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최고의 영화관, 최초의 멀티플렉스
부산의 대표 '부산극장'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1934년 11월 5일. 일본 가부끼좌의 건물양식으로 개관한 부산극장. 일본인 소유의 극장으로 현재의 남포동 5가 부산극장 위치에 일찍이 자리잡았으며 현존하는 부산지역 극장들 중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부산의 극장 역사는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씨의 <부산영화 100년>에는 부산항 시가지도가 나오는데, 그곳에 “행좌”와 “송정좌”가 명기되어 있다. 1903년 지도인지라 개관년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으로 추론하고 있다. 1907년에는 현재의 부평동 지역에 부산좌가 개관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대에는 욱관, 동양좌, 보래관 등이 개관하였으며, 1920년대에는 국제관, 태평관, 유락관, 수좌등의 극장이 개관하였다. 당시, 도심에 있던 부산좌나 보래관 등은 조선인 관객들을 홀대하는 터라 이에 조선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부산진역 주변으로 유락관과 수좌와 같은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동아백화점 자리였던 곳에 소화관(동아극장)이 등장하였고, 이후 부산극장이 지금의 그 위치에 개관을 하게 된다. 1950년대에는 현대극장, 국제극장, 제일극장, 대영극장, 동보극장이 들어서면서 대형 영화관 시대를 열었다. 현대극장은 55년 최신식 영사기와 대형 시네마스코프 화면(2.35대 1)으로 극장가의 대형화, 현대화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1960년대에는 동명극장, 부영극장, 국도극장, 대한극장이 문을 열었다. 1970년대에는 서면, 동래, 영도, 사상 등지로 영화관이 확대되면서 명보, 천보, 동성, 보영, 천일, 구포극장 등이 뒤를 이었다. 1980년대에는 소극장들이 들어서면서 전체 극장수가 62개에 이르렀고 1990년대에는 외국 직배사와 제휴를 한 부산극장의 전성기가 이어지게 된다.

부산지역의 극장가는 2005년 현재 대기업과 개인극장들 간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케 한다.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프리머스와 같은 대기업 체인들은 부산지역에 2-3개씩 극장을 개관하였으며, 오투시네마와 같은 개인극장들도 다른 상권에서 2호 영화관을 개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편, 1934년 개관한 부산극장은 그 오랜 세월만큼이나 여러 극장명으로 그 이름을 달리해와왔다. 1944년 부산영화극장, 1946년 항도극장, 1947년 부산극장, 1947년 도립극장, 1950년 부산극장으로 바뀌면서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편, 부산극장은 6.25 전쟁중에는 임시수도인 부산의 국회의사당으로도 사용되었다.

부산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부산극장'

1972년 12월 30일 서울지역에서 극장사업을 하던 연제흠 대표가 부산극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가 현재 부산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연제민 대표의 선친이었던 것이다. 서울 영등포 지역의 연흥극장과 대구의 한일시네마 그리고 부산의 부산극장이 그의 선친이 소유한 대표적인 극장들이었다. 그 외에도 서울지역에 재개봉관인 서울극장, 뉴서울극장 등이 있었다.

연제민대표는 1982년 선친의 가업을 물려받으면서 그 해 12월 24일 구건물을 철거하고 현대식 건물로 재개관을 하게 된다. 1993년 8월 14일에는 3개관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건물구조를 변경하며 장차 멀티플렉스 시대를 대비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연제민 대표는 이후 부산지역의 부영극장, 대한극장도 인수하며 극장의 세를 확대하였고 마산의 연흥극장과 울산의 태화, 천도극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의 공략으로 인해 남포동 극장가가 예전만큼 활성화되지 못하자 부산극장의 좌석 점유율도 40% 이하로 떨어지게 되었다.

극장경영이 점차 어려워지는 상황속에서 국내 처음으로 부산지역에 극장노조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부산, 삼성, 대한 극장의 극장 노동자 30여명이 부산지역 극장 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처음에는 영사기사 중심으로 결성하려 하였는데 워낙 수가 적어 극장 전체로 확대하였다. 당시 노동조합 위원장이 부산극장의 영사기사인 박상종씨였다.

이렇게 급변하는 경영환경 속에서 2004년 2월에는 부산극장이 경영난으로 폐관한다는 기사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제민 대표는 선친의 가업을 중단해서는 안되며 가능하다면 후대에까지 물려주고 싶은 바람으로 극장을 재개관시키게 된다.동시에 마산의 연흥극장은 폐관을 하고 남부시네마라는 신축건물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려 하고 있다.

부산지역의 극장가 상권은 남포동에서 서면, 해운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고 극장의 범람으로 인해 시장상황은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국제영화제의 PIFF 광장과 자갈치 시장이라는 구경거리, 그리고 현존하는 부산지역 최고의 영화관이자 최초의 멀티플렉스 선도자라는 타이틀은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극장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한국영화의 메카, 지금은 그 터만이
추억과 기록의 현장, 국도극장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13년 황금정 4정목 황금연예관에서 출발해 1999년 을지로 4가에서 허물어진 국도극장
▲ 1913년 황금정 4정목 황금연예관에서 출발해 1999년 을지로 4가에서 허물어진 국도극장

1913년 경성부 황금정 4가 황금연예관으로 출발한 국도극장은 전당포로 돈을 번 일본인 다무라(田村)가 목조 2층 건물로 극장을 시작하였다. 이 극장은 약 1,000여명의 관객을 수용할 정도의 대규모였으며 주로 연예물을 상연하였는데, 일본 ‘닛카스 영화사(日活暎畵史)’의 개봉관이었다.

이후 극장 운영이 활성화되면서 목조를 콘크리트로 바꾸는 건물 개축을 진행하였다. 그러다 1917년 일본인 이찌로에게 세를 주어 동아구락부로 이름을 바꾸었다 다시 황금연예관이라는 원래 이름으로 재운영을 하였다. 조선극장 사장이며 무성영화 <춘향전>을 제작한 하야까와가 1년간 경영하기도 하였다.

그 후 일본 흥행계를 장악하고 있던 요시모도 흥행사가 황금연예관을 인수하여, 1925년에는 경성보창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였으며, 1936년에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건축하여 황금좌로 개관하였다. 당시 황금좌 내부는 양 날개처럼 좌우로 올라가는 계단과 대형 샹들리에와 대리석이 깔린 로비를 설치하였으며 전형적인 르네상스풍의 궁전식 공연장으로 재건축하였다. 당시, 명동의 대표적인 영화관인 명치좌도 같은 해에 개관(1936.10.07)을 하게된다.

1930년대 서울의 극장은 청계천을 경계로 크게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진다. 북촌의 대표적인 극장들은 조선극장, 우미관, 단성사 등이었으며 이 극장들은 한국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극장들이었다. 그리고 남촌의 대표적인 영화관은 황금연예관, 명치좌 등이 있었으며 일본인들을 주로 상대한 극장이었다.

황금연예관의 건축과 설계는 당시 극장건축 전문가였던 다마타(玉田橘治)였고 다마타건축사무소를 메이지마치(明治町 2丁目 25)에 개설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0년대까지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건축사회 경성지부 지부장도 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황금연예관은 1945년 3월경 무대공연을 하다 분장실에서 일어난 화재로 피해를 입게 된다.

1955년 최고의 흥행작인 이규환 감독의<춘향전>
/ 사진제공 한국영상자료원

1946년 5월 16일 김동렬 씨에 의해 신축되어 개관하면서 비로소 ‘국도극장’이란 이름을 갖게 된다. 당시 변사로 유명하였던 성동호씨가 ‘국도극장’의 상임고문을 맡으면서 개관에 큰 힘을 보태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으로 사장 김동렬이 북한에 납북되고 만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잠시 개관하였으나 1.4 후퇴로 다시 문을 닫게 된다.

1954년 4월 24일 미군위안극장으로 사용 중이던 을지로 4가에 위치한 국도극장을 미군이 명도한 뒤 수리 공사를 마무리하여 그 해 5월 14일 오후 5시 국도극장 개관식을 거행한다.
1954년 5월 14일 김해병이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도극장의 화려한 극장사가 시작된다.

1955년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12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 명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흥행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성춘향 역에 조미령, 이몽룡 역에 이민, 방자 역에 전택이, 향단 역에 노경희 등 당대의 인기 배우들이 출연하였고,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대중들의 정서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고전의 따뜻함으로 녹아내렸다. 특히 청순한 이미지의 조미령은 남성 관객들의 애간장을 태웠고, 옥중 장면의 비극적 이미지는 여성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국도극장은 1955년 <춘향전>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한국영화의 중심지로 군림하면서 <피아골>, <애인>, <황혼열차>, <육체의 길>, <흙>, <돌아오지 않는 해병>, <미워도 다시한번>2,3,4편, <8도 강산>,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고교얄개> 등 화려한 국내작품들을 주로 상영하였다.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1968년 한국영화의 대명사였으며, 1970년대 한국영화의 뉴 웨이브로 널리 알려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 그리고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이 상영된 곳도 다름 아닌 국도극장이었다. 1975년 4월 5일 식목일에 개봉한 영화 <삼포 가는 길>은 일주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불운한 작품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국내작품을 상영하고 많은 시민들로부터 추억과 기록을 남겨준 곳이 바로 한국영화의 메카, 국도극장이었던 것이다.

국도극장 터는 2007년 5월경 지상21층 지하4층 규모의 관광
호텔로 신축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후 국도극장은 1999년 10월 폐관하여 86년간의 흥행가도에 마침표를 찍게 된다. 당시 국도극장은 근대문화유산의 대표적인 영화관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건물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게 된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으면 그 건물은 시세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건물을 내놓아야 하는 사적재산 침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에 국도극장은 갑작스럽게 건물이 허물어지고 약 6년간 그 곳의 비석 터만이 국도극장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2005년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인 스카라극장이 허물어지게 된 계기도 이와 유사한 배경 하에 이루어졌다. 문화재청이 스카라극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 예고하면서 건물주가 신속하게 건물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결국 근대문화유산 지정 예고는 건물주에게 신속하게 건물을 헐게 하는 일종의 경보 사이렌이 되고만 것이다. 정부당국의 안일한 대응이 이젠 국내 문화유산을 신속하게 허물어버리는 지름길이 되고 만 것이다. 이에 하루빨리 정부당국은 문화재 보존 기금 등 국내 문화유산을 올바르게 보존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해야 할 것이다

영화계의 백전노장, 그의 선택
[김준기의 극장순례] 서울극장과 곽정환 회장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64년 설립된 (주)합동영화는 서울극장의 모태가 되었다.
▲ 1964년 설립된 (주)합동영화는 서울극장의 모태가 되었다.

곽정환(郭貞煥) 회장. 1930년 평안남도 용강 출생. 1964년 영화제작사 (주)합동영화 설립. 1967년 영화배우 고은아씨와 결혼. 1978년 9월 종로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서울극장으로 상호 변경. 1981년 전국극장연합회 회장. 1992년 서울시극장협회 회장. 현재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의정부에 5개 극장을 소유한 서울시네마타운의 회장. 서울시 극장협회 명예회장.

한국 영화계의 풍운아 곽정환 회장의 삶은 이채롭다. 그는 평안도 이북 출신에 국내 최초의 4성 장군인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의 부관으로 군 생활을 하였다. 이후 1964년 (주)합동영화를 설립하여 영화제작에 뛰어들면서 쏠쏠한 재미를 보다 1967년 당시 방년 22세의 영화배우 고은아씨(본명 이경희)와 무려 15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결혼을 한다. 1978년 그는 세기상사(대한극장 등 소유)의 2번관 극장인 세기극장을 인수하여 극장업에까지 사업영역을 확대시켰다.

70-80년대에는 (주)합동영화를 통해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사람의 아들>, <변강쇠>등 무려 101편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이브의 체험>, <무거운 새>등 4편은 직접 감독으로 나서서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90년대 이후에는 그는 영화제작보다는 극장업과 배급업에 무게 중심을 두면서 영화사업을 전개하였다. 한때 외국 직배사 영화를 기반으로 국내 최강의 배급 실력자로 부상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전국 5개 극장은 직영으로 운영하고 있다.(서울 종로의 서울극장, 부산 자갈치시장의 대영시네마, 대구 중앙로의 중앙시네마, 대전의 아카데미시네마, 의정부의 의정부극장)

이렇듯 곽정환 회장의 영화계 인생은 무려 40여년을 넘어서고 있다. 제작과 배급 그리고 상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분蔘?다루어 본 백전노장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마저 예사롭지 않다. 아무래도 40여년을 넘어서는 곽정환 회장의 영화 인생 최대 승부수는 직배영화 반대투쟁을 둘러싼 암투에서 시작될 것이다.

77세 영화계의 백전노장은끊임없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다.
곽정환 회장은 1988년 9월에 UIP사가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를 개봉하려 했을 때는 시기상조라며 직배반대투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1996년 직배반대투쟁위원장이었던 시나리오작가이자 감독이었던 이일목씨가 검찰에 진실을 공개하면서 직배반대투쟁의 겉과 속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그 내용은 곽정환 회장이 88년 9월 가장 먼저 UIP와 영화수급 계약을 맺어놓고도 겉으로는 직배반대 투쟁에 앞장서는 모순된 행보를 보인 것이었다. 1990년 12월 UIP 직배영화 <사랑과 영혼>이 영화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극장에서 전격 개봉되었던 배경이 뒤늦게서야 밝혀진 것이었다. 결국, 그는 1988-90년에 직배영화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 전선에서 이중 플레이를 한 것이다. 하나는 투쟁의 선봉장으로 나선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 직배사와의 은밀한 거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여느 충무로의 영화제작자이자 극장업자에서 급기야 전국 최대, 최강의 배급업자로 위치가 바뀌면서 한국 영화계의 1인자가 되었다.

1995년 8월 강우석 감독이 (주)강우석 프로덕션을 (주)시네마서비스로 확대 개편했는데 이는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등 흥행성공작을 만들었으나 제작사의 실익은 적었다는 것이 주된 배경이라고 한다. 결국 강우석 감독은 극장 배급과 제작 편수 확대가 대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강우석 감독은 이러한 시도를 함께 할 대상으로 곽정환 회장을 찾아간 것이었다. 이후 강우석 감독은 흥행 영화를 제공하고 곽정환 회장은 전국적인 극장 배급망을 제공하면서 부자(父子)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강우석의 형인 강용석 씨도 곽정환 회장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끈끈한 부자지간의 모습을 보였으며 한때 곽정환 회장의 소유인 대구 중앙시네마의 대표직을 역임한 적이 있다. 현재는 대구 중앙시네마 건너편에 있는 프리머스 아카데미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1996년 영화배급업계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영화계 거물인 (주)합동영화의 곽정환 회장과 (주)태흥영화의 이태원회장이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인들의 탄원서가 연이어 제출되었음에도 1997년에서야 곽정환 회장은 가석방 된다. 그리고, 1997년 4월 곽정환 회장은 시네마서비스에 5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간의 강우석 감독과의 관계는 항상 비공식적인 지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외국 직배사들은 하나, 둘씩 곽정환 회장에게서 독립하면서 직배체제를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 성과는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예정된 수순을 밟는 과정이었다. 이에 곽정환 회장은 한국 영화의 흥행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감각적으로 파악하면서 강우석 감독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충무로 영화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 형성에 나선 다.

곽정환 회장과 강우석 감독의 공식적인 제휴는 1997년 한국영화산업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자본과 기획력이 결합하면서 시네마서비스는 <올가미>, <투캅스3>, <초록물고기>, <넘버3>, <편지>, <인연> 등을 제작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연이어 흥행을 거두게 된다. 1998년에는 IMF로 대기업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곽정환 회장은 시네마서비스와 신씨네를 비롯한 충무로 영화사의 작품 7-8편에 약 2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편, 곽정환 회장은 서울극장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전환시키면서 사업가적인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서울극장이 3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것은 1989년 7월이었다. 아마도 이 시점은 1990년 12월부터 개봉할 직배영화를 위한 선 조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1997년 8월 서울극장은 4개관을 더 증축하게 된다. 총 7개관 멀티플렉스로 변신한 것이다. 강우석의 시네마서비스에 50억을 투자하면서 다양한 한국영화를 수급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증축이 필요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3년 4개관을 더 증축한 것은 종로 3가에 피카디리와 단성사가 재개관하는 시점까지 대비한 것이라 판단된다.

곽정환 회장은 서울극장을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확장시켰다.
외국 직배사를 자신의 손안에 휘어잡고 국내 영화계 최고의 거두로 일어서던 사례와 강우석이라는 야심찬 감독을 선택할 수 있는 판단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멀티플렉스를 확장시키는 모습을 지켜보면 곽정환 회장의 사업가적인 기질과 감각적인 판단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실제 곽정환 회장은 유머와 달변의 소유자이면서도 극장업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논리 치밀한 전략가이기도 하다.

최근 스크린쿼터 논쟁이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스크린쿼터 축소 시 극장업계가 자율적으로 스크린쿼터 지킴이가 되겠다고 주장한 내용이 있다. 물론 시기적으로 정부의 축소방침에 동조하는 모습으로 비춰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극장업계의 주장은 스크린쿼터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은 결국 극장임을 상기시키는 명확한 핵심을 찌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스크린쿼터의 실행은 정부의 법령이나 영화배우의 1인 시위나 시민단체의 압력이나 영진위의 정책이 아닌 극장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 것이다. 이러한 극장업계의 움직임에는 항상 곽정환 회장이 숨겨진 야전의 지휘자로 손꼽혀왔다. 지금은 서울시극장협회의 명예회장으로 한 발짝 물러선 듯 보이지만 국내 영화산업에 대한 감각과 판단은 단연코 으뜸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이 여전히 그를 주목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77세. 곽정환 회장. 영화계의 백전노장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제 영화인들을 위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힘이 되는 지혜와 나눔일 것이다. 2005년 1월 9일. 서울극장 2관(902석)에서 시작된 극장예배는 그 첫걸음으로 보인다. 매달 마지막주 목요일에 열린다는 이 예배는 2006년 현재에도 행해지고 있다.(곽정환 회장과 고은아 대표는 연예인 교회의 장로와 권사이다.) 또한 그는 향후 중구지역에 영화교육기관을 설립하겠다고 한다. 그 시점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실행에 옮겨져 여러 후학들에게 배움의 기회와 소기의 성과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의 영화계 삶도 의미 있는 자욱으로 남게 되지 않을까 판단한다.

음모술수의 달인에서 영화계의 제갈공명까지,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선택일 것이다. 단지, 2류 상영관에 불과하였던 세기극장이 국내 최대 좌석수를 지닌 서울의 대표극장 서울극장이 되기까지, 그 핵심 동인은 바로 그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치열하고 변화무쌍한 한국극장가
[극장순례]메가박스의 야심찬 움직임
이메일보내기김준기 _ 영화평론가
동양그룹은 2000년 5월 13일 아시아 최대 규모 17개 스크린, 4336석의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하였다.
▲ 동양그룹은 2000년 5월 13일 아시아 최대 규모 17개 스크린, 4336석의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하였다.

국내 대기업의 영화관 진출은 삼성, 대우, 현대로부터 시작된다. 삼성영상사업단은 씨넥스(직영), 명보극장 2,4관(임대), 시네코아(임대), 서울극장 1관(임대), 대우영상사업단은 씨네하우스(직영), 대한극장(임대), 스카라(임대), 현대는 씨네플러스(직영), 명보극장(임대)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IMF가 터지면서 대기업들의 영상사업은 모두 철수의 기로에 들어서게 된다.

이후 제일제당, 동양그룹, 롯데쇼핑이 영상산업의 후발주자로 뛰어들게 된다. 당시 동양그룹은 대우가 소유하고 있던 강남의 씨네하우스 극장과 아셈 컨벤션센터에 건립 중이던 멀티플렉스 17개관을 인수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극장산업에 참여하게 된다. (강남의 씨네하우스는 정진우 감독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대우가 인수한 것이다.)

동양그룹의 영화관 사업 진출에 있어서 핵심은 무엇보다도 아셈 컨벤션 센터였다. 씨네하우스는 아마도 대우 측의 끼워 팔기 매물 정도로 이해된다. 당시 아셈 컨벤션 센터의 17개관 설계는 아시아 최대 규모였으며 그 시장성 또한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이에 국내업체로는 제일제당과 동양그룹, 외국업체로는 호이츠 시네마스라는 미국 멀티플렉스 사업자가 입찰에 참여하였으며 1년 이상의 지리한 경쟁 끝에 동양그룹이 운영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제일제당이 이곳을 운영하였다면 CGV의 강남권 입성은 더욱 순조로웠을 것이다.(CGV의 서울강남권 입성은 2006년 압구정점을 개관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강남역점은 2007년 12월경 예정이다.)

이후 동양그룹은 미국의 세계적인 극장 체인인 로우즈 시네플렉스 인터내셔널(LCI)과 2천만 달러씩을 투자해, 2000년 5월 13일 아시아 최대 규모인 17개 스크린, 4336석으로 메가박스 코엑스점을 개관하였다.(LCI는 소니인터내셔널과 유니버설 등이 주요 주주로 미국, 유럽, 캐나다 등의 400여곳 도시에 3천여개의 스크린을 가지고 있는 세계 최대 극장사업자 로우즈 시네플렉스의 자회사이다.)

메가박스 코엑스 점은 개관부터 공격적이고 차별화된 마케팅을 선보였다. 개관행사로 <미션 임파서블 2> 시사회를 가지면서 톰 크루즈와 오우삼을 초대하였다.

2000년 10월 27일 메가박스는 매주 토요일 상영되던 개봉 영화를 금요일로 앞당겨 개봉하기로 하였다. 극장가의 관행을 깨뜨린 것이다. 하지만 타 극장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독단적인 행동이라는 비판이 거세기도 하였다. 하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극장들 간의 서비스 경쟁이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 5일제가 도입되면서 금요일 오후를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을 관행이라는 이유만으로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시장의 파이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근 요일별 앞당기기는 영화사들의 마케팅 전략에 따라 수요일 개봉까지 들어서기도 하였다.

메가박스는 토요일 개봉되던 영화를 금요일에 개봉하고,
입장료 차별화라는 마케팅 전략을 선보였다.

2001년 6월 29일 메가박스는 입장료 차별화라는 마케팅 전략으로 국내 극장가에 신선함을 불러일으켰다. 경쟁극장 입장에서는 관행을 합의 없이 깨트린 터라 무척이나 못마땅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그 관행이라 함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배급사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쉽게 입장료 차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을 얘기하는 것이다. 메가박스는 입장료 차별화를 요일별, 극장별, 좌석별, 시간대별, 영화별로 나누어 진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극장, 좌석, 영화별로의 차별화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만다.

한편 메가박스는 요일별, 시간대별 입장료 차별화를 이루어내면서 주말 황금시간대는 8,000원으로 입장료를 인상하고 조조는 4,000원으로 인하하는 승부수를 던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배급사들도 차례차례 메가박스의 입장료 차별화에 동참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배급사와 영화관이 상호 유리한 방식이 되면서 입장료 차별화가 서울지역 타 극장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지방 극장들은 아직도 입장료 차별화를 진행하고 있지 못하다.

메가박스는 2001년 5월 수원점과 7월 부산 서면점을 각각 2호점과 3호점으로 연이어 개관하였다.

2001년 9월 1일, 동양그룹 영상사업 계열사들이 모그룹의 계열 분리 시책에 따라 ‘오리온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고 모그룹으로 분리됐다. 오리온 그룹은 16개 계열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기존의 제과사업을 하는 ‘동양제과’와 메가박스를 중심으로 하는 ‘미디어플렉스’ 그리고 OCN과 투니버스등 9개 케이블 채널을 운영하는 영상지주회사 ‘온 미디어’로 구성됐다. 금융, 증권 사업을 진행하던 기존 동양그룹과 분리된 오리온 그룹은 영화, 미디어, 유통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2002년에 들어서면서 대구점과 해운대점을 각각 개관하였다. 또한, 오리온 그룹 미디어플렉스가 배급사 ‘쇼박스’를 설립하면서 10월경 영화 <중독>으로 그 첫발을 내딛기도 하였다.

한편, 메가박스는 중, 소도시의 영화관 진출을 위해서 지역극장과 제휴를 맺어 ‘영화관 운영대행’이라는 사업 아이템을 가지고 ‘메가라인’ 이라는 브랜드를 출발시켰다. 메가라인 영화관은 매출의 약 7%라는 운영대행 수수료를 지역 극장주들이 부담하면서 영화배급과 마케팅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입장권 매출의 7% 라는 수수료는 지역 극장주들에게 순 이익의 대부분을 지불하는 부담스러운 비율이서 극장가의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CGV와 롯데시네마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수수료는 매점 매출과 스크린 광고비 그리고 인건비까지 지역극장이 지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부담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12월 26일 메가박스는 서울 논현동의 씨네하우스를 낙후된 시설과 강남지역 극장들의 경쟁구도가 심화됨에 따라 아쉽게도 폐관을 결정짓게 된다.

2007년형 멀티플렉스의 표준을 선보이겠다는 메가박스의
야심찬 움직임이 2006년 4월 메가박스의 서울 목동점 개관
으로 시작했다.
2003년도에는 메가박스는 메가라인에 주력하면서 직영점 오픈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2004년에 들어와 전주점, 울산점을 오픈하기는 하였지만 지역 극장가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CGV와의 경쟁구도에서 점점 밀려나는 처지가 된다.

한편 메가박스는 2005년 6월 1일 이동통신사 중에서 SKT와의 제휴가 해지되면서 CGV와의 경쟁구도에 큰 타격을 입기도 하였다. 영화관의 최대 승부처가 이동통신사와의 제휴가 되어버린 작금의 극장가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에 이동통신사와의 제휴가 혹은 할인이 국내 극장산업을 기형적으로 성장시키는 구조는 하루빨리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특히, 할인요금 2,000원중에서 500원 ~ 1,000원을 극장가에 부담시키는 사례는 이동통신사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처음에는 할인이라는 이유로 시작하였던 이동통신사의 정책이 점점 국내 극장의 분담금으로 넘어가서 이동통신사의 요구에 따라 장단을 맞추어야만 하는 극장가의 현실이 기막힌 노릇이다.
2006년 4월 메가박스의 서울 목동점이 개관하였다. 2007년형 멀티플렉스의 표준을 선보이겠다는 메가박스의 야심찬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연말에는 신촌역사에 또 하나의 메가박스 직영점이 개관될 예정이다. 서울에서의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3파전이 불꽃을 튀길 것으로 예상된다. 후발주자로 시너스, 프리머스 등의 각축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메가박스 코엑스 점의 연간 600만 이상의 관람객 동원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국내 극장가의 마케팅은 세계 최고라고 한다. 영화관 박람회인 씨네아시아와 쇼웨스트 등에서의 국내 극장가의 선전은 그간의 변화무쌍한 국내 극장가의 움직임에 기인한 것이다.

메가박스가 항상 그 변화의 선두에 나서길 기대한다.

70년 역사가 계속되길
[극장순례] 광주의 최초 민족자본 영화관, 광주극장
[김준기 _ 영화평론가]
1950년 광주극장 전경 (자료출처: 박선홍의 『광주 1백년』)
▲ 1950년 광주극장 전경 (자료출처: 박선홍의 『광주 1백년』)

빛고을 광주. 이곳 역시 최초의 영화상영관은 일본인 자본에 의해 시작되었다. 현재 충장로 파레스호텔 자리의 광주좌와 현재 무등극장 자리의 제국관이 바로 일본인 자본의 영화관이었다.

광주좌는 일본인 후지가와 다다요시가 총 공사비 800원으로 1924년 4월에 착공, 1925년 11월 3일 개관을 하였다. 규모는 총 건평 120평의 목조 2층 건물이었으며 정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입장료는 좌석에 따라 요금차이가 있었는데 1층은 20전, 2층은 25전을 받았다. 관람석은 의자가 없는 대신 다다미에 앉아서 보게 되어 있었으며 통로가 될만한 곳에 판자를 깔아 신을 신고 다녔고 관람석은 신을 벗고 들어가게 하였다.

광주좌의 주인 후지가와는 영화나 연극이 새로 들어 오면 개관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일본 가정에 비치된 신을 모셔 놓은 작은 사당인 가미다나에 고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1931년 11월 8일 이 날도 고사를 지내다가 촛불이 넘어져 그만 삽시간에 광주좌가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해 12월 곧바로 가설극장을 지어 '광남관'이란 이름으로 영업을 했지만 별로 성황을 이루지 못 했다.

그 이듬해 일본인 구로세 도요다가 수용인원 6백 74명 규모의 최신시설을 갖춘 제국관(지금의 무등극장 자리)을 세웠는데 이에 따라 ‘광남관’은 폐쇄되고 말았다. 제국관은 일본인 구로세 도요다가 당시 경성의 명동 명치좌 건물의 본을 따서 설립한 것으로 674명의 인원을 수용하였으며 야간에만 문을 열었다. 제국관은 일본영화나 연극흥행을 주로 하였으며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인 도호(東寶)의 전속극장이었다.(박선홍저, 『광주 1백년』, 도서출판 금호문화, 1994)

제국관은 해방 후 일본인 경영자가 물러나면서 이 극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전기섭이 불하를 받아 경영을 하였다. 처음에는 공화극장이라 하였으나 사회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고 하여 동방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후일 경영주가 바뀌면서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여 오늘날의 무등극장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제국관에서 상영되는 일본영화들은 보통 일주일간 지속되었으며 광주좌와 마찬가지로 일본인을 우선적인 관람대상으로 하는 민족차별적인 문화공간인 것이다.

1935년 10월 1일. 광주시 동구 충장로 5가 62번지. 광주 최초의 민족자본에 의해 건립된 영화상영관 광주극장(1,250석 규모)이 개관하였다. 일제 강점기동안 일본인들이 중심이 된 상가는 충장로 1가에서 3가까지 형성된 반면에 조선인들의 상점은 충장로 4, 5가를 중심으로 몰려있었다.

광주극장은 영화상영뿐 아니라 해방 이후 정치적인 집회와
대중연희, 스포츠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광주극장의 창립자 유은 최선진은 전남 담양과 화순등에 토대를 둔 만석꾼이자 광주지역의 경제문화계 유지이다. 이 극장은 자본금 30만엔과 불입자본금 7만 5천엔을 투자하여 1933년에 극장 설립을 신고하였으며 1935년 10월 1일 광주읍이 광주부로 승격하던 날 개관한다.

설립 당시 임원진으로 사장에 최선진, 지배인에 대흥농장의 지배인 조응원, 그리고 법인이사로 김희성, 최준기, 조국현, 유연상, 최동문 등 광주지역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인사들이 이사로 참여하였다.


설립자 최선진은 광주극장 이외에도 1937년에 광주지역 인근의 송정리 극장과 전라북도의 강경극장을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해방이후엔 전남 목포의 평화극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광주극장 개관 훨씬 이전인 1921년에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설립한 유은 재단은 현재의 동성중, 동성여중, 광주여상, 광주상고 등 4개 학교의 모태가 된다.

해방 직후 광주극장은 정치적인 집회와 대중연희의 공간으로 주로 활용되었다. 1945년 8월 17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라남도 위원회 결성과 8월 18일에는 광주청년단 결성이 광주극장에서 이루어진다. 이 외에도 학예회, 졸업식, 음악회, 연극 등 각종 문화교육 및 정치행사에 영화관 공간을 활용하였다. 또한 스포츠 행사도 종종 열렸는데 1948년 일본 미들급 챔피언인 문춘성의 권투 시범경기가 광주극장에서 열렸다.

1950년대 광주지역의 개봉관 극장은 광주극장과 동방극장이 주도하는데, 광주극장은 방화 위주의 상영을, 동방극장은 외화중심의 상영을 하게된다. 광주극장에서 상영된 방화중 흥행에 성공했던 작품은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이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1955년 1월 6일 개봉하여 2개월동안 12만 관객을 동원하였던 작품이며 광주에서는 1월 30일 개봉한다. <춘향전>의 인기가 대단하여 1959년까지도 재개봉관에서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광주극장에서 외화를 상영하기도 하였는데 하루 입장 관객수가 약 2천 9백명에 달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대표적인 외화였다. 당시 일일 2천 9백명이라는 관람객 수는 실로 놀라운 흥행이었다.

한편, 광주극장은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영화가 흥행이 되면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 전통이었다고 한다. 보너스를 지급하던 봉투에는 항상 “만축(滿祝)”이라 쓰여져 있었으며 쉽게 말하자면 관람객 매진을 자축하는 의미로 사용되던 용어이자 봉투인 것으로 판단된다.

광주극장은 상업 영화관과는 차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가입했다.

1970년 12월 11일, 광주극장과 양대산맥이었던 동방극장 자리에 폴 뉴먼 주연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69)를 개관작으로 준비한 무등극장이 들어선다. 이후 광주지역에서 상업적인 위치나 관람객 규모를 고려해 볼 때 광주를 대표하는 영화관은 단연 무등극장을 손꼽게 된다. 특히 무등극장은 지방 영화관의 자본을 모아서 한국 영화 제작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며 더 나아가 전라도와 제주도 지역의 간접배급까지 맡고 있어서 제작, 배급, 상영을 두루 아우르는 실세 극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CGV와 롯데시네마 등의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이 들어서면서 지역 토착 자본의 개인 극장들은 날로 그 위세가 축소되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광주극장은 시내 상권의 변모와 낙후된 시설로 인해 상업 영화관과는 차별적인 위치를 확보하고자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가입한다. 2002년 12월 26일 “예술영화전용상영관”으로 지정받은 광주극장은 예술영화를 1년에 105일 이상 상영하는 조건으로 지원금과 차별적인 예술영화관으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여전히 가로 16m, 세로 9m의 대형 스크린은 광주극장만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현재에도 광주극장은 설립자인 유은 최선진 이후 최동복, 최채석, 그리고 현 사장인 최용선에 이르기까지 4대째 가업으로 극장사업을 하고 있다. 한때는 멀티플렉스로의 변신을 꾀하려 하였지만 관련 법규와의 충돌로 인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술영화관으로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민족자본으로 일구어낸 70년 역사의 광주극장에 많은 지역민들의 관심과 보살핌이 어우러지기를 바래본다. [광주극장 홈페이지]

두 신(申)의 충무로 전성기

신상옥 감독, 신영균 회장과 명보극장

1961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 1961년 1월 28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1957년 8월 25일, 서울 중구 초동 18-5 번지. 명보극장이 개관하였다. 명보극장의 설계는 우리나라 현대 건축의 선구자인 김중업 씨가 맡았다. 2, 3층 규모에 1,498석을 자랑하는 대형 단관 영화관이었다. (당시 가장 큰 좌석수의 영화관은 광화문에 위치한 국제극장의 1,613석이었다.) 그리고 개관영화로는 그레이스 켈리, 빙 크로스비 주연의 1956년도 작품 <상류사회>(High Society)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다.

1961년 신년 초 충무로에서는 국제극장 전속 홍성기 감독과 명보극장 전속 신상옥 감독이 원작 <춘향전>의 영화 제작으로 불꽃튀는 경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1961년 1월 18일 홍성기 감독은 국제극장에서 <춘향전>을 개봉하고 열흘 후인 1월 28일에는 신상옥 감독이 명보극장에서 <성춘향>을 개봉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춘향전>의 여배우 김지미와 <성춘향>의 여배우 최은희의 자존심 건 연기 대결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은 개봉 8 일차인 1월 26일 김수용 감독의 <부부독본>에 밀리면서 간판을 내리게 된다. 홍성기 감독과 김지미의 대 참패였다. 반대로 신상옥 감독은 4월 7일 영화 <번지없는 주막>이 상영될 때까지 3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신필름 왕국’의 신화를 낳는 교두보가 되었다. 1961년 9월 군사정권의 강제적인 정책하에 국내 71개 영화사 통폐합시 단독으로 영화사 설립 신고를 한 유일한 영화사였다.

결국 16개 영화사로 통폐합되었지만 신필름은 단연코 으뜸이었다. 영화 <성춘향>의 흥행 성공은 실로 신상옥 감독의 시대를 여는 분기점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영화 <성춘향>은 국내 최초로 칼라 시네마 스코프를 시도한 작품이었다.

한편 명보극장과 신상옥 감독과의 전속 관계는 1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9년 명보극장은 신상옥 감독의 <자매의 화원>으로 전속 계약을 맺으며, 1960년 <로맨스 빠빠>로 상업적인 안정세를 구가하였으며, 1961년 <성춘향>의 흥행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후 <연산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빨간 마후라>,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등 신상옥 감독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한국 영화의 전성기이자 충무로 일대의 상권을 활성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1994년 명보극장은 명보프라자로 이름을 바꾼 뒤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로 전환했다.

1977년 8월 15일 영화배우 신영균은 명보극장을 인수하여 프란시스 코폴라(Francis Coppola)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1979), 프랭클린 샤프너(Franklin Schaffner) 감독의 <빠삐용>(1973) 등을 상영하였다. 한국 영화로는 이문웅 감독의 <내가 버린 여자>(1978), 하길종 감독의 <속(續) 별들의 고향>(1979), 변장호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 80>(1980)을 상영하여 3년 연속 한국영화 최다관객 동원을 기록하였다.

1987년 명보극장은 미국의 조지 루카스 감독이 개발한 THX 음향 체계를 국내 최초로 도입하여 영화관의 현대화에도 일조하였다. 영사기는 35미리, 70미리를 겸해서 영사할 수 있는 미국제 심플렉스 영사기를 도입하였다.

1994년 명보극장은 명보프라자로 이름을 바꾼 뒤 5개 상영관을 갖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재 출발하였다. 좌석수는 1관 494석, 2관 379석, 3관·4관 각 432석, 5관 304석으로 총 2,041석이다. 극장설계는 1992년 대한민국 건축 대상을 수상하고 <예술의 전당> 설계를 담당했던 김석철씨가 맡았다. 김석철씨는 <명보 프라자>를 1994년 건축대상에 출품, 그 해 최고로 아름다운 건축 대상을 수상하여 실용성과 작품성을 아우르는 평가를 받았다.

2001년 9월부터는 약 3개월에 걸쳐 극장내부의 인테리어 및 좌석간의 간격을 기존 극장보다 넓은 105∼120㎝로 넓히는 공사를 했으며, 상호를 명보극장으로 변경했다. 좌석 간격을 넓힌 탓인지 1관 378석, 2관 304석, 3관 296석, 4관 296석, 5관 291석으로 총 1,565석으로 좌석수는 감소하게 된다.

명보극장의 신영균 회장은 서울대 치대를 나와서 서울 회현동에 <동남치과>를 운영하였던 치과의사였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해 연극 <삼일천하>로 무대 경험을 하였으며 이 연극을 본 조긍하 감독의 권유로 1960년 황순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과부>에 데뷔하게 된다. 그 외에도 강대진 감독의 영화 <마부>와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 <빨간 마후라>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또한 배우 시절 가족들의 생계가 걱정이 되어 시작한 사업이 동시상영관인 금호극장 운영이었다. 그에게서 극장사업의 시작은 금호극장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이 때 벌어들인 자금으로 명보극장 옆에 위치한 명보제과를 인수하였는데 당시 명보제과는 태극당, 뉴욕제과, 풍년제과와 함께 4대 제과점으로 손꼽혔다. 명보제과는 25년간 운영하였으며, 이후 명보극장까지 인수하여 신축 멀티플렉스 건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신영균 회장의 아들인 신언식씨는 현재 신맥이라는 회사의 대표이사인데 대전 이북의 맥도널드 지점을 총괄 관리하고 있다. 명보제과에서 명보극장 그리고 맥도널드까지 그의 사업은 점점 더 다채로와진다.

신영균 회장은 황순원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과부>에 데뷔한다.
한편 그는 15, 16대 국회의원까지 역임하였으며 1999년에는 제주도에 신영영화박물관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서울증권의 지분을 인수하며 경영권 분쟁이라는 기사로 한바탕 떠들썩한 기사거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주방송 20% 지분과 서울방송 5% 지분은 신영균 회장의 방송에 대한 관심을 알게 한다.

현재 명보극장은 대기업 멀티플렉스들의 공세에 밀려 5개관중 2개관을 MTV 측에 임대로 제공하여 3개관 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예전의 명성에 비하면 많이 빛바랜 모습이다. 대한극장, 단성사, 피카디리의 개관으로 명보극장의 입지가 많이 위축된 탓이다. 교통이나 위치등에서 애매하다. 다만 단성사에서 대한극장까지 이어지는 영화의 거리가 조성될수 있다면 명보극장의 부활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신영균 회장은 최근 고 신상옥 감독의 추모행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열정을 불태우던 영화, 영화인들과 함께 어우러졌을 모습이 그려진다.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명보극장과 함께 다시금 꽃 피워지길 기대한다.

아시아의 시네마 로드를 꿈꾼다

[김준기의 극장순례] 연재를 마치며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 부산 최초의 극장 부산극장

한국 영화사에서 역사의 흐름은 대부분 영화 제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배급과 상영은 그야말로 주변부적인 이야기 거리로 취급한다. 하지만 영화산업을 구성하는 제작-배급-상영이라는 세가지 영역의 역사가 그물처럼 촘촘하게 엮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긴 그물의 영화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러한 소명의식을 끝까지 글로써 이어내지 못하는 필자의 죄송함을 먼저 전달하고자 한다. 바쁜 일상이 게으른 일상에 드리워지면서 자연히 극장순례의 원고 쓰기가 힘들어졌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은 남지만 잊혀진 극장들을 인터넷이라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끄집어 올렸다는 점이 작은 보람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극장순례를 연재하면서 여러 극장 관계자 분들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부산극장을 취재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부산극장은 서울 영등포의 연흥극장(현재 폐관)과 대구 한일극장의 대표와 형제지간이며 그 분들의 부친인 연제흠 회장이 서울 수도권과 대구, 부산, 마산, 울산 등 여러 곳의 극장을 가꾸어 놓으셨다. 하지만, 부산극장에서도 필자가 원하는 영화관에 관한 자료는 완벽하게 없었다. 허망한 느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부산극장 관계자는 부산에 있는 한국영화자료연구원에서 부산극장과 부산지역 영화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건넨다.

부산역 인근의 사무실에서 만난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 홍영철 선생님. 그 때 처음 뵙고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찾아 뵙지 못한지라 홍영철 선생님의 개인 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은 없다. 다만 지금까지도 직장생활과 연구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부산지역 영화사를 낱낱이 기록에 남기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이 발간한 <부산영화 100년>은 부산 영화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책에서 부산극장의 희미한 흑백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부산지역 최고의 영화관인 부산극장의 역사가 책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여담으로 이 책을 발행하는데 있어서 부산극장이 스폰서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1957년 9월 28일 광화문 사거리 서남쪽에 약 1800석 규모로 개봉한
국제극장. 제임스 딘 주연의 <쟈이안트>(1956)와 <알렉산더 대왕>
(1957)의 걸개 그림이 개봉박두임을 알리듯 영화관 벽면에 길게 내
걸려 있다.

한국영화자료연구원은 서울 중심의 한국 영화 바라보기에서 지방 중심의 영화사 바라보기를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한국 영화사를 풍성하게 하는 귀중한 지역 영화사 연구임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광주, 전주, 대전, 대구 등 한국영화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지역 영화사 연구도 시급한 과제로 남겨질 것이다.

국제극장은 의외로 허리우드 극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허리우드 극장의 이창무 대표가 서울시극장협회장이면서 최배달의 수제자였다는 이채로운 이력에 호기심을 갖고 찾아간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허리우드 극장은 국제극장 소유였음을 알게 되었고, 국제극장에 관한 50-60년대 흑백사진들을 앨범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재일교포 이강우 회장. 광화문 사거리에 위치한 영화관 1번지 국제극장. 그 건물의 웅장함과 이강우 회장의 세련된 모습은 대중들의 기억 속에 사라진 영화 공간과 역사를 드디어 발견하여 복원할 수 있다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이외에도 중앙극장의 자료를 구하면서 벽산건설의 김인득 회장이 중앙극장을 소유하며 1960년대 극장왕으로 불리워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강우 회장과 김인득 회장. 그들은 1950~1960년대를 주름잡던 한국 영화계의 거물급 인사였지만 대중들의 기억속이나 한국 영화사에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황무지와 같은 1950~1960년대 한국영화산업에 관한 역사 연구도 우리의 과제가 될 것이다.

서울 최고의 영화관인 스카라 극장의 해체는 허망함이라는 표현으로도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역사적 가치로서 영화 공간을 바라보는 행정당국의 뒤늦은 문화재로서의 가치 인정은 그럼에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행정당국의 대처는 너무나 안일하였다. 문화재 지정 공시가 나자마자 건물주는 건물비용을 못 받을 것을 걱정하여 발표 직후 곧바로 건물을 해체한 것이다. 건물이 허물어지자 아무런 대처방안도 없는 행정당국. 차라리 문화재 지정을 하지 말았으면 하는 원망도 앞선다.

해체되기 전의 스카라 극장 모습

스카라 극장을 끝으로 서울지역 단관 영화관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된다. 단성사, 피카디리, 대한극장의 멀티플렉스로의 변신과 해체된 스카라 극장의 빈 자리는 단연코 대기업들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 꿰차고 들어섰다. 이제 극장산업의 주인공은 대기업의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이다.

2005년 1인당 영화관람 횟수는 미국이 4.7회, 한국이 3.0회이다. 미국과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굳이 1인당 영화관람 횟수를 비교하자면 국내 대기업 멀티플렉스의 성장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에 국내 극장 산업의 포화는 개인극장의 소멸과 동시에 2~3년 이후를 바라보아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의외로 국내 영화시장의 파이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작금의 현실을 인정한다면 이제 행해야 할 과제는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의 상업자본을 견제하고 국내 영화시장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영화라는 것이 상품과 예술적인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한 국가의 영상문화는 상품과 예술이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이러하다면 대기업 멀티플렉스 영화관들의 상품적인 속성을 견제하여 예술영화에 대한 마이너 쿼터제 등 일련의 대책이 조심스럽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국내 극장가를 뛰어넘어 우리의 시야를 외부로 돌린다면 향후 국내 극장산업의 화두는 멀티플렉스의 외국 진출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기업 멀티플렉스에게 바라는 한가지 소망이라고 한다면 국내 영화가 아시아의 드넓은 지역을 활개치고 상영될 수 있도록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필자는 그것을 가칭 아시아의 시네마 로드라고 부르고 싶다. 2006년 말 CJ CGV의 중국 진출 등이 아시아 시네마 로드의 중요한 디딤돌이 되기를 꿈꾸고 희망한다.

by 100명 2007. 3. 20.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