연구원 등 다양한 분야의 출신의 트랜드 분석팀을 통해 이루어진다. 필립스는 전 세계적으로 거대한 연구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문화의 흐름을 10개의 분야(예를 들어 식품, 예술, 영화, 건축, 음악, 광고 등)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mood-boards로부터 특정 제품군을 위한 컬러팔레트를 구성한다. 필립스는 정량( 定量) 및 정성( 定性)적 연구, 실험실연구 및 여러 영역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200 명 이상의 전문가 인터뷰를 포함하는 실증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필립스 오디오 제품

다양한 색상의 Audio Boombox는 역사상 가장 빨리 성장한 가전제품중의 하나이다. 최신유행의 느낌을 주도록 밝은 색과 짙은 색으로 구성한 boombox와 메탈릭 컬러의 휴대용 CD플레이어, 텅스텐색상과 잘 조화되면서 악센트를 주는 컬러를 사용한 eXpanium Players with MP3-CD Line이 있다. 필립스는 전자제품시장에 있어 '컬러디자인리더'이다. 필립스의 핵심목표는 필립스 사업 분야에 경쟁력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최선의 컬러와 디자인 리더십을 제공하는 것이며 브랜드아이덴터티(BI) 디자인을 지키는 것이다.


해외 컬러 마케팅 성공 사례 - Martha Stewart

Martha Stewart Living Omnimedia, Inc. (NYSE: MSO)는 실용적인 가정용품을 공급하는 브랜드이다. 출판, TV, 상품 및 인터넷/직거래 네 개의 사업영역에서 소비자들에게 삶의 질을 높이는 실용적인 아이디어, 제품, 기타 재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Martha Stewart의 성공원인

컬러로 알려진 마사스튜어트는 디자인프로세스의 중심에 컬러를 위치하여 중간색컬러 팔레트의 사용으로 편안함과 안락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마사스튜어트는 K마트에서 판매하지만 그것을 가져다 집에 꾸밀 때 부가가치가 떨어져 보이지 않는 상품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일본 시장에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해외 컬러 마케팅 성공 사례 - 아지노모토

아지노모토는 세계적인 아미노산 기술을 바탕으로 의약품, 아미노산, 특수화학물의 개발과 제조에도 진출한 Global 기업으로 약 20여 개국에서 마케팅 및 제조활동을 하고 있다. 아지노모토 제품컬러의 선택은 첫째, 컬러는 강력히 식욕을 돋우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컬러는 건강 지향적이고 신뢰할 수 있고 소비자의 욕구를 편안하게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일관된 컬러 팔레트를 사용하고 있다. 식욕을 돋우는 빨강을 기본색으로 하고 제품 컬러로 빨강, 노랑, 오렌지, 초록, 파랑 등 5가지 컬러를 사용하고 있다. 브랜드 로고와 패키지, 광고에서 ‘Red’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아지노모토의 돈시리즈

2000년에 미국에서 새로운 포장을 선보였다. 아지노모토의 빨간 로고가 좌측상단에 있고, 편안함과 신뢰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파스텔컬러를 처음 실험적으로 사용하였다. 제품 패키지의 변화된 컬러는 매출을 꾸준히 올려주고 있다. 패키지 컬러를 바꾼 후로 2001년엔 매출이 20% 상승하였고 다음 해에도 꾸준히 증가하였다.

아지노모토의 혼다시

혼다시의 빨간색은 아지노모토의 제품과 다른 브랜드 제품을 구별할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이다. 패키지의 빨간색은 소비자들에게 즉각적으로 아지노모토의 브랜드 연상 작용을 일으킨다. 2~3년 주기로 포장컬러에 변화를 주어도 매출의 변화가 없는 것은 30년간 지속된 컬러아이텐터티 때문일 것이다.


컬러마케팅의 효과

브랜드 경쟁력 강화 방안

기능적 품질에서 감성적 디자인경쟁으로 바뀌는 글로벌 마켓 상황에서 ‘브랜드 경쟁력 강화방안’의 일환으로 ‘컬러’의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컬러는 경제성 있는 고부가가치 디자인 요소이다.

컬러마케팅 활성화에 따른 파급효과가 크며 국내 산업의 수출 기반을 마련하고 제품의 매출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 컬러마케팅은 브랜드 및 기업의 이미지 제고에 기여한다.

by 100명 2008. 4. 23. 13:07

광동제약 ‘비타500’ 마케팅 성공사례

발상의 전환, 틈새시장을 찾아라
광동제약 ‘비타500’ 마케팅 성공사례

비타민 음료시장 70% 점유 ‘비타500’ 성공스토리
지난 4월 40년 동안 국내 드링크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온 ‘박카스’가 ‘비타500’에 밀려 처음으로 월 매출 1위에서 밀려난 사건이 있었다. 제약 및 음료업계를 비롯한 마케팅 업계에서는 이 일대 사건(?)의 주인공 ‘비타500’의 성공비결을 알기 위해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최근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삼성전자에서 ‘비타500’의 성공스토리를 사내방송을 통해 방영해 화제를 일으켰다.


광동제약이 지난 2001년 출시한 ‘비타500’은 올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 1년 동안의 매출 규모를 넘어서는 등 웰빙과 비타민 열풍에 힘입어 고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제품이다.
‘비타500’은 출시첫해인 2001년 53억 2002년 98억, 2003년 28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2004년에는 ‘비타500’ 출시 4년 만에 월 5,000만 병 판매라는 기록적인 판매기록과 함께 854억원 매출을 올림으로써 발매 4년 연속 100%이상 성장을 이루고 있다.


올해 목표 매출은 1,500억원을 기대하고 있다. 그야말로 경이적인 신장세다. ‘비타500’은 100여개 제약사, 500여개 품목이 난립하고 있는 비타민 시장에서 약 70%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며 확고한 넘버원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비타500’의 성공 비결에 대해 전문가들은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발상의 전환을 꼽을 수 있다.
광동제약은 비타민은 과립이나 정제로 먹는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마시는 비타민’인 점을 내세워 시장에 내놓자 소비자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둘째, 새로운 소비자의 욕구를 창출했다. 웰빙 붐이 일면서 비타민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가운데 카페인이 없고 건강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비타민 음료를 등장시키는 전략이 주효했다.

셋째, 틈새시장 개척을 들 수 있다. 국내 음료시장은 음료업계의 탄산 및 과실음료와 제약업계의 드링크로 크게 나눠져 있는데 광동제약은 그 틈새를 노렸다. 비타민을 음료처럼 마시고 흡수도 빠르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최근 경영트렌드인 복합 제품인 셈이다. 시장 선점효과도 톡톡히 봤다.


넷째, 마케팅의 차별화다. 마케팅의 기본인 유통망을 새롭게 구축한 것이 큰 효과를 나타냈다. 기존 유통망인 약국을 탈피해 슈퍼마켓, 편의점, 할인점 등으로 유통망을 다변화시킨 것. 마케팅의 핵심인 광고커뮤니케이션 전략도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비’를 모델로 사용하는 등 보수적인 색채를 벗어 던지고 혁신적인 마케팅 전략을 사용했다. 또한 제약사들이 등한시하던 온라인 마케팅에 주력, 10대와 20대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에 ‘비타500’을 밀착시킴으로 소비계층의 저변을 확대시켰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융합한 컨버전스 마케팅 전략
여러 성공요인 중에서도 특히, 마케터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비타500’의 온/오프라인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일 것이다. ‘비타500’은 2005년을 매출 1위의 원년으로 삼고 2005년 상반기부터 마케팅 리소스를 집중시켜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걸쳐 광고, 프로모션 등 소비자 커뮤니케이션에 총력을 기울였다. 광고마케팅에서는 기본컨셉을 카페인이 없는 ‘마시는 비타민C음료’로 정하고 젊은층에게 어필하는 인기가수 ‘비’를 모델로 적극 활용하여 젊은 감성세대를 겨냥 ‘비타500’ 드링크의 대중적 확산 및 경쟁사와의 철저한 이미지 차별화를 내세워 소비자들에게 소구했다.


이와 더불어 ‘비타500’ 병뚜껑 속에 숨겨진 총 2,500만개의 경품을 확인 할 수 있는 ‘따자마자 대축제’프로모션을 진행하여 대대적인 세일즈 붐업을 일으켰다. 동시에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브랜드 마케팅에 강점을 보이고 있는 온라인광고회사 포트폴리오와 손잡고, 오프라인과 연계하여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마케팅 전략을 펼쳤다. 네이버와 제휴를 통해 ‘비타500’ TV-CM 자막에 네이버 검색창을 노출해주고, 네이버에 ‘비타500’의 배너광고를 싣는 ‘바터 광고’를 진행하여 최소 금액으로 최대의 커뮤니케이션 볼륨을 확보 하였고, 월 1,900만 이상의 사용자가 이용하는 네이버 ‘지식in’에 묻고 답하기 이벤트를 진행하여 소비자들의 입으로 유사비타민제품과 ‘비타500’의 차별점 및 잘못된 오해를 불식시키는 긍정적인 답변을 유도하였다.

또한 오프라인의 따자마자 프로모션을 온라인에서 홍보하는 동시에 온라인만을 위한 브랜드 이미지 강화 이벤트인 ‘비타500’타임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비타500’과 함께하는 시간은 활력을 찾는 시간’ 이라는 컨셉으로, 도미노 피자, ipop등 카테고리 1,2위의 브랜드들과 제휴를 통해 도미노 피자, 음악이용권, 벨소리, ‘비타500’ 등 총 30,000개가 넘는 경품을 제공하여 이슈가 되었다. ‘비타500’타임 이벤트는 홈페이지와 동시에 젊은 세대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인 네이트 온 메신저에 탭 형태로 붙박이 진행을 함으로써 이벤트 참가의 접근성을 최대한 확장시켜 많은 참가자를 유도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벤트 종료 후 회원이 이벤트 전에 비해 8배 이상 급증했으며, 일반적인 이벤트와 달리 이벤트 종료 후에도 일평균 방문자가 이벤트 전의 6배에 달해 충성고객 확보에 성공적인 캠페인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걸쳐 마케팅 리소스를 집중 시킨 ‘비타500’의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2005년 4월 박카스를 제치고 매출 1위를 달성시킨 원동력이 되었으며 현재까지 매출 1위의 신화는 지속되고 있다.

by 100명 2008. 4. 23. 11:49

새롭게 변해가는 창업의 정의와 3가지 성공사례

1.창업의 정의

중소기업 창업지원법에 의거한 창업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이러하다.
“창업”이란 새로이 중소기업을 설립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창업의 범위는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즉, 창업자라 함은 중소기업을 창업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은 창업이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느라 온라인. 오프라인 상으로 많은 관심거리가 되고 있으며, 최근 가장 화재거리가 되고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창업, 부업, 투잡스, 프랜차이즈등 그 범위와 한계는 위에서 언급되어졌듯이 순수 창업의 정의와는 많이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새로이 생겨나는 업종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복합점의 등장으로 그 모양과 형태가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최근에 생겨나는 복합적인 요소의 온.오프라인 상의 상점들이 아무런 계획성이나 사업의 구상이 없이 오픈을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를 우리는 가까운 주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나 유행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해 간다 하더라도 창업의 기본이 되는 획기적인 아이템과 사업의 목표, 적절한 시기, 자본, 인원, 설비, 원자재, 경영능력의 확보 등을 지킬때 성공이라는 그림자는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예비창업자들의 공통적인 고민 가운데 하나가 창업 아이템 선택이다. 아이템 선택이 창업의 성패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아이템을 선택해야 할까. 흔히 신문이나 방송매체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광고를 접하게 되는 ‘유망창업’ 가운데 진짜 유망한 아이템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다.
경기상황과 시대흐름에 따라 소비자의 욕구가 달라지고 시장 트렌드와 소비 패턴도 변하기 때문이다.

창업을 아이템의 성향과 운영방식의 차이에 따라 기본적인 범주를 나눈다면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오프라인상 으로 운영되어지는 상점
둘째는 온라인상으로 운영되어지는 상점
셋째는 오프라인상의 상점안에 또 다른 성격의 오프라인 상점을 입점하는 형태의 상점
넷째는 온.오프라인을 동시에 접목하여 운영하는 복합적인 신 개념의 상점
이렇게 위에서 언급한 크게 4가지로 나뉜 상점 형태의 기준은 창업 아이템에 따라 매출의 발생과 이용 고객의 변화에 기준을 두고 언급되어진 것이다.
투자비용에 비해 매출이나 이를 이용하는 고객의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저조할 수밖에 없으며, 실패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위의 4가지 형태 중 성공의 길로 가며, 또 경영자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사업의 시작과 시시각각 변해가는 고객의 유치에도 많은 이로움이 작용을 하는 형태는 바로 오프라인 상의 상점을 운영하며, 또 다른 오프라인 상점이나 혹은 이를 이용한 새롭고 복합적인 아이템 즉,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추세는 대한민국 인터넷 사용자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온라인상의 이용자를 통한 비즈니스를 생각할 줄 아는 예지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한 것이 바로 네 번째로 언급되어진 오프라인상의 상점을 운영하면서 온라인상의 상점을 입점하여 최소의 투자비용을 통하여 최대의 효과를 보는 것이다.

창업의 형태 중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복합적인 아이템의 접목을 통한 고객유치 및 홍보로 인한 매출의 극대화와 상점의 이미지 상승에 있다.
하루가 지나면 새로운 아이템이 나올 정도로 우리는 정보의 바다 아니 “아이템의 바다”에 살아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아이템이 아닌 복합적인 아이템의 접목으로 성공한 사례는 우리의 주위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으며, 최근 사람들은 획일화된 것 보다는 좀더 변화 있고 또 획기적인 곳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예로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 바로 이벤트성의 행사를 통해 사람들의 주위를 끄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경우는 온라인. 오프라인 상의 공통적인 경향이며 흐름이다.


2.커피를 이용한 비즈니스(성공사례)

(1)LG칼텍스정유의 주유소와 커피
주유고객들에게 에스프레소 커피를 서비스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름 판매가 폭발했다. 흔히 기름 냄새와 커피향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어버린 사건이었다. 결국 LG칼텍스는 2001년 인천공항 가는 쪽 기념관 주유소에 이탈리아 브랜드인 ‘하우스브란트’ 커피점을 냈으며, 기존의 마트에 상점이 하나 더 들어가는 형태였다.
일반적으로 기름 냄새가 나는 주유소에서 커피향을 공존시키는 문화를 LG칼텍스 정유에서 만들어 낸 셈이다.
조사결과 커피 한잔을 공짜로 주면 기름 판매 13리터의 증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13리터라면 리터당 1300원 기준으로 1만6900원이다. 인건비와 재료비를 합해 1000원 미만의 커피 한잔을 제공하고 매출을 1만5000원 이상씩 늘릴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분명 아닐 것이다.

(2)건대역 입구 꽃과 커피
건대역 입구의 혜원 플라워 갤러리는 97년에 문을 연 전형적인 꽃집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중 투자비용이나 여러 가지 여건 등을 고려하여 상점안에 상점을 여는 방식을 생각하게 되어 착안해 낸 것이 바로 커피숍이었다.
다시 말하면, 꽃집에서 커피를 판매하는 것이다.
꽃과 커피를 접목시킨 곳이 이곳이 전국최초이며, 또 성공적인 복합점 으로도 유명하다.
이를 위해 꽃집을 운영하던 운영자는 건대 학생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그 결과 꽃집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커피숍이라는 답변이 많이 나와 이를 계기로 아이템을 얻었다고 한다.
사계절동안 꽃향기 속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로움과 낭만을 찾는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안에 들어가보면 주위에 꽃들과 테이블과 의자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이었는데 예상 밖의 히트를 한 것이었다.
이결과 매출은 30%이상 증가 하였으며, 건대와 그 주변의 젊은이들의 동아리 혹은 모임의 장소로도 많이 사용되어지고 있으며, 이용고객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이다.

우선은 꽃집의 남는 공간을 활용하여 커피숍을 차린 것이기 때문에 투자비용이 훨씬 적게 들어가는 것이며,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저렴한 비용으로 커피를 마시며 사방에 꽃에 둘러 싸여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을 줄 수 있어 여러 가지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커피숍에 온 손님들중에 꽃을 사가는 손님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어 이중으로 매출의 증가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입소문으로도 널리 퍼지게 되어 구경오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KBS에 재테크 성공사레로 소개되어지기도 했다.

(3)여의도 김밥집과 커피
여의나루 깁밥은 그 근처로 출퇴근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2000년 김밥집과 다른 여러 가지 패스트푸드 음식점을 운영하던 윤 사장은 한 가지 아이템(품목)으로만은 승부를 걸 수 없다는 생각을 하여 많은 요소를 검토해본 결과 일반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커피숍을 김밥집 안에 오픈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예상을 깨고 많은 손님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또 다른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물론 입지적인 조건과 그 때 당시의 상황에 맞아 떨어진 부분도 있겠지만 이러한 복합적인 상점의 경우 특히나 기존에 오프라인 방식의 상점을 운영하던 사람에게 그리 크게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초밥과 김밥으로 시작했었는데 아이엠에프(IMF)때에는 도시락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0년에 테이크 아웃 커피점이 될 것 같아 승부를 걸었던 것이 사람들의 호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매출이 40~50%까지 올랐다고 한다. 하루에 300~400잔까지 꾸준히 팔리는 대박이었으니 충분히 가능 하였던 것이다.

by 100명 2008. 4. 23. 11:18

CJ39쇼핑은 철저한 품질관리, 가격경쟁력, 고객감동서비스, 고급정보를 기반으로 한 24시간 열려있는 종합 On-line 백화점으로서 TV홈쇼핑, 카탈로그, 인터넷 쇼핑몰, 쥬얼리 샵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고객과의 접점을 확대하여 나가고 있으며, 향후 전문화된 온라인 마케팅 기업으로서 국내 홈쇼핑 1, 세계 2대 홈쇼핑으로의 도약을 눈앞에 두고 있다.

무점포 Direct Marketing
재고비용, 고정비를 절감, 소비자 가격만족도 향상

On - line Media Marketing
방송, internet, DM등 다양한 미디어 활용 On-line Marketing

정보 Marketing
소비자와의 쌍방향 정보교환 DB를 활용한 Target Marketing

[ TV 홈쇼핑 ]

국내 최초의 TV홈쇼핑社인 CJ39쇼핑은 개국원년인 '95년부터 24시간 종일방송을 실시,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 않는 신개념 쇼핑문화를 선도해 왔습니다.
CJ39
쇼핑은 TV를 통하여 상품정보를 전달하고 이를 시청한 고객들은 전국무료 주문전화(080-900-3939)로 전화하여 상품을 주문, 4~5일 이내로 고객이 원하는 곳에서 제품을 받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업계 최초로 '30일 취소반품 서비스'를 실시, 제품을 받아 본 고객이 제품에 대해 불만족할 경우 취소, 반품은 물론 환불서비스까지 실시하여 고객만족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 카탈로그 ]

CJ39 쇼핑 회원들에게 발송되는 상품카탈로그는 지난 '96 9월부터 발행
하기 시작하여 현재 매월 200 만부씩 발행되고 있습니다.

가전, 주방, 식품, 의류, 보석, 레져용품 등 다양한 상품군의 최고 히트상품과 우수제품만을 엄선하여 풍부한 상품정보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CJ39쇼핑 카탈로그는 총 120 여 페이지에 이르는 책속의 작은 백화점으로, 상품정보 외에도 알뜰 생활정보와 각종 할인 쿠폰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인터넷 쇼핑몰 ]

새로운 감각의 Internet 쇼핑몰, CJmall의 쇼핑몰이 2001 8월 신사옥 이전과 함께 새롭게 출발하였습니다. TV홈쇼핑을 24시간 생중계하는 Live Shop을 비롯, 고객들에게 정확한 상품정보를 보여드리는 VOD Shop, 상품코드로 바로주문하기코너, CJ39쇼핑의 진수만을 모은 Only One! CJ Shop은 고객님의 쇼핑 만족을 책임질 것입니다.

[ 쥬얼리 shop]

최신유행의 미스쥬얼리부터 클래식컬한 진보석, 소장가치가 높은 나석, 화려한 색상의 유색(有色)보석 등 여성들이 좋아하는 다양한 보석류가 구비 되어 있으며, 매장 내에는 국제공인보석감정사가 항시 상주하여 방문한 고객들에게 풍부한 보석 지식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회사연혁

1994~96 창립 -'실리콘밸리에서나 불 수 있는 도전정신의 모델'

1994. 12 법인 설립
1995. 08 국내 최초 TV홈쇼핑 방송 시작
1995. 10 24시간 종일방송 개시
1996. 10 <96 매경유통대상> 특별상 수상

1997 성장 -'고객과 품질에 대한 열정'

1997. 10 국내 최대규모 Call Center Open 기념식
1997. 11 업계최초 39쇼핑비자카드 발행
1997. 11 업계최초 최저가격보장제 실시
1998. 12 고객모니터링모임'깐깐한 고객의모임'<깐고모>창단
1999. 01 업계최초 옴부즈맨프로그램'손숙의소비자시대' 신설
1999. 03 업계최초 6대 국가공인시험검사기관과 업무협약 체결
1999. 06 <한국일보 99년 상반기 히트상품>선정 (유통, 서비스부문)
1999. 06 <대한매일 99년 상반기 소비자만족 히트상품> 선정
1999. 07 홈쇼핑업계 최초 'ISO 9002'인증 획득
1999. 09 문화일보 주최<독자가 뽑은 브랜드파워 대상>선정
1999. 09 홈쇼핑업계 최대, 최첨단의 신정보시스템 개통
1999. 11 홈쇼핑업계 최초 코스닥 등록, 거래개시
<
내외경제신문 99년 히트상품> 선정(통신판매서비스 부문)

2000 2의 창업 - 전문화된 'No.1 On-Line Marketing Company'

2000. 01 대만 '동삼홈쇼핑'개국과 관련한 기술지원
동영상 인터넷쇼핑몰 i39(www.i39.com)재오픈
2000. 03 39쇼핑, 제일제당에 인수
2000. 04 삼성카드와 업무제휴,(39쇼핑 삼성카드)발급 개시
2000. 05 2회 한경마케팅대회 '시장개척상' 수상
2000. 06 39쇼핑에서 CJ39Shopping으로 사명 변경
2000. 06 6개 일간지 히트상품 선정
(
한국일보, 경향신문, 문화일보, 세계일보, 대한매일, 국민일보)
2000. 06 TV홈쇼핑 업계최초 공중파 방송광고 개시
2000. 08 개국 5주년 기념식
2000. 08 CJ39쇼핑 - 신세계 전략적 업무제휴 체결
2000. 09 초현대식 최첨단 군포물류센터 Open
2000. 12 대만 '동삼홈쇼핑' 전략적 제휴 체결

2001 고객만족 100%, 더욱 더 신뢰받는 기업으로 거듭납니다.

2001. 04 방배동 ntv사옥 인수 계약 체결
2001. 05 국내최초 유가증권식 디지털 상품권 발행
2001. 07 방배동 신사옥 이전
2001. 08 CJMall 인터넷쇼핑몰 OPEN
2001. 09 한국능률협회 2001 '한국산업의 고객만족도(KCSI)'
통신판매서비스부문 1위 기업 선정

Vision 21

>>> Vision 21 경 영 방 침

"고객감동경영" 실천

고객불만 Zero化 도전 (미출하, 배송일, 사은품)
차별화된 고객 접점 서비스 제공(주문,배송)
고객별 맞춤서비스 개발(CRM)

"핵심 경영역량" 강화

상품 Pool 확대를 통한 성장기반 확보
맞춤형 택배서비스 개발
재미있는, 유익한, 사고싶은 방송 구현
그룹역량 활용한 Area-Marketing 강화

"Win Win 경영" 실천

우수 협력업체 발굴/육성
더불어 성장하는 Partnership 구축
깨끗하고 투명한 거래관행 정착

"독자적 기업문화" 창조

끊임없이 탐구하는 조직분위기 조성
On-Line
業 에 맞는 창의적, 도전적 인재 육성
자율/책임 경영의 사업부제 조기정착

시 장 분 석

1. TV 홈쇼핑의 출발

장기적인 국가 기간정보 통신망의 구축과 다 채널 방송에 의한 문화수준 향상 정책의 일환으로 1995 년도에 국내에 도입된 케이블TV 산업은 현재 총 44개의 케이블TV 채널사용 사업자(PP), 77개의 종합 유선방송 사업자(SO), 다수의 전송 망 사업자(NO)와중계유선 사업자(RO)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CJ쇼핑과 ()LG홈쇼핑이 홈쇼핑 부문의 프로그램 공급자로 문화 관광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사업권을 취득하였으며 , 1995 8 1 ()CJ39 쇼핑이 최초로 전파를 송출함으로써 TV 라는 대중적 영상매체를 이용한 TV 홈쇼핑 사업이 국내 최초로 시작되었다 .

2. TV 홈쇼핑의 확장

또한 TV 홈쇼핑 업체들은 축적된 양질의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기초로 카탈로그를 이용한 통신판매 사업을 병행하고 있으며 , 타 케이블채널을 통해 쇼핑 프로그램을 송출하여 매출을 발생시키는 인포머셜 사업 , 그리고 확보된 상품 pool 과 인터넷을 결합시킨 인터넷 쇼핑 몰 사업 등의 부가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 더불어 특정 시청자 군을 대상으로 한 Target 마케팅을 통해 일반기업에게 효과적인 광고매체로서의 기능을 제공하는 등 on-line 정보 마케팅 회사로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

3. TV 홈쇼핑의 규모

TV 홈쇼핑시장은 1995 8 월에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된 이후 1997 년도에 약 1,600 억원 , 1998 년도에는 4,500 억원 , 1999 년도에는 약 1 5 천억원 규모로 그 시장이 급격히 성장하였다 . TV 라는 매체를 이용한 소매업의 성격을 지닌 TV 홈쇼핑은 국민소득 및 민간 소비지출과 다소 관계를 갖고 있다 . , 2000 년 상반기의 GDP 성장률과 민간소비 증가율이 각각 11.1% 10.1% 였던 전체적인 경기에 상응하여 TV 홈쇼핑 매출도 증가하는 추세였다 . 그러나 , 전망이 다소 어두운 올 하반기 경기와 관련하여 주 고객 층이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중/상류층에 분포되어 있는 까닭에 그리 크게 경기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 특히 , 90 년대 중반 이후 홈쇼핑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와 이용도가 제고되면서 , TV 홈쇼핑 산업의 높은 성장세가 이런 상황과 더불어 더욱 가속될 전망이다 .

>>>경 쟁 사 분 석

처음 케이블 TV 홈쇼핑 방송으로 시작하여 200만의 시청 가구를 바탕으로 카탈로그를 통한토신 판매 시장을 열었다. 또한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쇼핑 몰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기도 하였다. 99 년 이후로는 천리안, 다음 등 인터넷 전문 기업들과 전략적인 제휴를 체결하면서 전자상거래 부문을 대폭 강화해 다양한 컨텐츠와 인프라를 보유한 국내의 거대 멀티미디어 쇼핑 전문 기업으로 변신하였다. 이와 함께 차별화 된 상품 기획과 철저한 품질관리로 한 차원 놓은 고객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애프터 서비스, 선 환불 서비스 최저가격 보상제 , 30 일 이내 환불 교환 , 리콜 서비스 , 사장실 고객 불만 hot line 을 운영하여 100% 고객 만족을 지향한다 . 배송서비스 체제 로 지정일, 휴일 배송, 택배 요원 현장 서비스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 수주 서비스 체제로는 지정 상담제 , ARS 자동 주문 , CTI 를 통한 고객 대기시간 단축 , 텔레 마케터 실명제 주문 서비스 , 방송 프로그램 자동 안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

방송시스템 에 있어서는 2 개의 최첨단 생방송 스튜디오를 통해 19 시간 생방송을 포함 , 하루 24 시간 방송하고 있다 . VOD 전용 스튜디오를 갖추어 경매 , 생활 정보 등 각종 커뮤니티와 5개의 테마몰을 비롯한 다양한 컨텐츠를 제공하여 VOD 전문 PD 가 제공하는 상세한 상품정보와 최신 동영상 기술로 3 차원 영상을 통해 즐거움을 제공한다 . 120 만 부의 카탈로그는 케이블 TV, 인터넷과 유기적인 결합으로 200 만 고객 데이터 베이스를 확보하여 고객이 원하는 최적의 상품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

LG 홈쇼핑은 종합채널이지만 , 상대적으로 고급 품목에 주력하고 있다 . 식품, 레저 스포츠 용품 , 가전용품, 문화용품, 의류, 패션잡화, 서비스 등이 9 개의 상품 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

홈쇼핑 업계의 선두 주자 격인 CJ39 쇼핑과 LG 홈쇼핑은 케이블 TV, 인터넷 , 카탈로그를 통한 수주와 물류의 효율적인 인프라를 구축함과 동시에 유통 전문가를 육성하여 고객과 함께 발전하는 멀티미디어 쇼핑 기업으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

[ 시장 점유율 (단위 : 백만원) ]

구분

1998년매출액
(M/S)

1999년매출액
(M/S)

2000년 상반기매출액
(M/S)

CJ39 쇼핑

192,356 (46.4%)

213,071 (40.3%)

176,672 (41.4%)

LG 홈쇼핑

221,927 (53.6%)

314,992 (59.7%)

250,275 (58.6%)

414,263 (100.0%)

528,063 (100.0%)

426,947 (100.0%)

TOP

>>> (4Ps)

1. Product

39 홈쇼핑은 종합채널이지만 상대적으로 농축산물에 비중을 두는 편이며 , 제품 수성은 생활용품 ( 침실 , 주방용품 ), 가전제품 , 보석과 귀금속 류 , 농축산물 , 레저 용품 등이다 .

2. Place

지난해부터 의욕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택배 맞춤 서비스를 서울 전지역은 물론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여 고객들에게 더욱 만족할만한 택배 서비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방침이다 . 이에 , CJ39 쇼핑은 제일제당의 택배 회사인 'CJ GLS' 와 함께 서울 전지역을 50 개 권역으로 나누어 특화된 맞춤 택배 서비스를 실시하고자 막바지 준비 중에 있으며 , 적어도 금년 말까지는 전국으로 확대실시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또한 2000 9 18 , 90 억원 규모의 예산을 들여 경기도 군포지역에 총 건평 3,400 여 평에 대지 2,400 여 평의 지하 2 , 지상 4 층의 초 현대식 최첨단 물류센터를 완공하여 본격적인 맞춤 택배 서비스를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

3. Price

백화점 , 유명상가는 물론 전문상가에 비해서도 싸다 . 대형할인점이나 남대문 , 동대문 시장 등 전문상가에 비해서도 결코 비싸지 않다 . 제품에 따라 다르지만 가전제품 등을 제외하면 일반상가에서보다 20-40% 정도 싸게 물건을 살 수 있다 . 백화점 등에서 50 만원 하는 양복은 제품에 따라 다르지만 30 만원이면 충분히 살 수 있다 . 가전제품도 용산 전자상가 등 전문상가보다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살 수 있다 .

또한 CJ mall 에서는 고객의 편의를 위하여 다양한 결제방법을 도입하고 있다 . 각종 카드는 물론 온라인 입금결제 , 적립금 , 예치금 , 상품권 등을 단독으로 혹은 병행하여 결제할 수 있고 카드의 경우에는 기존에 이용하셨던 카드 또는 신규 카드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여 결제하실 수 있습니다 .

4. Promotion

이들의 판매전략은 다음과 같다 .

( ) 최고의 고객서비스
- 30
일 무하자 반품제도 시행
-
최저 가격 보상제 실시
-
케이블 TV 가족카드 발행
-
빠른 배송시스템 구축 ( 택배 맞춤 서비스개시 )

( ) 상품의 차별화 , 고급화
- PB
상품의 개발
-
독점판매상품의 확대
-
해외 인기상품의 개발
-
품질검사강화

( ) 신뢰성 있고 재미있는 방송제작
-
프로그램 실명제 실시
-
명쾌한 상품정보 제공
-
옴부즈맨 프로그램 방송
-
다양한 이벤트 제공

TOP

>>>소 비 자 분 석

19 시간의 생방송을 포함하여 하루 24 시간 종일방송을 하고 있으며 금년 9 월까지 총 2,016 천명의 고객이 당사를 통하여 상품을 구입한 바 있고 연령별로는 30 40 대의 고객이 약 66% 를 상회하고 있으며 , 50 대와 20 대가 각각 10%, 19.2% 을 점유하고 있다 . 그러나 , 그 추세는 20 대 고객 층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 .

지역적으로 나누어 보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에서 총구매의 > 60% 이상이 이루어지고 있어 매우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부산 , 대구 , 인천 등의 지방 대도시가 그 뒤를 따르고 있는데 그 지역별 매출추이는 다음 < 3>,< 4> 과 같다 .

또한 개인별 연평균 상품구매회수는 1999년 기준으로 약 3.1 회인데 당사는 CJ39 쇼핑 카드의 발급 , 적립금의 지급 등을 통하여 충성 고객 층의 반복 구매율을 높이는 한편 사은품 , 경품지급 등 각종 프로모션을 통하여 신규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CJ39 쇼핑은 고객만족의 극대화를 위해 업계 최초로 옴부즈맨 프로그램 방송 , 모니터 요원들로 구성된 깐깐한 고객의 모임 , 프로그램실명제 등의 새로운 차원 >의 고객서비스를 제공하였습니다 . 특히 우량의 고객 DB 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Data Base 마케팅서비스를 강화하였으며 ,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릴레이션쉽 (Relationship) 마케팅 및 원투원 (One to One)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국내 최고의 홈쇼핑업체로 성장하였다.

>>> (Strength)

1. 고객 서비스 만족 극대화

CJ39쇼핑은 의욕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택배 맞춤 서비스를 서울 전지역은 물론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여 고객들에게 더욱 만족할만한 택배 서비스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 2000 9월에 90억원 규모의 예산을 들여 경기도 군포지역에 지하2, 지상 4층의 초 현대식 최첨단 물류센터를 완공하여 본격적인 맞춤 택배 서비스를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1999 3월 업계 최초로 한국전기전자시험 연구원, 한국섬유기술연구소, 한국화학시험연구원 등 국가공인 시험 검사기관 7곳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여 품질관리에 획기적인 새 지평을 열고 차별화된 고품격 서비스를 제공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QC의 강화를 위해 전문인력을 보강하고 QC팀의 철저한 품질검사를 통한 사전승인 없이는 방송판매 자체가 불가능 하도록 업무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CJ39쇼핑은 TV를 통해 상품정보를 전달하고 이를 시청한 고객들은 전국 무료 주문전화로 전화하여 상품을 주문 할 수 있으며, 4-5일 이내로 고객이 원하는 곳에서 제품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업계 최초로 “30일 취소반품 서비스를 실시하여 고객이 불만족 할 경우 취소, 반품은 물론 환불서비스까지 실시하고 있다.

2. 홈쇼핑업계 최대, 최첨단의 신 정보시스템 개발

CJ39쇼핑은 콜 센터, 영업/상품기획, 물류, 고객관리, 방송, 마케팅, QC, 인사, 회계 등 사내 전부문 운영 시스템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친 개발작업을 통해 신 정보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신 정보시스템 도입으로 3-TIER 분산컴퓨팅, CTI(Computer Telephony Integration), CMS(Call Management System) 등 최첨단 시스템을 이용한 쌍방향, 대화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고객관리 측면에서 좀더 효율적이고 신속한 서비스를 제공하기위해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기법을 도입, 활용할 예정이다.

3. 무점포 신 유통업체의 선두주자

CJ39쇼핑은 지난 1995년이래 매년 200%이상의 신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케이블 TV업계 중 유일하게 5년 연속 흑자경영을 유지하고 있어 향후의 성장성이 기대된다. 더욱이 제일제당으로 인수 후 20여년간 소비자들에게 쌓아온 탄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제일제당의 이미지로 신규 고객들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4. 경쟁적 차별성

동영상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여 이미 방송된 화면을 재시청 할 수 있는 기능으로 네티즌들이 필요로 하는 5,000여 개 이상의 상품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만, 중국 등에 해외기술지원으로 해외시장으로의 진출도 본격 추진하고 있다. 또한 환경 가꾸기 캠페인 등을 통해 주변환경 개선은 물론 기업의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TOP

>>> (Weakness)

1. 폭 넓은 고객 층의 부족

홈쇼핑 이용자의 60%이상이 여성이고, 이중 주 고객 층은 40대 주부이다. 이런 좁은 고객상황에서 볼 때 좀더 많은 이익과 높은 기업의 신장을 위해서는 폭 넓은 고객 층을 확보해야 한다.

2. 홈쇼핑 방송 표시내용에 대한 소비자 신뢰도의 문제

CJ39쇼핑은 저렴한 판매가격을 강조하기 위해 방송화면에 권장소비자가와 판매가를 동시에 표시함은 물론 권장 소비자가격 기준 할인율을 화면에 표시하고 있다. 이에 38.4%의 소비자는 방송화면에 표시되는 권장 소비자 가격에 대해 불신 하였고, 31.3%의 소비자는 공장도가격에 대해 다소 과장되었거나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
케이블TV홈쇼핑 가격/판매>

>>> (Opportunity)

1. 판매 시장의 성장 가능성

편리성의 재인식, 미디어의 발달, 운송수단의 발달, 쇼핑시간의 부족, 고령화 시대의 도래, 직장 여성의 증가 및 신용카드 사용의 증대 등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는 무 점포 판매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더욱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이것이 향후 정보기술의 발달로 가상현실 등을 이용한 쇼핑의 현실감과 편리가 더해질 경우 소비자들이 무 점포 시장을 더욱 찾게 될 가능성은 높다. 대한상공회의소 자료에 의하면 1999년에 약 1 5,000억원 정도인 국내 무 점포 판매시장 규모는 연평균 25%내외의 성장을 지속해 2005년에 약 8조원, 2010년에는 약 17조원 이상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홈쇼핑 업체는 저가판매 , 시간 및 공간적 편의성과 편안함 등 유 점포업체가 보유하지 못한 특유의 경쟁우위를 바탕으로 소비자들의 지지도를 점차 확대해가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90년대 중반 할인점이 소매업계에 일으킨 지각변동을 재현시킬 가능성이 매우 클 것으로 기대된다.

2. /상류층분포의 소비자 분포의 이점

경기 침체로 인한 영향이 있으나 다행스러운 것은 주 고객 층이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중/상류층에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소비자 계층을 타깃으로 하여 다소 어두운 경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 대 중반이후 홈쇼핑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와 이용도가 제고되면서, TV홈쇼핑 산업의 높은 성장세를 기반으로 하여 주고객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 (Threat)

1. 경제적 불확실성

한국 및 아시아 지역은 요즈음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어 왔으며 특히 금융기관의 구조조정등에 따른 신용제한과 이러한 아시아 지역의 전반적인 경제침체에 국내 기업활동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영향을 미쳐오고 있다. 지속되는 고금리와 원화가치의 약세 등에 CJ39쇼핑도 영향을 받아오고 있으며 그 영향은 지속될 것이다.

2. 경쟁기업의 강세

가장 큰 경쟁사인 LG홈쇼핑 역시 CJ39쇼핑과 함께 홈쇼핑 업계 중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LG홈쇼핑은 기존 LG사의 튼튼한 자본구조와 신뢰도 있는 기업 이미지를 이용한 마케팅을 하여 소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는 실정이며 년 평균 20%의 성장률을 보이는 등의 강세로 위협을 주고 있다.

3. 관련법령, 정부의 규제

TV홈쇼핑업체는 통합방송법 및 동 법 시행령, 시행세칙에 의해 경영상의 규제를 받고 상품의 판매에 관해서는 공정거래법과 소비자보호법 등에 의해 규제를 받는 동시에 방송 프로그램내용에 대해서는 방송위원회로부터 심의를 받는다.

1. 고객 신뢰 서비스

- 제품리콜제(30 일 무하자 반품제도 시행)
-
최저 가격 보상제 실시
-
케이블 TV 가족카드 발행(마일리지제도)

2. 신속한 택배서비스

- 제일제당 택배사 CJ-GLS를 이용한 배달서비스
-
창고운영 및 자가배송으로배달시간 단축
- E-cline(
전산연계시스템)을 통한 스피드 배송 서비스 운영
-
화물추적시스템 정보 제공

3. 상품의 차별화

- 브랜드 중심의 고품질 상품구성
-
생활용품 중심의 폭넓은 상품군 구성(13개의 주요 카테고리)
-
테마에 따른 다양한 상품 기획
: "cj39
추천상품" / "cj39 Best 20" / "Today's Hot" / "Weekly's Chance" ...
-
독점판매 상품의 확대
-
해외 인기상품의 개발
-
품질 검사 강화

4. 고객 중심의 방송 제작 (흥미 / 정확도)

- 프로그램 실명제 실시
-
명쾌한 상품정보 제공
-
옴부즈맨 프로그램 방송
-
다양한 이벤트 제공

5. 광고 전략 - CF / 카탈로그 제작

- 특정소비계층(20-30대 여성)을 공략한 광고모델 섭외
ex)
김남주: 당찬 캐리어우먼을 상징
-
인터넷 쇼핑몰, 카탈로그를 통합. online marketing advertisement구축

6. 텔레마케팅 서비스

- 콜센터 교육팀 구축
-
업무처리, 서비스 수준을 강화한 텔레마케터 교육을 실시
:
질의 응답에 빠른 대응 및 치료기능 강화

서비스 개선

① 택배 과정의 신속화

고객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까지 맞추는 시스템적 접근에 의한 배송 서비스를 구축한다. , 고객이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요구하면 그에 맞춰서 협력하고 있는 택배 업체와 신속하고 정확한 상호 정보 교환으로 상품을 안전하게 소비자가 볼 수 있도록 배송한다.

②제품과 자사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도 확보

제품을 보증할 수 있는 자체의 인증 제도(증명서, 보증서, 인증 마크....)를 마련하여, 소비자로부터 신뢰도를 높이도록 한다.

③소비자 교육 실시 및 확대

제품을 단순히 판매하는 것 뿐만 아니라, 제품 설명과 활용법 등을 제공하여, 소비자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예를 들어 모 화장품 회사에서 무료로 개인에게 맞는 화장법을 직접 지도해주는 마케팅 전략으로 그 회사의 화장품을 간접 광고하는 효과를 누리고 있다.

④부가 서비스 확대

좀 더 많은 소비자를 확보하고, 기존의 고객들의 많은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마일리지 제도를 확대하며, 홍보에 노력한다. 또한 경품 행사를 확대하고 대폭적인 홍보로도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

⑤재미있는 방송

인지도 있고, 유능한 쇼핑 호스트를 이용한 제품 광고로 고객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켜 상품 판매를 증대시킨다.
이러한 유능한 쇼핑 호스트를 발굴하기 위한 자체의 교육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도 재미있는 방송을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2. 제품 개선

① 여성 소비자 공략

홈쇼핑의 주요 고객이 여성인 만큼 여성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제품들의 판매를 늘린다. 특히, 미래의 주부인 20대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마케팅을 실시한다.

② 협력 업체와 전략적 제휴

소비자의 편리한 구매를 돕기 위해 인지도 있는 협력 업체와 제휴를 맺는다. 경쟁 기업이 자체적으로 카드회사를 계열사로 가지고 있는 반면에, CJ 39쇼핑은 기반이 빈약한 편이다. 소비자들이 믿을 수 있는 카드회사와 제휴를 맺어 고객들이 안심하고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돕는다.

③ 투명한 가격 책정

소비자에게 원가와 판매가를 모두 공개함으로써 신뢰도를 얻도록 한다. 제품이 생성되는 유통과정에서의 원가를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합리적인 가격책정을 하게 되고, 소비자들 또한 만족할 수 있게 된다.

by 100명 2008. 4. 23. 09:48

게임업계의 위기, 세계는 이렇게 타파했다

기사입력 2008-04-16 11:17 |최종수정2008-04-16 11:23


[동아닷컴]

세계의 게임업계는 위기감에 쌓여 있다. 지나치게 높아진 개발비가 다양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트리플A급' 게임을 제작하려면 개발자가 200명 가까이 모여 오랜 기간 동안(3년~5년) 게임을 제작해야 한다. 수십억 원으로 불어난 게임 개발비는 개발 시의 리스크를 급증시키고 있으며, 이를 감당할 만한 회사는 실제로 많지 않다. 비대해진 조직 관리 문제도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올해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진행됐던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Game Developers Conference, 이하 GDC)에서도 이러한 '게임업계의 위기'가 주 논쟁의 타겟이 됐을 정도다. 게임동아에서는 랍스터 소프트의 김웅남 대표와 함께 세계의 게임 기업들이 어떻게 이를 해결해나가려 하고 있는지 알아봤다.

<게임업계의 주도적인 문제들>

'재미이론'이라는 책으로 게임업계의 유명인이 된 라프 코스터가 GDC2008에서 언급했듯이 게임 개발비는 너무 높아졌다. 온라인 게임의 경우 서버 구조의 복잡성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으며, 수레바퀴 돌 듯이 끝없는 재발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버를 재활용하기 힘들다는 점, 그리고 개발 수준을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맞추어 달라는 퍼블리셔의 요구 등 더욱 시장을 어렵게 하는 요소도 많다.

패키지 게임도 자금회수가 어렵긴 마찬가지다. PC 패키지 게임으로 나온 '크라이시스'가 GDC2008에서 올해의 기술상을 수상하고 '현실과 같은 그래픽'으로 세계로부터 각광받았지만 실제 판매고가 8만 장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도 이러한 게임 업계의 어려운 현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새 돌파구1 : 새 시장 개척 / 캐주얼 게이머를 주 타겟으로>


게임업계 위기 타파를 위해 게임업계가 실행한 것은 이용 층의 확대다. 즉, '캐주얼 게이머의 부상'이다.

어느 순간부터 게임업계 관계자들은 '마니아'들이 주 고객이 아니라 캐주얼 게이머들을 주 고객으로 목표를 바꾸고 있다. '가족게임' '게임의 세계로 오세요' 등이 게임 판매 수식어로 자주 붙는 걸 알 수 있다.

캐주얼 게이머들에게의 판매율을 높이기 위해 선행되는 것은 게임을 즐기기 위해 '배울 필요가 없는 수준'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재스처 미믹'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몇 백 년 동안 인간이 해온 자연스러운 동작을 게임으로 표현해내는 것을 일컫는다. 실제로 '기타히어로'싱스타' 등 '기존에 놀던 방식으로 그대로 즐기는' 방식의 게임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는 하드웨어 판매 시장까지도 견인하고 있다. 닌텐도의 NDS나 Wii가 큰 성공을 거두는 것도 이러한 부분을 집요하게 연구해 내놓은 성과라 할 수 있다.

<새 돌파구2 : 사용자 제작 게임의 지원>

개발사들은 '사용자 제작 게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자신들이 직접 거액을 들여 게임을 개발하지 않고, 준 프로에 가까운 개발자들에게 '손쉬운 게임 제작 도구'를 제공하고 제작된 게임의 공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공유한 후에 사용자간 평점 시스템을 이용해 인기 게임에게는 새로운 수익을 제공한다.

이렇게 개개인의 게이머들이 복잡한 절차없이 게임을 제작하고, 이를 공유한 후 옥석을 가리는 방식은 이미 MS와 소니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MS는 엑스박스 라이브 커뮤니티를 통해 '게임을 올린 후 개발자가 돈을 벌 수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소니도 디버그 용 PS3 가격을 1천2백 달러까지 낮추면서 '누구나 PSN(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 라이센스를 취득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심즈 카니발' '메타 플레이스' 등 해외에서는 활성화된 사용자 제작 커뮤니티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새 돌파구3 : 소셜 네트워킹 연계>

위기 파타를 위해 세계의 게임업계는 이미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와 많은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란 '누구나 자유롭게 콘텐츠를 올릴 수 있는' 사이트. 대표적으로 '유튜브'나 '마이 스페이스'를 예로 들 수 있다. 게임은 일종의 '버추얼 월드'라는 점에서 소셜 네트워킹 전반에 걸쳐 양 방향성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가이아 온라인(Gaia Online)'은 '세컨드 라이프' 등 다른 가상 세계처럼 소셜 네트워킹을 판타지 게임의 판타지 측면과 결합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크게 효과를 봤고 북미 지역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렇게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들과의 연계가 많아지자 게임사들은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들에게 호환한 가능하도록 동일한 API를 쓰자고 제안하고 있다. 구글을 주축으로 한 이러한 움직임에 '마이 스페이스' 등 유력 사이트 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는 상태다.

<새 돌파구4 : 새로운 배포 방식>

새로운 배포 방식도 개발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세계의 곳곳에서 '디지털 다운로드 서비스'가 점차 활발해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카운터 스트라이크 스팀'도 전체 가입자 수가 150만 명을 돌파했으며, 해외 유명 게임 사이트(www.popcap.com)에서 'peggle'이란 게임은 1천만 건 이상의 다운로드 판매를 이루어냈다.

'쪼개 팔기'도 유행이다.

기존의 패키지 게임은 전체를 한 번에 비싼 가격을 주고 사는 방식이었지만 단일 패키지라도 60달러 이상되는 것을 쉽게 구입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최근에는 에피소드 별로 쪼개서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웹 브라우저 내장 게임도 생겨나고 있다. 이는 '설치 과정을 아예 없애는' 것이 게임 배포에 가장 좋다는 점 때문. 유럽 회사들 중에는 웹 브라우저 자체에서 별도의 클라이언트 없이 MMORPG를 즐길 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또 '아이폰'이나 PMP 등 다른 플랫폼까지 이런 추세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새 돌파구5 : 독립 게임 개발사 지원>

대형 게임 개발사들은 점차적으로 독립 게임 개발사를 지원에 나서고 있다. 저예산, 소규모 인력으로 구성된 이들이 '기존과 다른 시장', '다른 장르'에서 해법을 찾아 상당한 히트작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PSN에 올라와 히트작 반열에 오른 '에브리바디 슈터'는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GDC2008 인디게임 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크레용 피직스 디럭스'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게임이다.


이런 독립 게임 개발사의 중요성은 세계적 추세다. GDC2008에서 '슈퍼 마리오 갤럭시', '콜오브 듀티4'도 아닌 '포탈' 이 대상을 받은 것도 세계의 게임업계들이 독립 게임 개발사들을 '게임산업 위기의 돌파구'로 보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라 볼 수 있다.
by 100명 2008. 4. 16. 21:54

스타벅스, 네티즌들에게 길을 묻다

“길을 알려주세요.”

위기에 빠진 스타벅스가 고객의 응원으로 되살아 날 수 있을까.

AP는 스타벅스의 고객 의견 청취 웹사이트 마이 스타벅스 아이디어닷컴(MyStarbucksIdea.com)에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고 9일 보도했다.

이 웹사이트는 지난달 19일 스타벅스가 주주총회에서 ‘고객과의 소통’을 강조하면서 발표한 것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올리고,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점수를 주거나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결과는 대성공. 사이트가 열린 지 한 시간 만에 300건의 제안이 등록되더니 그 숫자는 며칠 만에 수천 건으로 늘어났다.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투표를 한 건수도 10만 건을 넘었다. 애초 상당수가 “고리타분한 건의함을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것”이라며 비관적 전망을 낸 것과 정반대의 결과다.

스타벅스는 고객 아이디어 중 괜찮은 것들을 골라 적극 도입하고 있다. 이미 ‘무료 무선인터넷 접속’이나 ‘고객 카드 제도 개선’ 등의 의견은 현장에 반영됐다. 닐슨 리서치의 피트 블랙쇼 수석 부사장은 “대부분 기업은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고객 피드백을 비용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스타벅스는 이를 새로운 기회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4. 9. 21:52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 된다

[한겨레]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이사회 의장(46· 사진)이 카이스트(KAIST)에서 정년이 보장되는 석좌교수로 일하게 된다.

안철수연구소는 “미국 유학 중인 안 의장이 오는 5월 초 귀국해 2학기부터 카이스트 전산 분야의 석좌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했다”고 6일 전했다. 카이스트 쪽은 의학박사인 안 의장이 정통 과학자는 아니지만 기업경영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열정이 학생들을 교육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 그의 영입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의장은 카이스트 석좌교수로 활동을 하더라도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직은 그대로 유지하며, 회사에 ‘최고학습책임자’(CLO:Chief Learning Officer)라는 새로운 직책도 만들어 비상근으로 일하게 된다.

안 의장은 서울대 의대 박사 과정을 밟던 1988년에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95년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해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자리에 올라서게 한 벤처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컴퓨터 보안솔루션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와 함께, 늘 ‘도덕 경영’과 ‘사회 책임 경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최고경영자(CEO)로 꼽힌다. 안 의장은 2005년 안철수연구소 최고경영자에서 물러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영대학원(와튼스쿨)에 입학해 엠비에이(MBA) 과정을 밟고 있다.

by 100명 2008. 4. 7. 20:31

'추격자', 한국영화의 '새 대안'인 이유 세가지

마이데일리|기사입력 2008-02-28 11:27 |최종수정2008-02-28 11:56


[마이데일리 = 장서윤 기자] 지난 14일 개봉 이후 12일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무서운 속도로 흥행기록을 세우고 있는 영화 '추격자(감독 나홍진, 제작 영화사비단길)'가 불황의 위기에 빠진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스타마케팅 없이 작품성으로 승부하고 있다는 점과 탁월한 연출력, 규모에 비해 저렴한 제작비 면에서 특히 그렇다.

대규모 일반시사 당시부터 화제를 모은 '추격자'는 우선 스타마케팅이나 물량공세 없이 오직 작품 자체로 관객을 끌어들였다는 데서 최근 한국영화의 중요한 대안점을 시사하고 있다.

캐스팅 단계부터 '이름값'에 연연하기보다는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주는 두 배우 김윤석·하정우를 캐스팅했다는 점, 개봉 전 공식 인터뷰 일정 외에 TV 예능프로그램 출연 등을 통해 작품홍보에 나서진 않은 점 등은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작품자체'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장편 데뷔작으로 믿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은 나홍진 감독은 직접 집필한 시나리오를 높은 수준으로 완성해 냈다.

특히 극중 주 줄거리인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과 전직경찰 엄중호(김윤석)의 대결구도에 숨어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통찰력은 탁월하다는 평가다.

시장에 대한 오물투척사건에 온 경찰력이 동원되는 장면을 통해 보여주는 비효율적인 관료제의 단면, 법망에서 벗어나 있는 여성 접대부에 대한 묘사를 통해 법에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려낸 것이다.

연출 면에서도 스피디한 감각을 잃지 않아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최근 관객들의 입맛에 제대로 적중했다. 긴박한 액션 신에 감탄한 남성관객은 객석에서 허리를 곧추세웠고, 영화의 잔혹함에 눈을 흘기면서도 여성관객도 끝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여기에는 액션 장면 한 씬에 3일을 투자하는 등 정확하고 섬세한 연출력이 숨어있다.

합리적인 제작비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추격자'는 극중 경찰력을 동원한 액션 장면과 총 85회차에 달하는 촬영 횟수 등 규모에 비해 저렴한 제작비인 순제작비 36억원 규모로 마케팅비 등 제반비용을 합치더라도 중급규모 작품 총제작비인 50~60억원에 비해 낮다.

또, 프랑스, 그리스 등 4개국에 선판매된 것 등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알찬 성과'를 거뒀다.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에 이어 흥행질주를 시작한 '추격자'가 비단 흥행 뿐 아니라 제작·마케팅 과정에 있어 '위기의 한국영화'에 새로운 전형을 제시할 수 있을지 주목되는 시점이다.
by 100명 2008. 2. 28. 12:59
PDA 실패에서 얻는 PMP의 성공 포인트




많은 기업들이 리스크 관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리스크 관리를 조직 내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리스크 관리의 목적을 명확히 하고 리스크에 대한 구성원의 거부감을 없애면서 적시에 리스크를 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최근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영화나 영상교육 자료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바야흐로 단순히 음악만을 듣는 시대에서 멀티미디어를 눈과 귀로 즐기는 시대로 이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모바일 환경에서 영화나 영상교육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재생할 수 있는 기기 중 대표적인 제품으로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가 주목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PMP는 2.5인치 이상의 디스플레이와 HDD 등 대용량 저장매체를 갖춘 멀티미디어 재생 기기로 정의된다. PMP의 경우 오디오 파일만을 재생할 수 있는 MP3 플레이어가 발전한 형태로 보는 견해가 있는 한편, DVD 플레이어, PC 등 거치형 멀티미디어 기기가 휴대용으로 진화한 형태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PMP는 시장에 등장한 지 3년 만에, 향후 독자적으로 대규모 시장을 형성할 가능성이 높은 차세대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기기로 부상하고 있다. 최초의 PMP는 2003년 프랑스의 AV 전문 회사인 ARCHOS가 선보였던 ‘AV100’이었다. ‘AV100’의 출시 이후 다양한 PMP 제품들이 소개되면서 PMP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시장 조사기관인 IDC에 따르면 2004년 19만 대에 불과했던 전세계 PMP 시장이 2007년 100만 대, 2009년에는 560만 대로 연평균 성장률 95%라는 놀라운 수치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2010년에는 1,000만 대 이상의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정도 규모는 8억 대 정도의 휴대폰 시장에 비해서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고 5,000만 대 정도의 MP3 플레이어 시장에 비해서도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모바일 동영상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급증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명확한 타켓 시장 설정을 바탕으로 소비자 니즈를 제대로 충족시킨 제품을 개발할 경우 2010년 이후 MP3 플레이어를 능가하는 규모로 급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시장 도입기를 지나고 있는 PMP

PMP


PMP가 과거에 비해 보다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PMP 시장을 둘러싼 최근의 환경 변화 덕분이다.

첫째, 수요 측면에서 디지털콘텐츠에 익숙한 20~30대 소비자가 소비의 주력 계층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대다수가 초고속인터넷 또는 3세대 통신망 등 광대역 네트워크 가입자로서 다양한 디지털콘텐츠를 편리하게 즐기고 있다. 또한 다른 어느 연령대보다 개인화 니즈가 높아 자신에게 필요한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나 원하게 되면서 PMP와 같은 모바일 컨버전스 기기에 대한 니즈도 동시에 늘어나고 있다.


둘째, 인프라 측면에서 멀티미디어 콘텐츠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원하는 콘텐츠를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직접 동영상을 인코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각종 P2P 사이트나 콘텐츠 제공 사이트를 통해 영화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다양한 포맷으로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또한 UCC(User Created Content)의 멀티미디어화가 진전되면서 소비자가 이용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더욱 풍부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품 자체 측면에서 콘텐츠 전송 및 저장 매체의 발전으로 사용상의 편의성이 크게 증대된 점이다.

먼저 FTTH, HFC 등 광대역 통신망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콘텐츠 전송속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소형 HDD나 낸드플래시 메모리 등 소형 저장매체 용량의 획기적 증대 또한 사용 편의성 증대에 기여하고 있다. 최근 16Gb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 또한 성공하면서 최대 32GB의 소형 메모리카드를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이는 편당 700MB 영화를 50여 편 가까이 저장할 수 있는 용량이다.

이와 같이 PMP 활성화에 유리한 환경 변화를 발판으로 현재 PMP 시장은 시장 도입기를 지나 본격적인 시장 성장기로 진입하기 위한 기로에 서 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의 국내 무선인터넷 사용자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서, 2002년 거의 이용하지 않았던 동영상 콘텐츠 이용률이 2005년 약 11%로 증가했다. 이렇듯 동영상 재생에 대한 소비자의 니즈는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최첨단 멀티미디어 기능을 최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PMP의 인기 또한 계속 높아질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PMP는 차세대 모바일 멀티미디어 기기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퍼스널 미디어의 증대와 함께 DMB나 휴대인터넷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모바일 환경에서 수많은 통방 융합 콘텐츠/서비스가 등장할 것이다. PMP는 이러한 통방 융합 콘텐츠/서비스를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폼팩터를 지니고 있다. 기존의 휴대폰보다는 사이즈가 큰 디스플레이와 대용량 저장매체를 지니고 있어 DMB나 휴대인터넷을 통해 전송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쉽게 재생, 저장, 편집하는 것이 가능하다.



캐즘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 PMP

대다수의 디지털 기기는 초기시장과 주류시장 사이에 나타나는 수요의 하락이나 정체 현상을 의미하는 캐즘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캐즘 현상을 극복한 디지털 기기는 주류 시장으로 진입하면서 성장의 길로 접어들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기기는 소비자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DV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 들은 전자에 속한 제품들이며 전자책, PDA 등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제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PDA의 경우 포스트 PC의 총아로 각광받으면서 2001년 1,300만 대 시장까지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PDA 자체의 성장 잠재력이 크게 약화되는 가운데 휴대폰과의 결합을 통해 PDA폰, 스마트폰 형태로 변모하면서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고, 단순 PDA 시장은 연간 800만 대 시장까지 감소하였다.

PMP 또한 캐즘을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벌써부터 비싼 가격에 비해 소비자가 느끼는 효용 수준이 크게 떨어진다는 의견도 일부 제기되고 있다. 또한 PMP와 경쟁관계에 있는 신제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PMP를 위협하고 있다. 휴대폰에 PMP 기능이 결합된 PMP폰, PSP 등과 같은 휴대용 게임기기 및 새로운 모바일 PC 플랫폼인 UMPC(Ultra Mobile PC) 등이 그 예이다. 기존의 MP3 플레이어도 초보적인 동영상 재생 기능을 탑재하면서 PMP 영역을 넘보고 있다. 이처럼 PMP 시장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아 대부분의 기업들은 소극적인 제품 출시 등으로 시장의 흐름을 관망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PMP가 캐즘의 늪에 빠져들지 않고 주류시장으로 도약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과거 PDA 사례를 바탕으로 PMP의 성공포인트를 도출해 보고자 한다. 물론 과거 PDA가 정보 처리 및 관리 위주의 모바일 컴퓨팅 기능에 초점을 맞춘 반면, 현재 PMP는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처리하는 모바일 멀티미디어 기능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타켓 시장 설정, 콘텐츠 활용도, 폼팩터 등의 측면에서 유사성이 있다. 즉, PMP와 PDA는 모두 휴대형 기기로서 휴대폰과 노트북PC 사이의 영역에서 포지셔닝하고 있다. 또한 제품이 가진 자체적인 편익보다는 보완재로서의 콘텐츠를 활용해야 제품의 효용가치가 높아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더구나 프로세서, 디스플레이 등 시스템 구성이나 디자인 측면에서 유사한 폼팩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PDA가 캐즘을 극복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하여 그 대응방안을 사전에 마련한다면 PMP가 캐즘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PDA의 실패 원인 3가지

PDA


첫째, PDA는 대표적인 포스트 PC로서 PC의 보완재로 포지셔닝했지만 환경의 변화로 인해 PDA의 경쟁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1993년 애플이 최초의 PDA 제품인 뉴턴(Newton)을 개발/출시한 이후 PDA 시장에서 대중화에 그나마 성공한 제품은 팜 파일럿이었다. PIMS(개인정보관리, Personal Information Management System) 기능을 저렴하게 구현한 팜 파일럿은 당시 큰 인기를 누리면서 연간 최대 600만 대까지 판매되었으나, 곧 성장의 한계에 부닥치고 말았다.

IT 인프라의 발전과 함께 정보화의 영향으로 모바일 컴퓨팅에 대한 소비자 니즈 자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모바일 환경에서 정보 편집이나 가공보다는 정보 통신을 더욱 원하게 된다. 따라서 초기에 누렸던 모바일 컴퓨팅 기기로서 PDA의 경쟁력은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 최근의 PDA는 통신 또는 방송 기능이 결합된 PDA폰, DMB PDA 등으로 진화하면서 휴대폰의 보완재로 재포지셔닝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바일 컨버전스 기기는 PC보다는 휴대폰의 보완재로 포지셔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휴대폰의 경우 디스플레이, 배터리, 컴퓨팅 측면에서 한계가 있기 때문에 휴대폰에서 컴퓨팅이나 멀티미디어 처리 등 대표적인 컨버전스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 PDA의 활용도를 제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콘텐츠가 원활히 공급되지 못하였다.

PDA의 경우 소비자들이 원하는 응용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는 개방형 플랫폼을 지향하면서 PIMS 기능 이외에 MP3나 동영상 재생도 가능했다. 따라서 PDA 소비자들은 PDA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응용 소프트웨어나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손쉽게 획득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대다수 PDA 기업들이 이러한 콘텐츠 획득과 관련된 문제 해결을 소홀히 한 나머지, 소비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기능에 최적의 응용 소프트웨어를 찾기 위해 여러 웹 사이트를 방문해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수시로 업그레이드되는 응용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보 입수 또한 어려웠다.

반면 콘텐츠 서비스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성공한 PDA도 있다. RIM사는 북미지역을 중심으로 이메일 서비스인 블랙베리(BlackBerry) 서비스와 해당 PDA를 동시에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인 리먼브라더스에 따르면 블랙베리 사용자가 2006년 말에는 9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PDA는 사용상의 편의성 제공 측면에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PDA에서 PIMS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스타일러스 펜이나 터치 스크린을 통해 소비자가 직접 입력해야 하는 불편함이 뒤따랐다. 또한 소비자가 직접 응용 소프트웨어를 찾아서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운 사용법으로 인해 대중시장 소비자에게 어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PDA는 정보 관리라는 측면에서는 고객 문제를 해결해 주었지만 정보 입력이라는 다른 성격의 문제를 발생시킨 셈이다.



소비자 성과 중심으로 제품 혁신이 이루어져야

PMP가 주류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앞서 살펴본 PDA의 사례를 감안할 때 공급자 중심의 마인드에서 벗어나 소비자 성과 중심으로 제품 및 관련 서비스가 갖추어져야 한다. PMP는 현재 DMB, 네비게이션 기능과의 결합에서 향후 휴대인터넷, HSDPA, 블루투스, 게임기기와의 결합을 통해 진화를 거듭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PMP가 독자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다음과 같다.


먼저, PMP는 PC의 보완재가 아닌 휴대폰의 보완재로 포지셔닝할 필요가 있다.

즉 PMP의 핵심적인 기능인 음악,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휴대폰에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성능으로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또한 모바일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전송 네트워크인 휴대인터넷 또는 DMB 등을 완벽하게 지원해야 한다. 반면 모바일 컴퓨팅을 강조한 PDA가 실패한 것을 감안하면 PC에 준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의 편집 또는 가공 기능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웹서핑, PIMS, 모바일 뱅킹 등과 같은 정보 콘텐츠 처리 기능은 단순 부가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모바일 시네마’라는 컨셉으로 PMP를 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시간 동영상 재생, 화질 개선, PVR 기능, 음향 처리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 중심으로 제품의 기능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PMP가 멀티미디어 기능 중심으로 개발된다면 MP3 플레이어와 경쟁하는 관계가 될 것이다. 따라서 PMP 개발/기획시 MP3 플레이어보다 우수한 수준의 기능, 휴대성, 디자인 등이 우선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주로 음성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멀티미디어 콘텐츠 획득이 합법적인 서비스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과거 수년간 MP3 플레이어 시장이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애플의 음원 콘텐츠 제공 서비스인 아이튠스(iTunes) 서비스가 큰 몫을 차지했다. 앞서 살펴 본 RIM사의 블랙베리와 애플의 아이튠스 사례를 감안하면 모바일 엔터테인먼트 기기에서 콘텐츠 서비스가 매우 중요함을 실감할 수 있다.

최근 법 개정과 더불어 멀티미디어 콘텐츠 유료화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므로 PMP 제조 기업과 콘텐츠 기업간 상호 협력이 과거 어느 때보다 용이한 시점이다. 이러한 파트너 네트워크를 통해 확보된 콘텐츠를 최근 새로운 콘텐츠 배포 기술로 각광받고 있는 RSS(Rich Site Summary) 서비스 등을 통해 확산시키는 것도 고려해볼 만 하다. 또한 최근 확대되고 있는 UCC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다. UCC가 거래될 수 있는 이마켓플레이스를 구축한다면 소비자간 공유를 통해 PMP에 활용될 수 있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콘텐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PMP 단일 제품이 아닌 완전 제품(Whole Product) 형태로 구비하여 사용상의 편의성이 완벽히 제고되어야 한다.

PMP 단일 제품으로는 다양하게 발생하는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기기 사용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즉각적이고 정확하게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한다. 멀티미디어 콘텐츠 인코팅 대행, 펌웨어의 즉각적인 업그레이드, 사용자 인터페이스 개선, PC에서의 콘텐츠 자동 다운로드, 다양한 액세서리, 판매 후 지원 서비스 등이 이러한 사용상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안으로 고려해볼 수 있다. 또한 보다 적극적인 소비자의 문제 발견과 해결 방안 도출을 위해 소비자 커뮤니티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PMP와 같은 초기 성장기 제품일수록 소비자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여 제품에 신속하게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 커뮤니티를 이용한 입소문 마케팅을 적극 펼친다면 시장 확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현재 PMP 시장은 한국 기업들의 선전이 돋보이고 있는 영역이다. 2006년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쇼에서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인 빌 게이츠가 기조연설시 국내 회사의 PMP 제품을 미래 모바일 기기를 주도할 제품으로 소개할 정도이다. 따라서 국내 기업들이 PMP 시장의 트렌드를 잘 포착하여 대응하기만 한다면 애플에게 빼앗긴 MP3 플레이어 종주국의 위상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by 100명 2008. 2. 28. 10:52

창의와 도전으로...
- CGV 성공 스토리


불가능을 가능으로.

“미친 짓이다” CJ엔터테인먼트가 96년 300억원 규모로 연 멀티플렉스 개념의 강변 CGV 1호점 기획안에 대한 업계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업계의 싸늘한 반응에는 몇 가지 명분있는 근거가 있었다. 첫째, TV가 없던 시절에는 영화만이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하지만 큰화면과 고화질로 무장한 디지털TV, 홈씨어터, 인터넷 등 대체산업의 등장으로 인해 극장의 영화산업은 상당부분 잠식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67년 1억 7천만명에 달했던 영화관객수는 97년 4천8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둘째는 비용측면이었다. 500석 규모의 상영 관에 영사기가 1개꼴로 비치될 때 보다 90~300석의 규모의 상영 관들로 이루어지는 멀티플렉스에는 그 두 배의 투자비용이 든다. 그렇다고 입장료를 더 올려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셋째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수용할 수 없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법규정이었다. 그 한 예로 300석 이하의 소극장은 반드시 상영 장 뒤 출입구에 남자, 여자화장실을 따로 배치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를 규정대로 따를 경우 강변 CGV의 경우는 22개의 화장실을 넣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영사기는 반드시 영사기사만이 다룰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엄청난 인건비를 떠 안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모든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CJ엔터테인먼트는 나름대로 확신이 있었다.

마케팅 서비스에서 그 해답을 찾다.

원래 박동호 사장(現 CJ엔터테인먼트 대표)은 제일제당의 육 가공 사업부에서 10년 이상 관련업무만 해왔던 인물이었다. 그가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제일제당 내부의 극장사업부를 맡게 된 배경에는 그의 기획력과 관리 능력에 대한 그룹차원의 강한 신뢰가 있었다. 국내 영화 극장산업의 한계를 직시한 박동호 사장은 열악한 환경을 바꿔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해외에서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95년 이후 일본, 미국, 유럽, 호주 등의 100여 개의 극장을 직접 둘러보며 현장 학습을 충실히 해나갔으며, 극장 사업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뿐만 아니라 기존의 극장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꿔 버릴 수 있는 방법을 동시에 찾기 위해 고군 분투하였다. 마침내 박동호 사장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그 해답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앞서 있던 미국의 극장산업은 과다설비로 인한 공급과잉으로 인해 TOP10의 멀티플렉스 극장 중 대부분이 도산의 위기를 맞고 있었으며, 이것이 곧 M&A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서비스와 마케팅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박동호사장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의 사업개념은 100만 명을 1번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20만 명을 5번 보게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극장산업이 마케팅과 서비스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해외 극장산업의 현황과 다양한 가능성을 살펴본 후 국내에 복귀한 박동호 사장은 우선 시설 측면에 있어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기존의 한국극장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단일 영화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 선택의 좁은 폭과 앞뒤거리 협소로 인한 시야 가림, 불편한 좌석, 출입혼잡, 그리고 좁고 비위생적인 화장실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설계 시 기존 문제점을 충분히 반영하여 유리 칸막이 형태의 매표소 타입에서 호텔 프론트 타입으로 변경하여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었으며, 최첨단 음향 및 영사실, 넓고 편안한 좌석설비, 스타디움 식 상영관, 화장실의 증가 및 주차시설 확충, 최신 인테리어, 입 퇴장 동선 분리 등을 고려해 넣었다.
서비스 측면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사이트 별 지역에 맞는 인테리어 테마를 주제로 그린시네마(목동 점), 아쿠아시네마(수원 점), 한국의 힘(상암 점), 판타스틱 시네마(구로 점), 여성을 위한 프리미엄 시네마(명동 점)을 차별화 하였다. 이와 아울러 기존의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서비스 제공되었다. 프리미엄 고객을 위한 CGV Gold Class, 장애 우를 위한 상영관, 화장실 시설을 마련하였으며, 부부 및 주부 고객을 위한 유아놀이방 서비스를 설치하였다. 또한 VIP라운지, 무료쇼핑백 보관 서비스, 편백 나무 향으로 공기를 정화하는 삼림욕 상영관, 여성 고객을 위한 파우더 룸을 설치하였다. 그 외에도 고급호텔 수준의 친절한 직원 응대가 될 수 있게 하였으며, 다양한 VIP시사회, 리콜시사회, 네트워킹, 인터넷 예매시스템을 풀가동해 서비스를 극대화시켜 나갔다.

마케팅 측면에서는 차별화된 이벤트와 프로모션을 적극 활용하였다. 일본문화개방, 주5일제 근무, 청년실업과 연관된 사회이슈 프로그램을 가동 중에 있으며, 배우 무대인사, 팬사인회를 통한 영화개봉 프로모션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또한 영화, 드라마 촬영장소로 고객과 함께하여 다양한 이색 즐거움을 제공하는 PPL(영화 속 상품광고. Products in Placement)를 전략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 한 예로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파리의 연인’에서 드라마 촬영장소인 CGV 상암의 경우 드라마 방영 후 젊은 연인 관객층이 늘어 났으며 이 드라마로 인해 130억 원의 광고효과를 거뒀다고 자체분석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성탄절, 바캉스, 청년의 날, 수능생의 날 등 시즌 별 다양한 할인 이벤트를 적극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국내 첫 멀티플렉스 극장의 효시였던 CGV강변 1호 점은 98년 04월 첫 고객을 맞게 되었다. 객석률이 20%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영화계 한 대부의 발언을 무색하게라도 하듯 객석률은 70% 수준까지 다 달았다. 그리고 04년 7월 현재 전국 21개의 사이트, 168개의 스크린을 보유한 업계 1위의 멀티플렉스 극장을 보유한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되었다.

CJ엔터테인먼트의 다양한 시설과 서비스는 한국의 영화 극장산업에 대한 인식 자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영화를 비롯한 예술 문화 산업은 공익 산업이라는 업계의 인식을 사업의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고정 투자가 많이 들어가는 저 부가 가치 사업에서 고객 재방문을 통해 회전율을 높임으로써 매출과 수익을 증대시킬수 있는 고 부가 가치 사업임을 보여주었다.

업계 최초로 TPM을 도입하다.

TPM(Total Productive Management)은 최고의 생산시스템 효율화를 추구하는 기업 체질 가꾸기를 목표로 삼아 생산시스템의 Lifecycle 전체를 대상으로 한 "재해제로, 불량제로, 고장제로" 등 모든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대상으로는 모든 부문에 걸쳐 최고 경영자에서 말단에 있는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전원 해당되며 중복 소집단활동에 의한 손실(Loss) 제로를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 제조업체의 효율을 증대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인데 업계 최초로 서비스 업종이라 볼 수 있는 영화 극장산업에서 이를 채택하여 2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조업체 이상의 결과를 얻어냈다. 이를 통해 CJ엔터테인먼트는 수동적인 비용절감과 관리효율에서 공격적인 기업가치 창출을 극대화하였고, LCC(Life Cycle Cost)극소화, LCS(Life Cycle Service)를 극대화 통한 경영효율을 통해 서비스 생산성을 향상시켜 나갔다.

도랑의 법칙, 물통의 법칙

도랑의 법칙이란 ‘흐르는 물에 방해물이 있으면 잘 흐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물통의 법칙은 ‘한 조직의 서비스 수준은 가장 낮은 항목에 의해 평가된다’는 의미로 직원들 간의 상호 신뢰와 팀워크를 강조한 말이다. 평소 직원이 만족하지 않으면 고객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는 박동호 사장의 철학에서 출발한 두 법칙을 통해 감성경영, 열정과 즐거움이 가득 찬 조직문화를 형성하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고객감동을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CJ엔터테인먼트는 현재 ‘감성충전 프로그램’을 운영 중에 있다. 한달에 한번 꼴로 전 직원이 모여 뮤지컬, 오페라 등 공연을 관람하고 있으며 이는 전 직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난타’를 관람한 것이 효시가 되어 ‘오페라의 유령’, ’캣츠’, ’맘마미아’에 이르기까지 전 직원이 본 공연이 벌써 20여 편에 이르고 있다.

맺으며.

2000년 어느 겨울, 창립 4주년을 맞아 전 직원에게 보낸 이 메일 메시지에서 박동호 사장은 정성, 관심, 창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정성은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며 쏟는 자발적인 노력의 크기라 볼 수 있고, 관심은 자신이 하는 일과 사람에 대한 태도라 할 수 있으며, 창의는 차별화를 이룰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언급하며 CJ엔터테인먼트의 도약을 얘기한 적이 있다. 현재 CGV는 전국 21개 극장, 168개의 스크린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향후 60개 극장과 400~500개의 스크린을 보유한다는 당찬 계획과 함께 온라인(넷마블)과 오프라인의 연계를 통한 플렛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직 내에 그러한 정성과 관심 그리고 창의가 멈추지 않는다면 CJ엔터테인먼트는 끊임없는 도약을 이룩할 수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 극장산업의 리더역할 또한 충실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by 100명 2008. 2. 26. 13:00

원두커피 배달 전문점

한 우물을 팔 것인가,대변신을 꾀할 것인가. 직장인이 회사를 옮기거나 창업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부분이다.

10년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올해초 퇴사한 장현주씨(38세)는 후자를 택했다.

“자의반 타의반이었어요.그동안 일했던 공구기계 제조업을 하고 싶었는데,시장여건이 나아지지 않았고 결제구조가 취약해 방향을 180도 바꾸기로 했죠”

먹는 장사를 염두에 두고 관련 정보를 모으던 장씨에게 친지가 원두커피 배달전문 사업점을 알려주었다. ‘커피콜’이라는 체인점이었는데,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의 맛 수준에 기존 배달커피의 편리함을 합친 아이디어 사업이었다.

특별한 요리솜씨가 필요하지도 않았고,사업성이 엿보여 지난 4월 경기도 안산에 점포를 열었다.

장씨는 문을 열자마자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뜨거운 원두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배달해 주고 보온병은 다음날 회수하므로 하루종일 뜨거운 커피를 즐길 수 있다고 주변상가에 선전했다. 커피 7잔 2500원,냉커피 7잔 4000원,과일쥬스 7잔 4500원,팥빙수 1600원으로 ‘싼 값’을 특별히 강조했다.

첫달에는 140만원어치밖에 못팔았으나 6월엔 370만원,7월엔 500만원으로 매출이 쑥쑥 올랐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은 반드시 재주문을 해오기 때문이었다.

창업비용은 가맹비 200만원,재료·집기 시설비 1300만원,가게 보증금 300만원(25평),기타 100만원 등 총1900여만원이 들었다. 7월 순이익은 100여만원. 주문량이 갑자기 늘어 직원을 3명이나 고용했기 때문이다.

장씨는 “지금 추세라면 월 매출목표를 1000만∼1100만원까지 잡아도 될 것 같다”며 “앞으로 늘어나는 매출은 70% 이상이 순이익이므로 월 300만∼500만원의 수익은 올리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창업포인트 세상 아래 새로운 게 없다. 요즘 창업 아이템을 살펴보면 이같은 말이 절로 나온만큼 다양한 업종들이 나와 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 싶다면 기존 사업들의 틈새를 뚫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원두커피 배달점은 기존 커피관련 사업의 장점만 딴 아이디어 사업이다.

찻집에서 배달하는 커피는 인스턴트인데다 값이 비싸지만 앉아서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중장년층들이 선호한다. 최근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은 소비자가 와서 사갖고 가는 셀프 서비스지만 맛으로 승부하고 있다.

원두커피 배달점은 바로 이 두 업종의 장점만을 택한 신종사업이다. 본사에서 원두커피 기계와 원료를 시중보다 싸게 대줘 창업자는 배달만 해주면 된다.

창업할 때 고려할 점은 첫째,장소 선정이다. 배달커피를 많이 주문하는 상가밀집 지역과 사무실 지역이어야 한다. 단 가게가 목이 좋은 곳일 필요는 없다.

둘째,커피전문점이지만 배달을 해준다는 것을 꾸준히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셋째 원두커피와 과일주스의 차별화된 맛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도록 철저한 맛관리도 중요하다

by 100명 2007. 10. 15. 08:18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9)
보리스 옐친: 전제군주 같은 민주주의자, 개혁주의자


Boris Yeltsin


그는 민주주의와 법치제도, 자유시장주의를 믿었으나 실패한 구제자였다. 그러나 70년에 걸친 전체주의적 독재통치 해체에는 성공했다.

엘친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국민의 자유선거로 당선된 정치인이었다. 민주정치를 실천하려했다가 후퇴한 그는 구 소련연방과 공산당 해체를 주도한 거물이었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헌법절차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 러시아 최초의 인물이다. 전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이하 ‘고’)가 공산당을 영속시키려 했다면 옐친은 그것을 없애버리려 했다. 개혁공약은 지키지 않았으나 언론검열 폐지, 국민의 정부비판 허용, 자유시장 체제 도입시도의 업적이 있다. 반대로 국유기업의 급격한 사유화를 추진, 해적판 자본주의를 추진했고 천연자원을 도용, 정치권과 결탁한 소수 부유계층을 탄생시킨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초강대국을 거지수준으로 만든 과거의 중앙집권적 통제경제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확언했다.

옐친은 모스코에서 1500킬로 떨어진 우랄 알타이 산맥 동쪽너머 농부가정에서 태어났다. 헛간 같은 단칸방에서 춥게 자란 가난을 그는 잊지 않았다. 3살 때 아버지는 스탈린의 숙청대상에 걸려 투옥됐다. 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전 사유재산을 가졌다는 것. 그는 장난이 심했다. 훔친 수류탄을 갖고 놀다가 폭발,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말이 많고 산만했으며 툭하면 싸움질 하는 개구쟁이였다. 처음부터 권위에는 질색했다. 어느 모임에서 선생님을 공개비난, 이것이 알려지자 초등학교에서 쫓겨났다. 기술학교에 들어가 엔지니어가 된 후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이 시절 1년간 17번의 서면질책을 받아 이 방면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잠시 종사한 건축계에서 나와 30세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69년에는 건축담당 정식 간부당원이 됐다. 고위 당간부들과 늘 충돌하면서도 7년 후 지구 당위원장에 임명됐다.

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혁정책의 과감한 추진을 위해 옐친을 모스코로 데려왔다. 거구에 붉은 얼굴, 흰머리를 가진 옐친은 농촌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안고 의기양양해서 도착했다. 그는 곧 인기 인물이 됐다. 정부리무진 대신 시민버스를 타고 다녔고 야채가게에서는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한번은 “점원들이 물건을 왜 팔지 않고 특별손님을 위해서 감춰두느냐”고 고함쳐 묻기도 했다. 그는 곧 신중한 성격의 ‘고’와 대립했다. 87년11월 당대회에서 옐친은 ‘고’가 개혁에 늦장을 부린다고 공개비난, 면직 당했다. 옛날 같으면 그의 인생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련사상 70년 만에 처음인 89년의 민주선거에서 당선, 의회로 진출함으로서 권력에 복귀했다. 다음해 러시아 공산당 역사상 최후의 전국 당 대회에서 그는 탈당, 회의장을 극적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는 국민과 만났을 때 아주 자연스러웠다. 누구와도 악수하면서 저음의 큰 목소리로 농담을 나눴다. 그는 닳아빠지지 않은 농부의 순박함으로 비쳤다. 또한 상식이 풍부한 만만치 않은 농부였고 더욱이 국민주 보드카 애주가였다. 그때도 그의 인생은 일련의 돌발행동으로 끝나는 듯 했다. 국민들은 이를 그의 술 탓으로 돌렸다. 낯뜨거운 장난들, 약속시간 어기기, 불분명하고 모순된 발언, 이 모든 것들은 장시간의 비행기여행의 피로, 또는 병이 나서 아니면 약의 복용 탓으로 이해됐다.

그의 생애 최고의 순간은 91년8월 발생했다. 국민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고 하루 만에 세계 명사가 됐다. 그는 우익세력이 구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를 제거하기위해 벌인 쿠데타에서 그들이 몰고 온 탱크 위에 올라가 이렇게 선언했다. “러시아 시민들이여, 우리는 우익분자들의 반 개혁적, 반 헌법적 쿠데타에 직면했습니다. 우리는 이 반란자들에게 적절히 대응해야 합니다.” 수천명의 시민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쿠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는 ’고‘를 구했다. 지극히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는 ‘고’에겐 가시였다. 그러나 이날은 ‘고’의 가장 귀중한 협력자였다.

인기와 달리 그의 지도력은 감정적이고 투박했다. 그는 전제군주 같이 행동하는 민주주의자였다. 정적에는 무자비하게, 겁 없이 대항했다. 93년에는 탱크를 동원, 공산주의분자들이 지배하는 의회건물을 에워싸고 사격을 명령했다. 그는 클렘린 궁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음모의 주동자였다. 경제, 사회적 문제해결보다 정치게임을 더 즐겼다. 그는 정치고문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누구도 그에게 도전할 만한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98-99년에는 내각을 4번이나 전원 갈아치웠다. 경제는 불황주변을 헤맸으나 대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분야에서는 전의 초강대국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가끔 서방과 대립했으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약해 자주 밀렸다. 그의 충성파들 조차 권력이양을 요구할 때면 그는 강력히 맞섰다. 공산당이 장악한 하원에서의 탄핵안도 물리쳤다. 96년 그는 심장에 4개의 새 혈관을 이식하는 ‘바이패스’ 수술을 받았고 다른 병들을 계속 앓았다. 점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정신상태도 불안했고 준비된 연설도 엉망으로 발표했다. 국민들은 누가 통치자인지 의문을 가졌다. 술중독이 원인으로 보였다. 99년 마지막 날 그는 국민과 세계가 다 같이 놀란 사실을 발표했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나기 수개월 앞당겨 하야한다”면서 전 KGB 비밀경찰원 푸틴을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퇴임 후 그의 건강은 향상됐다. 그의 재임 중 국민의 생활수준은 악화하고 범죄는 넘쳤으나 자신을 포함, 일부특권층은 엄청난 재산을 쌓았다. 그것은 아주 특이한 정치변혁기였다.

옐친 : 31년2월 출생, 지난 23일 모스코에서 복합적 장기 기능악화로 사망. 76세. 유가족:부인과 딸 2.

by 100명 2007. 5. 22. 07:58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30)
버타 윌슨: 최초의 여성 대법관
Bertha Wilson(1923-2007)


인권헌장및 가정법 해석에서 남자판사 집단에 용감히 대항
법정서 변론경험 전무한 ‘변호사의 변호사’
여성, 소시민, 소수민족 위한 진취적 의견 내놓아



버타 윌슨이 50년대 중반 법학도가 되기 위해 법대 입학을 문의했을 때 받은 모욕적 충고를 그대로 따랐더라면 오늘날 캐나다의 사법제도는 지금과 아주 달랐을 것이다. “마담, 우린 아마추어 법학도를 받아드릴 자리는 없습니다. 집에서 뜨개질이나 하시죠.” 54년 가을 댈하우지대학교 법과대학장은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잘 못 보았다. 이정도에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집요한 그녀의 요구는 마침내 자신을 늦깎이 법대생으로 만들었다.

윌슨 판사가 여성최초로 연방대법관에 임명된 것은 성의 장벽을 넘었다는 것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가졌다. 그는 82년, 여왕이 인권헌장에 서명하러 캐나다에 도착하기 3주전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 때문에 그녀의 재직 시기는 헌법이 된 헌장을 여러 각도에서 테스트하는 기간이었다. 여성의 낙태권리에서부터 난민신청자의 재심청구권 등, 개인과 단체의 권리, 자유의 규정 등이 정립되지 않아 헌장해석에 문제가 많던 때였다. 본인이 여성이라는 점, 문제가 많던 시기 이외에 그의 개성이 있었다. 철두철미한 성실함, 다수의견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자기의견을 밝히는 용기, 고독하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남자 판사들의 의견에 동조했더라면 법조인생은 훨씬 쉬었을 것이었다. 이름은 내지 못했을지라도.

그녀의 대법관 임명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온타리오주의 남성중심의 보수적 사법계는 “그녀는 아직 대법관이 될 ‘준비’가 안됐다. 그녀보다는 준비된 남성후보자들이 여럿 있다”고 연방정부에 건의했다. 당시 그녀는 온타리오주 항소법원 판사였다. 존경받는 대법원장 보라 라스킨 조차도 임명권자인 트뤼도수상에게 강력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 그는 캐나다 법조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녀와 브라이언 딕슨 대법관은 인권헌장의 연출자요, 법조항 해석에 근육을 제공한 공로자”라는 평가에 이의가 없기 때문이다.

버타 윌슨은 스콧랜드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간호원 어머니와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중퇴자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영국서 석사를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얻은 후 21살 때 장로교 목사와 결혼했다. 49년 캐나다로 이주, 남편은 오타와부근서 목회했고 한국전 때는 해군군목으로 한국에 파견됐다. 그 후 핼리팍스에 정착, 이때 댈하우지 법대 문을 두드린 것이다. 31세 초년생으로 급우들보다는 거의 10여년은 더 늙었다. 그러나 때를 잘 만났던가? 같은 반의 50명 학생 중에는 여학생이 5명이나 되어 많은 위안과 도움이 됐다. 57년 졸업 후 토론토의 기업문제 전문 변호사회사에 취직했다. 68년에는 이 회사의 ‘동업자’가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판결분석과 연구에 뛰어나 주로 ‘변호사의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고객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후에 컴퓨터에 이관했지만 정보를 수동으로 찾는 복잡한 제도를 개발 유지하는 일 등을 훌륭히 수행했다.

75년 성탄절 직전, 당시 자유당정부는 그를 온타리오주 항소법원(하급법원 판결을 재심하는 법원)판사로 임명했다. 사상 최초의 여성이어서 본인과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 번도 재판정에서 변론한 적도 없고 보통 변호사들 같은 변호사노릇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정법이 대폭 정비되고 새롭게 된 시기, 인권헌장이 자주 도마에 오르는 때, 그의 판결은 여권신장 관계자들은 물론, 전국 법조인들의 관심과 눈길을 끌었다. 자신을 여권신장 투쟁에 올인하는 변호사로 보지는 않았으나 늘 새롭고 흥미로운 법해석을 내놓았다.

82년 대법관이 된 그달부터 그는 남자판사들과 의견대립의 늪에 빠졌다. 그는 늘 외톨이였고 보수, 전통적 사고방식의 남자그룹에 맞서 투쟁해야 했다. 그 점에서 그의 용기는 후대법조인들의 모범이었다. 그는 남자판사들로부터 같은 급의 판사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것이다.

91년 67세 때 대법원에서 은퇴한 뒤 원주민-백인관계를 다루는 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3년간 수행했다. 이어서 캐나다 변호사협회 요청으로 ‘법조계에서의 여성지위 문제’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최고영예인 캐나다 왕립협회(Royal Society of Canada) 회원이며 국가최고훈장(A Companion of Order of Canada)을 받았다. “여자 주제에...집에서 뜨개질이나 하라”는 법학대학장의 충고는 한참 빗나갔다.

버타 윌슨 : 23년 스콧랜드 출생, 지난달 28일 오타와에서 알차이머 병으로 사망. 83세. 유족은 남편 존 윌슨 목사(61년 해로).

by 100명 2007. 5. 22. 07:58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7)
절지 스트라스잭: 폴랜드 해방 위해 17세에 자원입대


적진 후방의 비밀작전요원이나 불발로 그쳐
해군장교로 특채됐다가 군함설계사로 인생마감



할리팍스 폭격기의 점프대 옆에서 절지 스트라스잭(Jerzy Straszak)은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온 몸은 무장으로 무거웠고 어께엔 낙하산을 매었다. 1944년 7월30일 밤. 독일 나치가 점령한 폴랜드 상공. 낙하 직전이었다. 여러 기억이 그의 마음을 기습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기억들을 애써 지우고 수 천 피트 밑에서 무엇이 그를 기다릴지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폴랜드 빨지산 부대가 맞아 줄까, 아니면 낙하하는 동안 독일군이 기관총으로 그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을까. 영국 특별작전부(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소속인 그는 폴랜드 게릴라들을 접촉해서 후방정보를 수집해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작전을 위해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암살하는 법은 물론 라디오교신, 적진 교란작전(사보타쥐)과 각종 무기 다루는 법 및 폭약취급 훈련을 받았다. 그의 희망은 폴랜드의 해군장교가 되어 조국을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40년 7월 독일이 유럽을 대부분 점령하자 윈스톤 처칠 수상의 특명으로 특별작전부가 창설됐다. 임무는 독일군에게 점령된 유럽 곳곳에 글자그대로 ‘불을 지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달리는 기차를 폭파하고, 독일 요인들을 암살하며, 중요한 정보를 영국으로 보냈다. 작전수행 중 많은 요원이 독일 비밀경찰 게스타포에 잡혀 고문 끝에 처형됐다. 목숨은 애초부터 없는 것으로 치고 살았다.

조국 해방을 위해서라면 스트라스잭은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폴랜드는 독일이 침공한 39년 9월1일로부터 불과 1개월 후 완전 점령당하자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를 포함, 군인 수 만명이 정부와 함께 도망쳤다.

스트라스잭은 폴랜드 북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폴랜드 선원이 되고자 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꼭 1개월 전인 39년 8월1일 그는 학생 항해사로 처음 선원 실습에 나갔다가 스웨덴에서 독일군에게 나포, 억류됐다. 3개월 후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폴랜드 해군에 지원했다. 겨우 17세였지만 조국폴랜드 해방은 그의 인생목표였다. 그 후 그는 적 잠수함을 잡는 수중음파탐지기 작동 요원으로 근무했다. 폴랜드 구축함을 타고 악천후의 영국해협(프랑스와의 해협)을 초계하는 것은 “선상유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고장 난 기관차를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라고 그는 회고했다. “영국 프라이마우스 해군기지에 돌아오면 우리는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영화를 보거나 여자를 차에 태울 수 있지만 다음날 새벽 6시면 다시 승선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더욱 여자를 데리고 어디든지 가려면 군복을 다려야했다. 그래 우린 모두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도로 맥주를 마시려고 했다.”

하루는 그는 점심시간에 술에 취했다. 여주인은 그를 술에서 깨우려고 자기 침대에 눕혔다. 그는 술에서 깨어났을 때 몹시 창피했다. 가까스로 승선은 했지만 그는 이 술집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술 김에 무슨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몸을 철저히 관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40년 12월 그는 540톤짜리 조선소에서 방금 나온 새 잠수함 소콜(Sokol)호로 이전됐다. 2개월 후 소콜은 경계 임무 차 바다로 나갔다. 소콜을 포함, 12척의 연합군 잠수함이 프랑스 브레스트 항을 에워쌌다. 이들은 독일의 초강력 전함순양함 샤른호르스트 호와 그네이센호 가 항구를 나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공격, 격침하는 임무를 띄었다. 스트라스잭은 좁은 잠수함 속에서 33명의 병사들과 함께 어께를 비비며 3주간을 지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고, 개인공간이나 개인시간이라곤 없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문제였다. 사용 후 손잡이막대를 순서대로 조심해서 잡아 다니지 않으면 난리가 벌어졌다. 이뿐이 아니라 요리사는 ‘잔혹하다’고 할 정도로 음식이 나빴다. 두 번째 날 소콜 호는 2척의 대 잠수함용 독일 구축함 공격을 받았다. 급잠수에 성공했으나 총 10개의 수중폭뢰가 소콜을 향해 떨어졌다. 스트라스잭은 “아마도 나는 그때 내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무섭지도 않았고 목숨이 붙어있을지 상상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만 해도 당시 죽음에 거의 가까이 갔던 상황은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소콜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 34명 모두가 목숨을 건졌다.

스트라스잭은 언제나 더 많은 활동을 희망했다. 43년에는 해군 정보대로 자원했다. 그는 적극적인 인생살이를 원했다. 뜨뜨미지근한 것은 질색이었다. 언제나 현재의 작전은 마지막 작전보다 더 위험했으나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개월 후인 44년1월 용맹과 충성심을 높이 산 그는 폴랜드 해군사령관의 특명으로 장교에 임명됐고 해군소속 특별작전부(SOE)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 그날 폴랜드 상공에서 뛰어내리려던 그의 낙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장교의 “뛰어내려”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날씨 탓이었다. 실망을 안고 그는 이태리 기지로 돌아가는 9시간 비행에 몸을 맡겼다. 다음날인 8월1일 그는 다시 한번 전날 다녀온 긴 비행길에 올라 낙하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전날과 같았다. “두 번 다 그의 착지점은 그를 맞을 준비가 안됐거나 찾을 수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히려 그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와 50년 친구인 오타와 거주 루카시윅즈의 말이다. 스트라스잭은 이런 운명으로해서 8월1일 독일점령군을 상대로 와르소에서 봉기한 폴랜드 국내 군과 합세할 수 없었다. 이 봉기가 63일 후 끝났을 때 폴랜드군은 5만3천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수도 와르소의 85%가 파괴되는 엄청난 손실이 있었다.

그는 낙하실패 후 종전까지 8개월간 독학,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고 영국 그라스고의 해양구조물 건축학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53년 캐나다로 이민한 후 캐나다 해군에서 군함 을 설계했다. 국방부에서 83년까지 일했다.

절지 스트라스잭 : 22년 9월 폴랜드 출생, 작년 11월 오타와에서 심장질환 사망. 향년 84세,

*** 스파이, 적진교란등의 교육을 받은 그는 뜻을 펴지 못한 채 캐나다로 이민, 해군에서 군함을 설계했다.

by 100명 2007. 5. 22. 07:57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8)
준 콜웃 : 캐나다사회의 양심과 자존심


June Callwood 1924-07년
평생을 바친 사회활동가, 빈민구호가, 인권옹호가



검은색 바지 차림에 어께에 숄을 걸친 준 콜웃은 지난달 7일 토론토 작가모임(Writers Trust)에서 수상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국민작가’ 정도의 대우를 받은 피에르 버튼(Berton)이나 소설가 버나드 오스트리(Ostry)같은 수상자들이 수상 후 타계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참석자들의 기립박수에 자기감정을 거부하면서 그는 “남에게 도움 주는 순간이라면 결코 외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우리는 방관자가 아니라 공범자가 된 것이다”고도 훈시했다. 캐나다의 최대, 최고의 양심이요, 행동주의자로서의 교리를 전한 후 그는 암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자리를 떴다. 그의 마지막 공개석상이었다.

행동파, 세속의 성인, 모금위원장, 시민운동가, 인권 및 반전쟁 운동가인 그는 약 30여권의 책을 썼다. 잡지에는 1천개 이상의 글을 기고했고 몸 담았던 그롭 앤드 메일 지에는 500편 이상의 칼럼을 썼다. 심지어 2개의 TV 쇼의 호스트를 맡았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술, 인권옹호, 시민권리, 극빈자 복지 등을 위한 약 50개의 단체를 ‘출범’시켰다. 이 숫자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가입’하는 단체 수보다 많다. 이 대가로 그는 명예학위 20개, 캐나다 국가훈장(Companion of the Order of Canada)을 받았고 거리 이름과 공원이름이 그의 이름을 땄다.

부모는 생계에 바빠 둘 다 자녀양육에는 등한했다. 이 덕분에 준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알아서 행동하고 책 속에서 지혜와 위안을 찾는 생활을 터득했다. 다만 두 분의 할아버지는 손녀를 미치게 사랑했다. 이래서 준은 부모의 관심 부족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란 서로가 도우며 산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자랐다. 나는 또한 세상에 두려워 할 것이란 없다는 태도를 배웠다.” ‘두려움 없음’은 그의 생애의 특징이었고 그를 크게 도왔다. 수많은 글을 써도 절대로 회고록은 없었다. “나는 자기반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 자신에 그리 복잡다단해서 다시 설명해야할 것은 없었다.” 또한 그는 자기 기억을 다시 색칠하지 않고 생애를 기술할 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맘 속에 남은 기자정신은 이런 색칠을 용납하지 않았다.

준 로즈 콜웃은 온타리오 서남부 지방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여자 동생이 1명 있었다. 어머니 쪽은 1650년께 퀘벡시티에 정착했고 원주민 피가 섞였다. 영국계인 아버지는 연관공(plumber)이었으나 난봉꾼이었고 어머니 생애를 무척 힘들게 했다. 어머니는 수녀원 생활이 싫어 16살 때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친 할아버지는 온타리오주에서 치안판사였다. 외할아버지 빌 라브아(Lavoie)는 미국 주류판매 금지 시절(1920-33년) 밀주로 돈을 벌었다. 6살 때 콜웃은 가톨릭학교에 입학했다가 즉시 3학년으로 월반했다. 책벌레인 그는 도서관에서 읽고 또 읽었다. 10살 때 쇠로 만든 밀크통 재생업을 하던 부모의 사업이 망하고 빚을 잔뜩 졌다. 빚 갚기에 지친 아버지는 집을 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내리 사흘간 감자만 먹은 적도 있었다. 그것도 사 온 것이 아니고 추수하고 난 남의 밭에서 파 온 것이었다. 2차 대전을 거쳐 그는 브랜트포드 소재 고교로 진학, 응원부원이 됐다. 당시 급우들 말에 의하면 “그녀는 몹시 예뻤고 그의 개방된 마음씨는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독창성 역시 감탄 대상이었다.” 수영선수로 다이빙 챔피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교 교지에 글을 꾸준히 썼고 단편소설 공모에서 상도 탔다.

하루는 어머니가 말다툼 끝에 “난 너희들을 먹여 살리는 데 지쳤다”고 소리치자 그는 지역신문사에 철자교정원으로 취직, 주 7.50달러를 받았다. 평생을 담은 언론계 최초의 직장이었다. 42년 토론토 스타지는 주 25달러를 제의했다. “나는 18살이었지만 하이 힐을 신어도 12살 정도로 보였다. 간부들이 나를 보자마자 그들은 나를 얕보았다.” 2주후 사진설명을 쓰면서 육군의 탱크이름을 틀렸다고 해고됐다. 준은 전투기 스핏파이어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공군은 “여자들을 조종사로 훈련하지 않는다.”고 답장, 실망시켰다. 찾아간 그롭 앤드 메일지는 의료협회 총회 취재를 시험 삼아 맡겼다.

그는 수줍고 두려워 취재를 할 수가 없었다. 토론토 스타 기자가 그녀를 불쌍히 생각, 자기 기사 송고 후 기사를 대신 써주었다. 덕분에 그롭 지에 기자로 고용됐다. 남자기자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준은 남자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차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롭지의 존경하던 트렌트 프레인 기자와 결혼했을 때는 그가 19살이던 44년이었다. 당시 기혼여성은 집에서 애나 기르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신문사 요청으로 일을 계속했고 처녀성을 썼다. 부부는 금슬이 아주 좋아 서로를 ‘꿈같은 배필’이란 뜻으로 드리미(dreamy)라고 불렀다. 결혼 3개월 후 준이 임신을 하자 임산부 취업이 문제가 됐다. 기자직 대신 애기 낳기, 기르기를 선택했다. 기자직을 사임하고 집에서 애를 보면서 프리랜서 기자(소속 회사 없이 글을 써서 파는 기자)가 됐다. 자기를 가르친 단발 엔진 비행기 여교관, 여성합창단, 16살로 54년 온타리오호수를 수영으로 횡단한 마리린 벨, 피임약 등 각종 분야가 그의 주제였다. 미국의 바바라 월터즈(미국 TV프로듀서/인터뷰어)등 세계 유명인사들의 연설문이나 글의 대필자 일도 맡았다.

3명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에서 글을 쓰면서 행복한 살림을 하던 그녀에게 우울증(디플레션)이 엄습했다. 모든 일을 중단한 그녀는 의사치료를 받았고 이때의 경험을 모아 64년 자기 본명으로 책을 냈다.

60년대는 준이 사회활동가로 지칠 줄 모르게 활약한 시기였다. 준의 생애 중 많은 일들이 애들로 해서 일어났지만 이것 역시 그랬다. 10대 소년 장남 ‘바니’는 히피 소굴인 토론토의 욕빌지역에 살았는데 가난한 친구를 자주 집에 데려왔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깨달았다. 그는 월세 600달러짜리의 집을 빌려 오갈 데 없는 청소년을 위한 주거지를 만들었다. 이 액수는 잡지에 글 한편 쓰고 받는 정도였다. 그녀는 이런 호스텔을 5-6개 세웠다. 68년에는 베트남전쟁 반대 궐기대회에 참여하는등 거리의 투사가 됐다. 시위하다가 경찰에 잡혀 ‘돈 제일’ 감옥에서 ‘콩밥’도 먹었다. 이 경험이 그를 사회운동가로 만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늘 귀거리, 하이힐, 어울리는 핸드백을 든 숙녀차림이었다. 다음 20년간 그는 집 나온 여성보호소, 애를 낳은 청소년 보호소들의 설립했다. 시민의 권리찾기 운동, 기독교및 유태교 통합위원회, 작가협회, 펜(PEN)클럽 등에도 깊이 관여했다.

2003년 암의 진단과 함께 또 하나의 불행이 닥쳤다. 애지중지하던 20살짜리 막내아들 캐시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퀸스대학교로 돌아가던 중 중앙선을 넘어 온 차에 받혀 목숨을 잃었다. 토론토의 에이즈 환자를 위한 ‘캐이시 하우스’는 그를 기념해서 생겼다. 암은 진행됐지만 그는 평온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후회도 없었다. 지난달 21일 프린세스 마가렛 암병원에 입원한 그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면서도 초코렛을 씹고, 쉐리 술을 마셨다. 언제나처럼 끝까지 모범을 보이면서.

by 100명 2007. 5. 22. 07:57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5)
룽 키 리: 1만달러 상당 인두세 낸 마지막 중국노동자 향년 107세


Ralph Lung Kee Lee 1900-2007
23년에는 가족결합도 못하게 특별배척법까지 제정
백인들 대륙횡단 철도 건설 끝나자 ‘유 고 홈’ 여론



1788년 존 미어스 선장은 중국에서 50명의 ‘장인’들을 선원으로 고용, 브리티쉬 컬럼비아에 도착했다. 이것이 중국인 집단내방의 첫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상륙 후 물물교환소를 지었고 최초의 유럽식 선박 노스웨스트 어메리카 호 제작에 동원됐다. 두 번째 유입은 1858년 서부에서 금광이 발견됐을 때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중국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몰려왔다. 이들은 캐나다를 ‘금산(골드 마운틴)’이라고 불렀다.

캐나다가 연방국가가 된 후 서부지역까지 기차를 놓을 필요성이 높아졌다. 초대 총리 존 맥도날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선택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데려 오든지 철도 건설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다. 다른 선택은 없다.”고. 이래서 1만5천 여 명의 중국인이 CPR철도 건설에 고용됐다. 이중 1천여명이 공사사고 등으로 죽었다. 1885년 철도건설이 완성되자 총리는 이들의 공헌을 인정,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이 아니었다면 일을 계획대로 끝내지 못했을 것이고 서부지역의 자원은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완공 후 중국인들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써먹을 데가 없어진 것이다.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상당 수가 동부로 무작정 떠났다. 정부는 중국인 이민을 억제하기 위해 철도공사가 완공된 바로 그 해에 악명 높은 인두세(Head Tax)를 부과했다. 총리의 중국인 공헌인정 발언이 무색했다. 캐나다 도착 중국인은 1인당 50달러의 상륙세를 내야했다. 액수는 1900년에는 1백 달러로 올랐다가 3년 후인 1903년에는 500달러 -지금의 1만달러 -로 인상됐다. 인두세를 내고 온 중국인은 총 8만1천명이었고 이들이 낸 액수는 총 2천3백 만 달러에 달했다.

룽 키 리는 3남매중 둘째로 12살이던 1912년 광동성에서 ‘금산’으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그가 빨리 돈을 벌어 집으로 보내주길 바랬다. 그는 9살짜리와 5살짜리 사촌들을 데리고 장도에 올랐다. 3명의 소년은 모두 목에 꼬리표를 달았다. 3주후 뱅쿠버에 도착, 마중나온 삼촌을 만났다. 삼촌은 그들을 온타리오주 선더베이로 데려갔다. 룽 리는 접시를 닦고 감자를 깍는 등 뭐든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는 삼촌이 대신 낸 인두세를 갚기까지 5년간 고용계약대로 열심히 일했다. 그는 빚을 갚은 후 철도 보수원을 거쳐 기차식당에 취직, 처음으로 막노동에서 벗어났고 임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었다.

22살 때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가 정한 신부와 결혼했다. 1년 후 아들을 얻었으나 같이 지낼 사이도 없이 그들을 모두 두고 캐나다로 돌아와야 했다. 국외에서 2년을 넘기면 이민을 다시 신청해야 했기 때문이다. 온타리오주 윈저에 살며 그는 가족을 캐나다에 데려오는 날을 손꼽아 고대하며 아끼고 아껴 인두세 1천달러를 저금했다. 그러나 1923년 정부는 갑자기 인두세를 철폐하고 중국으로부터의 이민은 물론, 가족결합까지 전면금지하는 배척 법(Exclusion Act)을 제정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때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족과는 영영 만날 수 없는가. 이런 악법이 주효, 47년 법이 철폐될 때까지 24년간 입국한 중국인은 불과 50명 미만이었다. 매년 2명 정도만 입국된 것이다. 중국인들이 국가창립일 도미니언 데이(캐나다 데이)를 휴밀리에이션 데이(Humiliation Day) - 치욕의 날 - 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1930년 룽 리는 두 번째로 고향땅을 밟았다. 아내는 두 딸을 연거푸 낳았다. 단꿈도 잠시, 2년이란 허가기간을 넘지 않으려고 이들과 다시 이별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가 아들과 지낸 시간은 극히 짧았다. 아들은 17살 되던 해 홍콩에서 병사했다. 가족 없이 혼자지내다가 죽었고 그가 묻힌 곳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룽 리를 평생 괴롭혔다.

중국인 배척법은 47년 드디어 철폐됐다. 룽 리는 수속 시작 후 3년만인 52년 가족과 재회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키스했지요. 나는 난생 처음 받은 남자의 키스이기 때문에 곧 얼굴을 닦아버렸어요.” 12살짜리 둘째 딸 린다의 말이었다. 이들은 뱅쿠버에서 기차로 떠나 윈저 부근 소도시 라살에 도착했다. 중국선조들이 피땀 흘려 건설한 기차 길을 그들은 한도 없이 달렸다. 그는 이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했고 나중엔 중국 한약재 수입상이 됐다.

룽 리는 어떤 사람? “그는 늘 나눠주는 성격이었다. 또한 쉽게 친구를 만들었다. 쇼핑몰에서 동냥하는 사람을 보면 그는 동전을 주면서, ‘너희도 늘 도와야한다’고 말했다.” 린다의 회고다. 81년 부인이 79세로 죽고 딸이 뱅쿠버로 이사가게 되자 94세가 된 그는 토론토 근교 피커링의 너싱홈을 택했다. 이듬해인 95살 때까지 자동차를 운전할만큼 건강했다. 평소 열심히 걸은 덕분인지 100세가 지나서야 휠 체어를 이용했다.

작년 6월 스티븐 하퍼 연방총리의 공식 사과와 보상 발표 후 생존자중 최고령인 쿵 리는 철도부설용 대못을 상징으로 받았다. 이 못은 지금 150여년 전 철도가설을 결의한 의사당 ‘기차’사무실에 영구 비치됐다. 1885년 철도준공 기념식은 중국인 1명 없이 진행됐다. 귀빈들은 쇠로 만든 대못 한 개씩을 선물로 받았다. 121년이 지났지만 쿵 리가 받은 못도 이 중 하나다. 지난 10일 쿵 리는 107세 생일잔치에서 2만 달러 수표를 전달 받았다. 한 맺힌 돈이었다. 그는 5일후 병원서 눈을 감았다.

룽 키 리 : 1900년 3월 중국 광동성 출생. 피커링 너싱홈에서 15일 사망, 향년 107세. 유족 2딸과 손자손녀 7명, 증손자 12명.

by 100명 2007. 5. 22. 07:56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6)
잠 못 자고 주7일 일한 근면과 성실성이 밑천


브루스 스미스 중학교 중퇴 후 운송업 투신 1925-2007
60년전 3천달러 빌려 트럭 구입 현재 430대 굴려
연수입 1억달러, 21번 째 대회사로 키워



브루스 스미스의 얘기는 특이하지 않다. 그것은 피땀 흘려 노력해서 이룬 전형적인 성공담에 불과하다. 성실과 근면의 승리는 가끔 듣는 얘기지만 또 들어도 또 배울 점이 있다.

온타리오 농촌출신의 스미스는 60년 전 트럭 1대를 갖고 우유배달업에 뛰어들었다가 이젠 연수입 1억달러의 트럭운송회사를 만들었다. 온타리오주 심코에 본부를 둔 브루스 스미스 운송회사의 초록-노랑-흰색 트럭, 트레일러들은 오늘날 캐나다 전국과 미국을 누빈다. 26만명을 고용한 캐나다 트럭운송사업은 국내 화물의 90%를, 미국과의 교역품 3분의 2를 수송한다(가치기준). 트럭업은 캐나다 최대의 남자근로자 고용주이다. 남자고 여자를 불문, 운전사 부족현상은 여전, 한국같은 데서 운전사들이 몰려오지만 언어문제로 취업에 장애가 있다.

“아버지는 늘 ‘네가 회사를 잘 보살피면 회사는 너를 늘 보살필 것이다’라고 말씀했어요.” 회장겸 CEO(사장)인 존 스미스의 말이다. 아버진 머리가 부족한 사람일지 몰라도 엄청난 결과를 만들었다. 47년 설립된 브루스 운송회사는 트럭 430대, 트레일러(트럭이 끌고 다니는 화물상자) 1,500대, 사원 638명을 가진 회사로 연수입으로 보면 캐나다에서 21번 째 트럭회사다.

7남매 중 하나인 스미스는 농부였다가 징집된 아버지가 1차대전 전투 중 독일군 독개스 공격을 받은 후유증으로 39년 사망하자 학교를 그만두지 않을 수 없었다. 14세 나이로 그는 옥수수, 딸기, 토마토를 재배했고 돼지와 소들을 키웠다. 그는 ‘가족부양자’로 분류되어 2차대전 중 징집이 면제될 정도로 많은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어느 날 그는 근처 농부를 위해 우유를 배달했다. 스미스에게서 매일 우유를 배달받는 낙농업자(우유로 버터, 치즈, 아이스크림 등을 만드는 사람)는 그의 성실성과 근면성에 감탄, 그에게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3천달러-1년치 봉급에 해당-를 꿔 줄테니 그 돈으로 5톤짜리 K-8 트럭을 사서 낙농제품을 배달해 달라. 배달처마저 권리금 없이 너에게 주겠다.’ 이런 좋은 제의를 받자 그는 즉시 업주와 계약을 맺었다. 이미 산떠미같이 많은 농사일을 가진 그는 이젠 일을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더 많이 해야 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우유와 치즈 등을 배달했다. 젖소들은 젖을 쉬지 않고 생산하기 때문에 그도 주7일 쉬는 날이 없었다. 더군다나 트럭은 냉동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지체란 있을 수 없었다. 대개는 날씨가 더워지기 전인 정오까지 배달을 끝내야 했다. 그는 성실히 이 일을 수행했다. 오후가 되면 일이 없어 트럭이 놀았다. 그런데 트럭이 쉬고 있음은 수입의 중단이며, 정비, 보험료 등의 간접비용은 계속 지불됨을 그는 깨달았다. 차도 기계와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굴려야했다. 노력 끝에 그는 오후에 비료나 흙, 퇴비 등을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덕분에 해가 떨어져야 그는 쉴 수 있었다.

52년에 태어난 아들 존은 아버지와 같이 한 우유배달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한 통에 100파운드나 되는 우유철통을 두 팔에 매고 간신히 트럭에 올려놓고는 팔꿈치로 밀었어요. 너무 무거워 나는 밀 수도 없었지요.” “그는 그 지방에서 손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어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이죠.” 원래 건장한 그의 체질이 그에겐 큰 도움이었다.

브루스는 60년 우유배달권을 팔고 곡식이나 과일 등 농산품 수송만 계속했다. 이때쯤 그는 지역 제빵업소의 일을 맡았다. 제빵소는 식품업계의 거물 켈로그(Kellogg)사에 납품했는데 켈로그는 나중에 제빵소를 사 버리는 바람에 브루스는 운 좋게도 대형 식품사의 수송계약자가 됐다. 그는 트럭 2대를 가지고 카네이션밀크 제품을 수송하던 조그만 회사를 샀다. 이로서 트럭은 총3대로 늘었다. 이 트럭회사는 네슬레(Nestle)식품사 상품을 수송했기 때문에 브루스는 네슬레라는 업계 자이언트와 거래관계를 갖게 된 것도 그의 성공을 뒷받침했다. 71년 스텔코(Stelco) 강철회사가 근처에 공장을 열자 거기서도 그는 수송 일을 맡았다. 그는 크라프트 훗 식품, 라밧 맥주, 퓨로레이터 속달및 배달업, 도파스코 철강 등 굵직한 회사들을 고객으로 가졌다. 고객들은 그의 약속이행 성격과 정직, 성실을 높이 샀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미소를 띠었고 누구에게나 거칠게 소리치는 일이 없었다.” “그는 늘 카버롤(바지와 몸통이 붙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는 자기가 주인이란 것을 나타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생의 회고다.

오늘날 그의 회사는 온타리오주와 퀘벡주, 미국의 프로리다 주까지 사업영역을 넓혔다. 모든 트럭은 블랙박스를 장착했다. 이 박스는 트럭의 스피드, 엔진상태, 도중에 몇 번 쉬었는지, 운전형태 등을 기록, 정보를 매일 송신한다. 운전석은 운전사들이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온도조절 장치를 가졌다. 안전과 연료비, 배기 오염 등도 그가 관심 갖는 분야다. 차량정비는 경쟁회사들과는 달리, 온타리오주에만 있는 5개 정비소에서 75명의 기술자들이 담당한다. 아버지 사업은 아들 존이 대를 이었다. 브랙박스 등은 모두 존의 아이디어였다. 아들은 회사를 딸에게 물려줄 생각이다.

작년에 이 회사는 트럭운전사가 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심코에 있는 팬쇼(Fanshawe) 전문학교에서 전문운전사 자격증을 따는 사람에게는 수업료를 전액 보조한다는 계획이다. 최초의 수혜자는 크리스틴 루(27세)라는 여인이었다. 운전기사 부족을 면해보려는 장기 계획이다. 스미스는 올해 들어 혈액응고증으로 입원했다. 의사들은 “40세 된 사람들이라도 벌써 죽었을 것”이라면서 그의 건강에 감탄했다. 그는 82세 생일 다음날 사망했다.

브루스 스미스: 온타리오주 노폭크 카운티에서 1925년 2월 28일 출생, 심코에서 지난달 1일 사망. 향년 82세.

by 100명 2007. 5. 22. 07:56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4)
루시 오브락: 프랑스 최고의 여성 게릴라


부부사랑 극진, 갖은 방법으로 남편 구출한 영웅
영화, 소설의 모델, 첫 여성 국회의원 돼



우리나라는 유관순을 가졌다. 그러나 33인의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에는 여성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6.25동란 중 북한 빨지산은 오랫동안 활동했어도 남한 레지스탕스가 인민군 후방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프랑스 역사선생 오브락여인에게서 배울 점 중의 하나다.

루시 오브락은 나치 독일점령군에 대한 레지스탕스(게릴라식 대항전)와 사랑을 조합, 세기적 명화 카사브랑카(Casablanca)에서의 잉글리드 버그만 역할을 했다. 또 자기를 소재로한 영화를 여러 편 만들게 한 프랑스의 학교선생이었다. 그녀의 영웅성은 84년 점령군 치하의 일기를 발간하면서, 또 자기와 남편 레이몽의 활동을 의심한 전기작가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영화와 소설들이 나옴으로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전기작가는 그녀 일기에 일관성이 없고 무리한 부분이 있어 그녀가 오히려 독일군의 끄나풀이 아니었는가하는 의심이 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그녀의 운동은 처음부터 애정영화 같았다. 젊었을 때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어떤 장애물, 심지어 독일의 악명 높은 게스타포(Gestapo;비밀경찰)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여러 번 남편을 감방에서 구출해 낸 것은 이런 사랑이었고 용기였다.

42년 말,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 파리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 리용(Lyon)에는 ‘크라우스 바비’가 지휘하는 게스타포의 본부가 설치됐다. 43년 3월 저항운동을 하던 레이몽이 체포됐다. 독일군이나 독일이 세운 프랑스의 괴뢰 비시(Vichy)정부는 그를 암시장의 조무라기 정도로 알았다. 그녀는 대담하게 검사와 접촉, 그를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6월 남편은 영국으로 망명한 드골장군이 은밀히 보낸 특사 장 물랭과 함께 있다가 또 잡혔다. 독일군들은 이들의 정체를 곧 알아냈다. 물랭은 혹독한 고문을 받아 죽었고 남편 레이몽은 죽도록 맞은 후 감옥에 갇혔다. 이때 그녀는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서 특이한 작전을 시작했다. 임신으로 배가 부른 채 게스타포를 찾아갔다. 자신은 잡혀있는 청년의 약혼녀라면서 “약혼자는 의사를 만나러 갔다가 무고하게 잡혔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리용의 백정’이라는 악명을 가진 대장 크라우스 바비에게 안내됐다. 그녀는 배에 든 아기가 사생아가 안 되도록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바비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책상 설합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각종 서류들이었고 사진도 한 장 있었다. 그녀가 해변가에서 수영복차림으로 어린애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갖고 다니는 서류는 자신을 미혼이라고 했는데 해변가의 사진은 애를 가진 기혼여성으로 드러냈다. 어느 것이 맞는가. 그녀가 가진 미혼서류는 위조거나 아니면 미혼으로 애를 가진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바비는 그 ‘테러리스트’를 얼마나 오래 알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엉겁결에 ‘6주’라고 띄엄띄엄 대답했다. 바비는 그녀가 거짓말한다고 그를 쫓아내버렸다. 사진의 애는 누구 것이며 지금 임신은 교제 6주의 남자의 것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낙담하지도, 단념하지도 않았다. 다른 장교에게 접근했다. 장교는 그가 바비를 만나고 나왔음을 알 턱이 없었다. 게스타포 중위는 그의 얘기를 사실로 받아들였고 그들은 게스타포 본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가 일반 감옥으로 옮기는 날 게릴라들은 호송차를 습격, 레이몽과 13명의 ‘죄수’를 구출했다. 이보다 앞서 1940년 레이몽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바이러스가 감염된 알약을 전해주어 그가 병을 앓게 했다. 독일군은 그를 군병원으로 호송 중 그는 도망칠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검찰에 찾아가 남편이 즉시 석방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이 친구는 변절자이므로 그는 치사한 겁쟁이다. 내가 우기면 그는 들어줄 것이다”라고 생각,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부딪친 결과 남편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했다.

오브락은 버건디(Burgundy) 포도농장 집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그는 아주 우수했고 특히 역사학에 뛰어났다. 2차대전이 시작될 때 그는 스트라스부르그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때 젊은 에지니어로 자기와 같은 공산주의자인 레이몽 사무엘을 만났다. 이들은 첫 눈에 반했다. 레이몽은 39년 결혼 전 자기가 유태인이며 유태인과의 결혼은 위험함을 경고했지만 그녀는 관계하지 않았다. 다음해 독일군이 리용을 점령하자 그녀는 게릴라전(‘레지스탕스’) 참가자를 구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래서 부부는 그 지역 그룹의 창설멤버 겸 지휘자가 됐다. 게릴라에 참가한 여성은 많지만 오브락처럼 지휘자급으로 활약한 여성은 거의 없었다. 이처럼 그녀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다. 독일군 점령 첫 2년간 그들은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러 가명을 써서 신원을 감추며 저항운동을 벌이는 이중 생활을 했다. 41년에는 첫 애를 가져 그녀는 선생이요, 어머니며, 레지스탕이라는 3중 생활에 종사했다. 42년 말 레이몽은 마지막으로 또 잡혔다. 게릴라들은 그가 있는 곳을 공격, 이번에도 그를 다시 구해냈고 부부는 44년2월 영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잠적했다. 그해 드골장군은 여성들의 애국심을 인정, ‘프랑스가 해방되면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투표권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오브락은 전쟁 후 프랑스 최고훈장(‘레종 오뇌르’)를 받았고 그는 프랑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됐다. 진정한 영웅인 그는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전시경험을 얘기해 주는 것을 의무로 삼았다. 영화와 소설이 그들 부부를 모델로 등장했다. 그러나 90년 ‘백정’ 바비가 죽은 후 그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글들이 언론에 돌기 시작했다. 의심은 커져 오브락 부부는 프랑스의 저명 역사학자들 앞에서 변호해야하는 신세가 됐다. 그 기회는 부부가 마치 재판대에 선 모습이었고 악의적인 의견 공방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특히 43년 여름 리용의 그녀는 대단한 용기와 게릴라전의 동력이었다. 그의 남편사랑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었다.

by 100명 2007. 5. 22. 07:55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2)
캐나다 여권운동의 최고 기수 도리스 앤더슨


Doris Anderson 1921-2007


▲ 캐나다 최고의 여권운동가이자 영향력있는 언론인이었던 도리스 앤터슨은 남녀평등을 말로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지식인이었다.
남녀평등, 여성의 정계진출추진에 일생을 바치다.

팔팔하게 열성적으로 일하는 도리스 안더슨(Doris Anderson)은 그의 홀어머니가 운영하는 알버타 주 캘가리의 하숙집에서 자랐다. 50-60년 대 잡지편집이라는 남성세계에서 성공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여권신장의 기수였고 남녀평등을 주창한 사람이었다. 그는 20여년 간 여성 월간지 샤트랭(Chatelaine)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잡지를 크게 성공시켰다. 그녀는 베티 프라이던(Betty Freidan)이 여자의 신비(The Feminine Mystque)라는 유명한 책이 나오기까지 약 10년간 캐나다 최고의 여권주의 운동자였다. 연방 외무장관을 지낸 정치인 프로라 맥도널드는 “도리스는 바위덩이와 같은 뚝심의 여자였다”고 회상했다. “도리스는 ‘국회의원 감 50인의 여인’을 특집 보도했다. 당시 다른 언론인들은 상상조차 못하던 파격적 기사였다. 그녀는 언제나 여자들을 내세웠고 정계에서 활동할 만한 사람을 골라 입문을 권했다.”

언론인 미셀 랜즈버그는 “도리스와 두 어 주 전에 점심을 같이 했는데 까십얘기 끝에 그녀는 여성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문제를 거론했다. 무척 약해졌으면서도 도리스는 여성의 단결을 화제로 떠올렸다.” “그는 지난 40년간 캐나다에서 벌어졌던 어떤 여성운동에서도 사실상의 리더였다. 누구도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이퀄 보이스(Equal Voice) 운동의 회장이었던 언론인 로즈마리 스피어스의 말이다. 이퀄 보이스는 여성의 정치참여를 조장하고 여성들을 선거직에 당선시키는 일을 하는 단체다.

앤더슨은 65년 아드리안 클락슨 전 연방총독을 고용, 신간서적 소개업무를 맡겼다. 이 해는 클락슨이 CBC-TV에서 여성들을 위한 프로그램 ‘테이크 30’을 시작한 때였다. 이 프로그램과 샤트랭은 낙태, 피임, 성폭행, 아동학대 등의 문제를 겁도 없이 자주 취급했다. 앤더슨은 클락슨을 귀중한 동지로 보았다. 앤더슨은 특히 남성과 상대할 때 전투적으로 강했으나 내면적으론 부끄럼타는 나약함이 있었다. 그는 권위적이고 무대뽀인 아버지와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나는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지난 12월 인터뷰에서 그는 쾌활하게 말했다. “내가 배운 것은 그들과 경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자 형제들과 세 아들을 사랑했다. 여성운동과 별도로 그에겐 그들과의 관계도 퍽 소중했다.

앤더슨은 어머니 레베카 버크와 하숙생이던 아버지 토마스 맥커빈 사이에서 난 유일한 딸이었다. 어머니의 첫 남편 버크는 사기꾼이었다. 그는 앤더슨이 태어나기 수년전 집을 은행에 저당 잡혀 돈을 빼낸 후 도망가 버렸다. 23살 먹은 부인과 두 아들에게 많은 빚을 물려준 채. 어머니는 맥커빈과의 관계로 임신하자 형제들이 있는 메디슨 햇(Medicine Hat)으로 가서 앤더슨을 낳았다. 아기는 사생아 양육원에 맡겨졌다. 수개월 후 엄마는 마음을 바꿔 아기를 찾아왔다. 위대한 여권운동가의 운명은 이렇게 구제됐다.

앤더슨의 생부 맥커빈은 술이 심했고 도둑질 버릇이 있었다. 앤더슨이 8살 때 어머니와 결혼한 그는 성격이 고약한데다가 ‘목에 힘주는’ 권위적 태도를 가졌다. 앤더슨은 늘 그를 미워하면서 컸다. “나는 아버지가 차에 치워 죽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1996년도에 출판한 자서전 레벨 도오터(Rebel Daughter; 반항하는 딸)에서 기술했다. ”저녁상을 차려놓고 밥 먹을 준비를 하는데 아버지는 뒤늦게 들어와서는 좌상에 앉아 거만을 떨면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보수적이어서 딸이 입 다물고 순종하기를 원했다. 틴 에이저 앤더슨은 어머니의 종속적인 결혼관과 ’여자는 애를 잘 길러야한다‘는 당시의 규범을 배척했다.

그는 학교에서 보는 미혼 선생들을 인생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 시골학교에서 가르치면서 학비를 모아 에드먼튼의 알버타대학교에 진학했다. 45년 졸업하면서 저널리즘에 뜻을 두고 토론토로 왔다. 그는 지금은 없어진 스타 위크리 잡지에서 기자 보조원으로 첫 직장을 잡았다. 51년 잡지 샤트랭의 사업부에서 근무, 본인에게는 물론 캐나다여성들을 위한 역사적 헌신의 시작이 됐다. “앤더슨은 생김새도, 행동도 여자이면서도 개처럼 일하는 점이 좋다.” 당시 그의 보스의 평이었다. 6년 후 그는 놀랍게도 편집자(editor)가 됐다. 경영진이 남자를 임명하려하자 그는 “사임하겠다”고 협박해서 차지한 자리였다. 이보다 2주전 그는 변호사이며 자유당의 전략가 데이빗 앤더슨과 결혼했다. 그와의 결혼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애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샤트랭에서 편집장으로 그는 요리강습, 미용, 자녀양육 등 여성들이 기대하는 기사 외에 낙태, 산아제한, 여성을 차별하는 이혼법, 남녀 직원간의 봉급차등 등 그들을 흔들어놓는 심층기사를 자주 게재했다. 그는 이런 문제를 다룰 줄 아는 이름난 기자들을 고용했다. 그의 첫 사설은 여성들이 의회에 좀 더 진출해야한다는 것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58년에는 여성국회의원이 단 2명뿐이었다. 이래가지고는 여권이 신장되지 않고 남녀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는 엄격하고 용서없는 낙태법을 공격했고 여성지위에 관한 왕립조사단 구성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는 또한 어린이학대, 인종차별, 원주민의 고통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일부는 그가 ‘좋은 건강한 잡지를 여성주의 걸레로 만든다’고 비난했지만 60년대에는 구독자가 4배나 늘어 180만 명이나 됐다. 그는 발행자인 매크레인-헌터를 돈방석에 앉게 만들었으나 그의 보수는 한 번도 시사주간지 매크레인즈(Maclean‘s) 편집장만큼 되지 않았다. 그가 연봉 2만3천달러를 받을 때 구독자 감소로 고민하는 매크레인즈 편집장은 69년 불과 6개월을 일했으면서도 연봉이 5만3천달러였다. 편집장이 드디어 쫓겨난 후 앤더슨은 후임을 원했으나 피터 고조우스키(Peter Gzowski)에게 넘어갔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 직책을 맡겼을 것이다. 아직도 분하다. 지금 같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앤더슨은 지난 12월 인터뷰에서 말했다. 77년 샤트랭 잡지의 발행인 밑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사임했다. 발행인 자리도 바랐으나 그의 차지가 되지 않았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인 그는 78년 토론토의 의원 보궐선거에서 자유당후보로 나섰으나 반 트뤼도 정서에 밀려 고배를 마셨다. 그는 자신이 정당정치가 요구하는 당수에 복종하는 성격을 갖지 않았음을 깨닫고 정계진출을 단념했다.

79년 그는 연방정부의 ‘여성지위에 관한 국가자문위원회’ 회장에 임명됐다. 80년 재선에 성공한 트뤼도 수상이 헌법의 ‘캐나다이관’을 추진하자 앤더슨은 여성차별 금지조항을 헌법에 삽입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것이 60년 제정된 쓸모없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복사판임을 알았다. 권리장전은 여성들이 10번의 재판에서 번번히 패소한 있으나마나한 조항이었다. 그는 헌법전문 변호사를 고용,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들어가 싸우게 했다. 그러나 앤더슨 그룹의 일부 이사들조차 정부편에 서자 앤더슨은 항의 사임했다. 후로라 맥도날드 보수당 여의원등이 나서 의사당에서 항의시위를 열자 전국에서 무려 1천300명의 여성이 몰려왔다. 81년2월 결국 자유당 정부가 굴복, 권리헌장(the Charter of Rights)에 새 조항이 추가됐다. ’헌장이 언급한 모든 권리와 자유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됨을 헌법은 보장한다.‘고 헌법은 천명했다. 앤더슨은 82-84년 전국 700개 여성단체의 연합체인 국가행동단(The National Action Committee)의 회장이 됐다. 그러면서 토론토 스타 지에 정기칼럼을 썼고 이런 중에서도 3번째의 여권신장, 인권보호에 관한 소설을 발간했다. 앤더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북미여성들은 선거제도를 유럽 여러 나라가 채택한 인구 비례대표제로 바꾸지 않는 한 상위직으로 진출할 수 없다.‘

그는 말년에 두 번 심장마비 증상을 앓았고 허파도 나빠졌다. 지난 12월 병원에서도 여권운동을 얘기했다. 여기엔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죽을 권리 허용’ 주장이 추가됐다.

by 100명 2007. 5. 22. 07:54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3)
로저 라울리 Roger Rowley 최고무공훈장을 두 개 받다


Roger Rowley 1917-2007


민병대 출신으로 소장까지 진급
2차대전서 탁월한 작전, 지휘력, 용감성으로 혁혁한 전과

▲ 캐나다 최고의 여권운동가이자 영향력있는 언론인이었던 도리스 앤터슨은 남녀평등을 말로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지식인이었다.
39-45년에 참전했다가 돌아 온 캐나다 군은 거의 모두 군대를 떠났지만 소수는 군 생활을 계속했다. 라저 라울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39년 그는 오타와 민병대(militia) 소속 소위로 유럽전투에 참전했다. 정규코스를 밟은 전통 직업군인이 아니었으나 돌아왔을 때 그의 가슴은 옆줄이 그어진 최고훈장 DSO(Distinguished Service Order)과 기타 작은 훈장들로 장식됐었다. 훈장의 옆줄은 같은 훈장이 두 개라는 뜻이다. DSO는 일반인에게도 주어지지만 전쟁 중 군인이 받았다면 그것은 영국왕실이 주는 빅토리아 십자훈장(Cross) 다음 서열로 말할 수 없는 영광이 된다. 라울리의 경우는 두 번 다 적의 집중 사격을 받으면서도 냉정을 잃지 않아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을 확보한 공로였다.

44년 9월17일 영불해협에 있는 프랑스 항구 볼로뉴 탈환작전이 시작됐다. 볼로뉴는 독일의 히틀러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린 곳이었다. 대대병력을 거느린 그는 볼로뉴 시 가운데 있는 라 코쉐리 성 탈환을 명령받았다. 라 코쉐리 성은 성책과 물이 흐르는 호로 둘러싸였으며 독일병들이 철통같이 수비하는 요지였다. 캐나다 군 기록에 의하면 성의 탈환은 '듀마소설의 로망스‘ (알렉산더 듀마;프랑스의 국민적 소설가)같은 것이었다. 성 탈환에 고심하던 그에게 행운이 닥쳤다. 이 지역을 잘 아는 프랑스사람이 성안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라울리 휘하의 1개 분대가 반신반의하면서 새벽에 잠입, 독일병들을 기습하자 놀란 그들은 모두 항복했다. 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라울리 중령은 적의 집중포화 속에서도 대대를 예상보다 빨리 라 코쉐리 성의 바로 코 앞으로 밀어 부쳤다. 결국 그는 성을 결사적으로 수비하던 200명의 독일병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작전성공은 나머지 연합국작전을 신속히 종결시켰다.‘ 훈장수여장의 설명이었다. ’이 장교의 지휘력, 용감성은 전군의 사기를 높였고 볼로뉴 시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됐다.‘

5주 후 그는 네덜란드 브래스켄에 있던 독일 수비대 병영을 점령, 또 하나의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작전은 안트워프 항구를 연합군 병참기지로 하기 위한 작전의 하나였다. 이작전이 성공하기 전 캐나다군은 벨지움의 레오폴드 운하를 방패로 참호 속에 숨은 독일군을 하나씩 제거하는 어려움에 시달렸다.

44년 10월22일 브래스켄 작전이 시작됐다. 독일군은 병영주위에 너비 7미터나 되는 대 전차 참호를 파 전차의 접근을 막았다. 더군다나 깊이 4미터 참호 속에는 물이 흘렀다. 철통같은 방위였다. 첫 공격에서 캐나다군은 폭탄오발로 여러 명의 아군이 죽는 사고가 발생, 공격을 중지했다. 군의 표창 설명은 이렇게 이어졌다. ‘시간이 부족했으나 라울리는 기막힌 작전을 단시간 내에 수립하고 확신과 집념으로 장병을 지휘, 병영을 점령했다. 이로서 브래스켄은 탈환됐다.’ 라울리는 오타와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가 국회의사당 건너 오타와강변에 있는 목제소 사장이 됐다. 어머니 쪽으로는 캐나다의 제2대 대법원장 윌렴 리치의 손자였다. 아버지는 그가 18개월 됐을 때 사망, 어머니와 이모들 밑에서 컸다. 핼리팍스의 댈하우지대학교를 졸업한 후 오타와 민병대에 입대했고 한편으로는 오타와 주식회사에서 채권매매원으로 일했다.

그는 40년 5월 북대서양의 아이스랜드(Iceland)를 독일군 침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일단의 소규모 병력과 함께 파병됐다. 놀웨이는 1개월전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터였다. 독일은 아이스랜드를 기점으로 연합군에 잠수함 공격이나 연합국 선박수송단에 대한 공격기지로 삼을 우려가 있었다. 한참 전투가 치열할 때는 캐나다군은 2,700명으로 늘었으나 10월 말께는 대부분 영국으로 돌아갔다. 라울리 민병대는 그곳에서 겨울을 지냈다. 41년 그는 대위로, 42년에는 소령, 43년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전쟁 말기 귀국한 그는 일본본토 점령군 훈련을 담당했다가 미국의 원폭투하로 일본이 항복하자 군대가 해체하는 바람에 여러 가지 다른 직책을 맡았다. 소장으로 진급한 그는 68년 퇴임, 여생을 봉사활동으로 일관했다.

“아버진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품위가 있었지요.” 아들의 말이다. “아버지 장례식 때 처음으로 깨달았는데 그들은 아버지가 자기들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한 사실에 감사했다. 난 아버지가 모든 부하들의 이름을 외고 그 부인들 이름까지 아는 줄은 몰랐다. 그는 아마도 계급을 막론하고 군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한 것 같다.”

라울리는 야외생활을 좋아했다. 그는 오타와 주택부근에 심어진 모든 나무종류에 대한 기록을 만들고 강이나 호수에 물고기를 넣어주는 일을 하는 위원회의 장이었다. 그는 낚시를 평생 즐겼고 동부캐나다에서 연어가 올라오는 모든 강에서 낚시를 했다. 그는 대서양 연어 보존연맹을 이끌었다. 85세 때야 비로서 중단한 스키광이기도 했다.

by 100명 2007. 5. 22. 07:54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0)
최초의 유태계 온타리오 최고법원 판사


재판보다 비공식 면담제도 개척한 가정법의 거목 에이브라함 리프(Abraham Lieff) : 1903-2007


▲ 2003년 백수(100세)를 맞은 에이브 리프.
인종차별에 굴하지 않은 노력과 재능의 인간
88세까지 일하고 99세 때 토론토대학교 다녀,
가장 좋아하는 활동은 “아침에 눈뜨는 것”

유태계 예루살렘성경과 스컬캡(skullcap:유태교신자들의 검은 모자)을 쓰고 온타리오 최고법원 판사선서를 한 아브라함 리프. “그의 깊은 신앙심은 그의 인생항로에 계속해서 생명수를 준 우물이었다.” 유대교회당의 랍비 말이다.

“에이브(에이브라함의 약칭)는 개척자였다.”고 여자판사 로잘리 에이벨라는 말했다. 70년 초 리프가 판사였던 법정에 변호사로 등장했던 에이벨라는 현재는 연방최고법원의 판사다. “그는 특히 가정문제에 관한 한 수퍼스타였다.”

그는 첫 유태인 출신 첫 주 최고법원 판사였고 이것은 그 후 법조계의 인종차별 타파에 큰 역할을 했다. 그가 가정법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68년 이혼법이 제정될 때까지 가정법을 심각하게 전문으로한 법조인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고 에이벨라 판사는 말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신사로 알려졌고 또한 인간적이고 아주 현명하며 그러면서도 겸손, 마음이 넓은 착한 사람으로, 즉 훌륭한 판사라면 가져야 할 모든 덕목을 갖춘 인간으로 유명했다.”“그는 법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그 법을 어떻게 정의롭게 적용할 줄을 알았다.” 뱅쿠버에 사는 리프의 유일한 남매는 “오빠는 언제나 오빠다웠다. 특히 아버지가 41년 사망한 후 그는 아버지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여동생의 남편이 죽은 지난 5년간 에이브는 바쁜 일과에도 불구, 동생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위로하는 인간성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유럽 벨라루스 지역에서 이디쉬어(유태언어의 일종)를 가르쳤다. 그후 그는 소련군에 징집되자 도망쳐 나와 오타와지역에서 살았다. 부인은 18개월 된 에이브를 데리고 1904년에 합류했다. 아버지는 시골을 돌면서 농부들에게 물건을 팔고 양철들을 대신 받아 기차를 통해 오타와로 수송하는 일을 했다. 그후 사업을 접고 유태학교 교사가 됐다.

에이브는 학교에 다니면서 호텔보이, 상점점원, 전보 배달원등으로 일했다. 배달부로서 가장 자랑스런 기회는 14살이던 1917년에 있었다. 윌프리드 로리에(Wilfrid Laurier) 전 연방수상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그가 직접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었다. 그는 에이브를 집안으로 초대한 후 인생의 목표 등을 묻고 하인에게 케이크를 주라고 말했다. “내 머리통만한 초코렛이었다. 윌프리드 경(Sir)이 바로 앞에 앉아 내가 먹을 동안 말을 걸었다. 내가 일어나자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25센트짜리 팁을 주었다. 그날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 에이브의 회고담. 그는 오타와 라프라이더 프로축구의 열렬한 팬이었고 밴조(banjo)를 밴드단과 연주하는 전문음악인이었다.

당시 변호사가 되려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견습기간을 보낸 후 온타리오주의 유일한 법대 토론토의 오스굿 홀(Osgoode Hall)에 입학해야 했다. 그는 21년에 입학했고 시민권을 받은 지 1주일만인 26년 11월에 변호사가 됐다. 시민권이 필요요건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오스굿 법대 시절 그는 변호사사무실에서 주당 7달러를 받으면서 일했고 밴조 연주로 용돈을 벌었다. 주일엔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다. 후에 결혼한 새디는 몬트리얼 소재 매길대학 법대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이들은 25년 오타와에서 열린 유태소년소녀 모임에서 만났다. 새디 역시 온타리오주 변호사가 됐고 이들은 29년 퀘벡시티에서 결혼했다.

30년대의 이름 있는 법률회사들은 유태인이나 여성변호사를 차별했기 때문에 이들은 오타와에서 자신들의 회사를 차렸다. 그는 부인을 아주 자랑스러워했고 그녀가 여성으로서 변호사가 된 것을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이들은 대공황(29-30년) 때 위기를 맞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에이브는 일당을 받는 검사직을 수행했다.

유능하지만 유명 법률회사로부터 차별당한 변호사는 유태계만 아니었다. 불어계도 비슷했다. 퀘벡출신의 첫 온타리오 최고법원 판사는 36년 슈브리가 처음이었다. 에이브는 그와도 함께 일했다.

에이브는 39년 처음으로 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그는 청소년범죄와 첫 범법자에 관심이 컸다. 여러 유명 인사들이 그의 도움과 관대한 처벌을 받고 성공했다. 63년 자유당정부는 그를 첫 유태계 온타리오최고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그가 60세 때였다. 당시 법으로는 판사들은 토론토 10마일 이내 지역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는 오타와를 떠났다. 그는 오타와 서부 자유당연합회 회장, 이스라엘협회 창설, 키와니스 클럽(Kiwanis club) 회장 등을 맡으면서 사회, 정치, 종교적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 토론토에서는 프로풋볼 대신 토론토 야구 불루제이스 팀의 팬이 됐고 한편으로는 정원가꾸기, 요리, 음악(밴조 대신 기타리스트가 됨)에 조예가 깊었고, 유태회당에서 청소년을 가르치며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일도 활발히 벌였다.

그는 판사로서 정식 재판전의 원고 피고 분쟁자 비공식 면담제도(pre-trial)를 개발, 이 방면의 개척자가 됐다. 이같은 분쟁해결은 이젠 민사, 형사, 가정법 분규에서 하나의 공식으로 수락됐지만 당시는 전통적 사고를 가진 재판관들의 반대가 컸다. 이들은 “우리의 업무는 판단이지, 중재가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에이브는 재판날짜가 정해지기 전 양측 변호사를 불러 문제점을 찾고 해결책을 모색했다. 비공식 대화이기 때문에 분위기는 솔직하고 포괄적이었다. 해결점이 찾아지지 않으면 에이브는 사건을 다른 판사에게 맡겼다. 에이브는 78년 은퇴연령이 꽉 찰 때까지 봉직했다. 그러나 그만한 역량을 가진 그가 조용히 은퇴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결국 법원의 코미셔너, 부판사 등으로 88세까지 일했다. 그가 토론토대학교에서 유태학을 공부한 것은 99세 때였다. 2003년 3월 100세를 맞았다.

그는 평생 중에서 가장 자랑스런 업적으로 “공적으로는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 사적으로는 새디와 결혼하고 70년을 산 것” 두 가지를 들었다. 장래의 희망으로는 관절염 치료와 이스라엘의 평화정착, 세계의 안정이라고 말했다. 가장 좋아하는 활동으로는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그는 이달 초까지 아침에 일어나다가 허파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서 중단했다.

에이브 리프: 1903년 폴란드 출생

2월12일 토론토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서 사망. 향년 103세. 직계 유족으로는 두 딸과 손자 5명, 증손자 7명.

by 100명 2007. 5. 22. 07:53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1)
짐 로버츠, 인간을 사랑한 자유주의적 신부


Rev. Jim Roberts 1928-2006


▲ ‘평민의 신부’ 짐 로버츠. 그의 견해는 신문기자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으나 자기 교회로부터는 소외됐다.
용감하게 교회를 고소하고 정부비판한 80년대의 ‘평민대변인’

짐 로버츠 신부는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자기 의견과 일치하지 않을 때 잠자코 수락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낙태, 이혼, 동성혼, 여성사제 임명, 신부의 종신 독신, 피임약 사용 등의 문제에서 "교회 교리가 너무 보수적이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공개 비난, 교회의 미움을 샀다. 교회가 도덕적 ‘죄’로 보는 곳에서 그는 복잡한 인간조건의 불가피성을 보았다. 그는 바티칸 교황청이 60년대의 개혁운동에서 벗어나 보수적 교리해석으로 돌아서고 뱅쿠버 대교구청마져 정치적 보수로 방향을 바꾸자 분연히 일어났다. 비교종교학의 오랜 교수 배경을 가진 그의 견해는 권위가 있었다. 20여 년 간에 걸친 그의 교회와의 대립은 95년 연금문제로 대주교와 교구청을 고소했을 때 극에 달했다. 그러나 그는 신앙심에 전혀 동요가 없는 철저한 신부였다.

그런 면모 이외에 그는 ‘평민의 신부(the priest of the people)’라고 불려 질 만큼 어려운 처지의 평민들을 힘껏 도왔다. 어떤 이유로든지, 교회와 거리를 둔 주변 신자들을 찾아 그들을 다시 교회로 되돌려 보내는 일은 그의 주요 일과였다. 장례식에서 자포자기로 술에 취한 여인을 만나자 성당에 데려다가 보살핀 후 교회로 다시 돌아가게 한 일도 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 그의 인간사랑은 극진했다.

아일랜드계인 신부는 28년 뉴욕시 브루크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쇄소 타이프세터, 고집불통 성격을 물려준 어머니는 가정주부였다. 12살 때 그는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년 후부터 신학공부를 시작, 총 14년간을 수학했다. 그는 28세 되던 56년 서품 받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주 몬로(Monroe)시에 부임했다. 교구 신자들은 전원 흑인이었다. 몬로는 백인우월주의 극렬단체 쿠 클럭스 클란(Ku Klux Klan)의 지역본부가 있는 곳이었고 또한 그곳은 전 해병대원 로버트 윌렴스가 이끄는 전투적인 흑인지위향상 전국연합회가 지회를 둔 곳이었다. 로버츠 신부는 마침 쿠 클럭스 클란 집단의 흑인거주지 공격 때 부임했다. 당시는 흑인아동들이 시 수영장을 백인과 같이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흑백 간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던 어려운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두 명의 흑인소년이 백인소녀 1명을 키스했다고 해서 투옥된 사건이 전국적 조명을 받던 때였다.

이런 극단적 대립과 바람 잘 날 없는 충돌 현장에서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정의로운 분쟁해결에 노력했다. 흑인들의 ‘평화의 행진’이나 반 빈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피나는 이때 경험은 신부에게 강인한 사회적 신념을 심어 주었다.

그런 노력의 덕분인지 사태는 미봉된 채 그는 수년 후 뱅쿠버 지역, 버나비 ‘자비의 모후’ 성당으로 전임됐다. 피부로 인한 분쟁이 없는 평화스런 지역이었다. 72년 그는 휴직하고 뱅쿠버 랭가라(Langara) 칼리지에서 종교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한편으로는 그는 교회통합운동, 특히 동양 종교와 서양의 기독교 연대를 위해서 노력했다.

83년 빌 베넷 주수상이 내핍정책을 발표하면서 정부지출과 서비스를 대폭 줄이자 극빈자들의 생계를 염려한 그는 노동계 및 지역주민 대표들과 함께 반대운동에 나섰다. 공동대표가 된 그의 이름은 이 운동으로 주 전역에 알려졌고 그는 유명 ‘정계인사’로 통했다. 다음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내방을 앞두고 그는 교황이 주정부의 빈민층 탄압정책을 공개 비난해 달라고 탄원했다. 그는 수년전 필립핀에서도 이같은 일을 주동해서 교황이 이에 응하도록 했었다. (*이에 대해 그롭 앤드 메일 지는 ‘필립핀은 독재자가 지배하지만 브리티쉬 컬럼비아는 선거로 선출된 수상이 통치하는 것을 신부는 망각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는 논쟁을 두려워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논쟁으로 잠을 설치거나 괴로워하는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사심없는 그의 성격은 반대자들 조차 그를 미워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적이 없었다. 그 역시 어떤 인간을 막론, 미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65세가 되던 95년까지 가르쳤고 그 후에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 정년을 맞아 학교에서 나온 그는 주교에게 성당복귀를 요청했다. 이 청원이 2년간이나 수락되지 않자 그는 신부봉급과 연금 지불 불이행을 이유로 교구청을 제소하고 인권옹호위에도 탄원했다. 제소이유는 자신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견해가 교회와 다르다고 해서 인간차별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복이 아니다. 나는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할 뿐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이태리 은퇴자들을 위해서 무보수로 미사를 주관하겠다고 했다. 나는 아무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도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축출 당했다.” 그는 교구내의 다른 신부들이 형사처벌을 받았거나 사제서품 서원을 지키지 않았는데도 연금을 받은 전례가 있음을 밝혀냄으로서 교구청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고소를 취하했고 매달 연금을 받았다.

집안 정돈은 잘 안 해도 수준급 정원사인 그는 예를 들면 살아있는 식물이라면 아무리 볼 품 없어도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파리지안 카페와 이태리 포크송(민속 노래)을 즐겼다. 외국여행에 다녀와서는 자세하게 기술한 일기장을 친구들에게 돌리는 자상함도 있었다. 자제하기 힘든 미식가였고 그래서 뱅쿠버의 유명 음식점 주인들과도 죽을 때까지 친구관계를 유지했다.

신부는 한때 내세에 대해서 신문기자의 질문을 받았다. 그는 천당을 ‘인간지능으로 이해가 안 되는 신비스런 장소’로 설명하면서 천당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천당에 대한 설명은 물질적이고 부질없다. 참종교의 의도와도 맞지 않는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짐 로버츠 ; 28년5월 뉴욕서 출생, 작년 12월23일, 신부서품 50주년 바로 다음날 뱅쿠버에서 식도암 사망. 78세.

by 100명 2007. 5. 22. 07:53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8)
베스트셀러 제조기 - 시드니 셸든 Sidney Sheldon (1917-2007)


교민가정에 1, 2권 없는 가정 없어
시대변화 따라 민감하게 변신, 피나는 노력



▲ 교민들 중에 그의 독자 아닌 사람이 있을까? 19편이 넘는 베스트 셀러를 쓴 이 시대의 이야기꾼 시드니 셸든(87년 사진)은 특히 열광적인 여성독자층을 가지고 있었다. "글 쓰지 않는 다른 일을 생각 해본 적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첫 장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이 도저히 중단할 수 없는 그런 책을 쓰고 싶었다. 한 장(챕터)이 끝날 때마다 독자가 '한 장만 더 읽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였다."

국내 한인사회, 특히 2·3세들이 있는 가정마다 그의 소설 한 두 권이 없는 가정이 없을 정도고, 영어소설과 거리를 둔 1세들에게도 그의 이름은 친숙하다. 최근 그의 사망이 전해지자 많은 팬들, 특히 여성들의 아픔은 진했다.

시카고 출신의 인기 소설가이자 TV드라마 프로듀서였던 시드니 셸든(Sidney Sheldon)은 1917년 독일계 유대인 아버지와 러시아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성은 슈텔(Sche-chtel). 그는 10살 때 자작시를 10달러에 파는 등 일찌감치 글재주를 보였고, 노스웨스턴대를 졸업한 후 1937년 할리웃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3류 영화 극본을 교정하는 일을 했었다.

2차대전 때 공군 조종사로 활약한 셸든은 종전 후 뉴욕으로 이주,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쓰면서 할리웃의 MGM과 패러마운트 스튜디오를 위한 영화각본도 계속 쓰느라고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다. MGM과 계약 당시인 82년 그는 "그때 나는 일 밖에 몰랐다. 쉴 틈이 없었다. 하루는 프로덕션 책임자가 내 각본이 총 8개로 다른 3명의 작가들이 써낸 합계보다 더 많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를 프로듀서로 승진시켰다"고 회고했다.

50년대에 들어 TV시대가 열리면서 영화가 시들해졌을 당시 셸든은 다시 한번 도전했다. TV작가였다. 그는 인기 여배우 패티 듀크의 'The Patty Duke Show'의 작가로 7년 동안 일했고,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내 사랑 지니(I Dream of Jeannie·65~70)'를 제작했다.

셸든은 '지니'의 마지막 시즌 때 처음으로 소설을 써 볼 생각을 가졌다. 정체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목표를 쫓는 그는 또 한번의 변신을 시도했다. "매일 오전 9시부터 낮 12시까지 전화를 끊고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근 후 소설에 매달렸다. 내가 문장을 구술하면 비서가 타이핑했다. 점심시간 이후부터는 다시 TV 비즈니스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그는 69년 첫 소설 'The Naked Face'을 내놓았고 이 작품으로 미국 추리소설가협회(Mystery Writers of America)'가 주는 '에드거 앨런 포 상(Edgar Allan Poe Award· 최우수 데뷔작)'을 수상했다. 다음 작품인 'Other Side of Midnight'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명단 1위에 올랐고, 나중에 영화와 TV 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됐다.

영화·TV·연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성공한 팔방미인이었지만 셸든은 소설을 쓸 때가 가장 즐거웠다. 큰 키, 우람한 몸집과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타자기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직접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없었다. 넓은 사무실 안을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비서에게 문장을 불러주는 식으로 하루 평균 50쪽이나 되는 엄청난 스토리를 창작했다. 이런 식으로해서 총 1,200~1,500쪽이 채워지면 다음은 편집 차례였다.

"12~15번이나 고쳐 쓰는 게 보통이었다. 이 때문에 마지막 원고가 확정되기까지 1년 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지난 92년 회고했다. 마지막까지 출판사에게 원고를 미리 보여주지 않기로도 그는 유명했다. 87년 'Sands of Time'을 집필 중이던 그는 출판사 간부를 휴양 중이던 프랑스 남부로 불러 원고를 다 읽을 때까지 호텔방에 가둬놓기도 했다.

셸든의 주인공은 주로 '드센' 여자들이다. 그는 인정사정이라곤 없는 남자들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는 생활력 강한 여자들에게 조명을 비췄다. "여자는 더 복잡하다. 강하면서도 취약한 부분이 많다. 제임스 본드가 헤쳐나 올 상황에 여자를 빠트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키 힘들다." 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문학가라고 보긴 힘들어 많은 문학비평가들은 셸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두터운 여성 독자층의 지원으로 베스트셀러를 19편이나 쓴 단골이었다.

30년 간 행복하게 지냈던 첫 부인과 85년 사별, 광고회사 중역 알렉산드라 코스토프씨와 재혼했다. 그는 지난 1월30일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9세.

by 100명 2007. 5. 22. 07:52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9)
‘미인은 바보’라는 말은 허위


모델출신 오드리 모리스(Audrey Morris)는 성공한 사업가 (1925-2007)
학교, 공급대행소, 화장품회사 등 3개사 창업
사망 직전 주까지 일 한 노력형 완벽주의자



▲ "오드리와 일하는 것은 졸업반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 모델은 회상했다.
오드리 모리스는 60-70년대 캐나다 최고의 모델공급대행소(에이전시) 운영자였다. 그러나 모리스가 성공한 것은 이 것 뿐이 아니다. 똑똑하고 창의적인 그녀는 모델학교를 세웠고 화장품회사를 창업했다. 그녀는 지난달 풀로리다에서 81세로 타계하기 바로 전 주까지 일손을 놓지 않은 일벌레였다.

몬트리얼은 캐나다 최고의 패션 캐피틀(수도)이다. 모리스 모델회사는 TV와 인쇄매체 뿐 아니라 패션쇼에 최고의 모델을 공급했다. 이 학교는 이바나 트럼프(Ivana Trump)등 많은 유명모델을 길러냈다.

화려한 사업을 이끌어가는 사람치고는 그녀는 아주 소박하게 출발했다.

25년 몬트리얼에서 오드리 퍼거슨(Fergus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차 수리공이었다. 노동자/기술공들이 많은 로스몽(Rosemont)에 살면서 다운타운 몬트리얼고교를 다녔다. 14살 때 이튼백화점의 모델로 발탁될 정도로 미모와 체격을 가졌다. 몬트리얼 미술박물관이 경영하는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면서 모델 일을 계속했다. 2차전 중에는 CP철도회사의 전신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패션쇼를 열기도 했다. 45년에는 주식 브로커 크레리 모리스와 결혼, 다음 10여년 간 가사에 몰두했다. 그 후 부유한 손님들을 주고객으로 하는 모간백화점의 패션 ‘코디’로 취직했다. 67년 몬트리얼 엑스포(Expo)는 그녀에겐 큰 기회였다. 전국에서 몰려온 수많은 전시요원들에게 화장술에서부터 매너에 이르기까지 교육하는 일을 맡았다. 외국 전시관의 여성직원들도 그녀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아름답기 위해서는 요염할 필요는 없지만 우아할 필요는 있다.(You don't have to be glamorous to be beautiful, but you do have to be graceful.) 피부관리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모양보다 우선한다”고 그녀는 인터뷰에서 강조했다. 이때쯤 그녀는 자신의 화장품회사를 발족했다. 그녀는 취미로 꿀벌을 기르는 아버지로부터 배워 꿀벌의 밀랍에 꿀과 레몬 등을 섞은 피부미용제를 개발했다. 회사와 학교, 모델 에이전시는 모두 몬트리얼 다운타운의 프라스 보나벤처(Place Bonaventure) 상업/전시 콤프렉스에 두었다. 임대료와 유지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녀는 사람 눈에 잘 띠고 회사의 품격을 높이는 선택한 것이다.

“오드리는 성격이 좋고 매력적이면서도 사업수완이 뛰어났다”고 이튼백화점의 조운 에어드 패션책임자는 회상했다. 에어드는 이튼 패션쇼에 모델을 주문하면 모리스는 무려 12명이라도 즉시 보냈다고 말했다. 모델학교는 교사가 17명이나 됐고 비디오카메라를 이용, 걷는 법, 자세 등을 교습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녀와 함께 일한 사람들은 그녀의 장점은 우아함과 철저한 교육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하게 옷을 입었고 학생들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 “그녀와 같이 일하는 것은 졸업반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았다. 학생들은 그녀가 가르친 모든 것을 마지막 수업인양 기억해야 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최선을 보여주는 한편, 예를 들면 반드시 조화되는 신발을 신어야 했다.”

뉴욕의 패션전문지 보그(Vogue)는 그에 대해서 보도, 그녀 이름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전성기의 학교는 여자모델 40-50명, 남자모델 25명, 아동 60명을 관리했고 학생들은 뉴욕, 런던, 파리까지 파견됐다.

모리스의 최고 학생은 이바나 젤닉코바(Ivana Zelnickova)라는 체코출신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몬트리얼로 이주, 주위의 권고로 모리스의 모델학교 문을 두드렸다. 76년 그녀 밑에서 모델을 시작하자마자 이바나는 스타가 됐다. 그녀는 모델로서 뿐 아니라 일이 되게끔 조직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모리스는 76년 이바나를 몬트리얼 올림픽 프로모션을 위해 뉴욕으로 보냈다. 이것이 이바나의 운명을 바꿨다. 모델들은 고급음식점의 특별실에 초대되었다. 모두 도날드 트럼프라는 남자의 주선 덕분이었다. 이바나는 결국 미국의 부동산 및 호텔/카지노재벌 도널드 트럼프의 부인이 됐다(77-91년). 이바나는 모리스의 죽음에 대해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부(mentor)였다."고 최근 말했다.

한편 모리스의 화장품사업도 계속 번창했다. 83년 남편이 죽자 그녀는 회사를 플로리다주의 팜파노 비치로 옮겼다. 모델학교를 86년 팔아버린 후 화장품업에만 전념했다. 그녀는 동업자인 아들 웨인(Wayne)과 함께 어느 해에는 국제화장품 쇼 16개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직원 25명을 둔 회사는 피부미용제 43개, 화장품 600종류를 생산, 미국, 캐나다 등 20여 개국에 팔았다.

모리스는 평생 운동을 좋아했다. 특히 수영과 스키를 즐겼다. 평생 쉬지 않고 여행을 했다. 작년 80세 땐 남아프리카와 인도를 방문하면서 자사제품을 선전했다.

“그녀가 성공한 것은 중단 없는 노력과 완벽주의를 추구한 때문이다. 그녀는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고 늘 말했다.” 친구들의 말이다.

by 100명 2007. 5. 22. 07:52
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17)
북미의 풍요한 생활 거부한 의사 - 댄 힐맨 (Don Hillman 1922-2006)


아프리카, 아시아 등에서 일생의 중요시기 바쳐
진료, 의대생 양성, 아동건강 증진에 평생 헌신



▲ 94년 아프리카 병원에서 근무하는 댄 힐맨.
몬트리얼 아동병원의 소아과의사 댄 힐맨(Don Hillman)은 69년 어느 날 극도로 흥분해서 집에 도착했다. 아프리카 케냐(Kenya)의 나이로비 대학교에 새 의과대학이 설립되는데 자기가 이 일의 책임자로 이름이 올랐다는 것이다. 역시 소아과의사인 부인 리즈(Liz)는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너무나 소중한 기회군요”라고 맞장구쳤다. 철학이 비슷했던 것이다.

불과 2주 후 힐맨 부부와 12살 미만의 자녀 5명은 보따리를 싸서 지구 반대 편 세계로 가는 길에 올랐다. 케냐, 어떤 나랄까, 애들이 잘 적응할까, 으스스 하기도 했다.

아프리카로 이사한다는 것은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예상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예상하지 못했던 너무 많은 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활수준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부부는 자신들을 달래며 의과대학의 외래진료 체제와 의대생 교육/훈련에 온갖 정력을 쏟았다. 부부는 가정에서의 아이들 건강, 예방의학, 공공보건의 향상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농촌지역의 보건과 교육 기회 제공 등에도 전 교수진이 힘쓰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곳에서 보낸 2년은 그가 세계 어린이의 건강을 위해 시작한 평생에 걸친 운동의 서론이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의과생들을 길러냈다. 학생들은 그를 단순한 교수라기보다 멘토(Mentor:정신적 지도자)로 보기도 했다. 힐맨은 그후 케냐, 우간다, 잠비아, 탄자니아 등의 아프리카, 쿠웨이트 같은 중동, 라오스, 말레이시아, 싱가폴, 파키스탄, 필립핀, 인디아 등의 아시아, 가이아나(남아메리카)에서 도합 35년간을 가르치고 치료했다.

겸손한 성격에 노래부기가 취미인 힐맨은 아프리카에서 6번의 쿠테타를 목격했다. 제일 처음은 71년 우간다에서 독재자가 된 이미 아민의 정변이었다. 여차하면 튈 준비가 필요, 그들은 늘 ‘쿠테타 백(Coup kit)’이라는 주머니를 찼다. 이 안에는 여권과 현찰을 넣어두었다. 우간다에서의 어느 깜깜한 날 밤 힐맨은 빨리 국외로 피신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백인들은 죄가 없어도 생명이 위험했다. 그는 케냐로 들어가는 표시도 없는 국경에서 위험에 직면했다. “우린 통나무를 싣고 비닐로 덮은 트럭 속에 숨어 국경을 겨우 넘었다. 총소리가 우리를 쫓아왔지만 무섭기도 하고 스릴도 있었다”고 부인 리즈는 회상했다.

한번은 깊은 산 길에서 자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댄은 리즈를 차에 두고 혼자서 걸어내려 갔다. “남편은 지나오면서 교회로 보이는 건물을 보았다고 했어요. 멀지 않다는 것이죠. 주위에서는 총소리가 들리는 상황이었죠. 달리 방도가 없어 나는 차에서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는 5시간 만에 돌아왔지만 나는 그도 죽고 나도 죽을 줄 알았어요.” 그들의 자녀들은 다행히 보모가 다른 곳에서 보호해서 무사했다.

댄은 몬트리얼 매길대학교에서 엔지니어 공부를 했고 2차대전 말기에는 캐나다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전장터를 본 그는 전후에 의학으로 전환, 매길대학교를 졸업했고 56년 미국 보스톤에서 소아과의사 자격을 받았다. 3년전 몬트리얼 아동병원에서 만난 리즈도 보스톤에서 소아과를 공부하고 있었다. 리즈에 의하면 댄은 여자 친구가 많았다. 55년11월 리즈가 의대수련생(인턴)으로 있을 때다. 병원측은 학생들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리즈는 돈이 궁했다. “나는 댄에게 60달러만 꿔달라고 했다. 나는 부끄러워 미국인들에게 요청하고 싶지는 않았다.” 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는 “그것은 큰 돈이기 때문에 만나서 얘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나를 만나러 왔고 한 달 후 우리는 몬트리얼에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가정에서나 병원에서나 행복한 생활을 유지했다. 댄은 늘 앞장서 가는 사람이었고 리즈는 잘 조직하고 구성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우습기도 하지만 아주 열심히 일하는 우수한 의사죠. 평생에 어린애들에게 얼굴 찡그런 적이 한번도 없어요.” 이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애들을 함께 잘 돌보았다. 리즈는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 아주 즐거웠다고말했다. 57년 댄은 몬트리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매길대의 교수로, 나중엔 부학장이 됐다. 가정도 직장도 안정적이었고 생활은 풍요로 왔다. 진급 전망도 좋았다. 이때 운명은 좀 더 어려운 일을 하라고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이에 순응한 것이다.

85년 다시 우간다로 가서 매커리어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아동건강센터를 세웠다. 정적을 죽여 인육을 먹었다는 독재자 이디 아민은 6년 전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집권 중 많은 시설과 제도가 망가졌다. 병원시설도 피해가 많았다. 댄은 팔소매를 걷어 부치고 복구작업에 나섰다. 의대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미숙아를 키우는 인큐베이터를 고치기도 하고 랜드 로버 차를 수리하기도 하면서 모범을 보였다.

89년 이 부부는 온타리오 해밀튼의 맥마스터 대학교로 돌아왔으나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해외에서 부르는 소리가 전보다도 높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의사로 평생을 보낸 슈바이처는 아니지만 이들은 라오스, 베트남, 중국, 말레이지아에서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치료보다는 예방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94년에는 오타와대학교로 다시 옮겼으나 그 후 10년간 부부는 파키스탄, 케냐, 가이아나, 인디아등의 프로젝트를 도왔다. 그들은 또한 8개국의 프로젝트를 코치하는등 상담역을 성심성의껏 수행했다. 부부는 똑같이 이 해에 캐나다 국가훈장(Order of Canada)을 받았다.

2005년 이들은 왕립의사협회 회원이 되는 영예를 받았고 이들의 의뢰로 캐나다 의과대학이 아프리카 지역의 아동보건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서 떠났다.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도날드 힐맨: 25년 몬트리얼 출생. 작년 7월 오타와에서 천식 악화로 사망. 향년 81세.

by 100명 2007. 5. 22.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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