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어긋남 없는 타고난 장사꾼 [조인스]
신입사원 연수 때 ‘이게 뭡니까?’ 회사 비판… 휴대전화 세계 1위 ‘특명’
최지성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이코노미스트

▶1977년 삼성물산 입사
85∼91년 삼성반도체 구주법인장
98년 삼성전자 반도체판매사업부 전무
2000년 삼성전자 정보가전총괄 디스플레이사업부 부사장
2003년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DM)총괄 부사장
2004년 삼성전자 DM 총괄 겸 디자인경영센터장
2005년 삼성전자 DM 총괄 겸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 사장
2007년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

지난 16일 발표된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람 중 한 명이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에 임명된 최지성(56) 사장이다. 디지털미디어(DM)총괄을 이끌면서 삼성을 세계 TV 매출·판매 1위에 올려놓은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삼성이 TV부문 1위에 오른 것은 사업에 진출한 지 34년 만이었다.

최 사장은 삼성물산에서 반도체 영업을 담당했고, 삼성전자 DM총괄에 이어 정보통신총괄로 이동하면서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부문을 두루 거친 경영자로 부각됐다. 이기태 부회장이나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과 함께 최 사장도 ‘포스트 윤종용’을 노릴 만한 자리에 올랐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기태 부회장은 선이 굵은 보스형 리더였다. 굵직한 핵심 위주로 현안을 챙기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최 사장은 매우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스타일이라는 게 그와 함께 일했던 DM총괄 쪽의 평가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밀하게 챙기면서도 실수가 없다는 것이다.

(삼성 해외 출장 시 TV제품만 둘러보는 게 아니라 뜬금없이 도자기를 사들고 와서 개발자를 당혹스럽게 한 적도 있다. “도자기 같은 질감과 느낌이 오는 제품을 개발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최 사장은 언뜻 보면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어 한없이 선량하게만 보인다. 이런 외모만 보고 부드러운 리더십을 예상하면 한참 빗나간 것이다.

‘딸깍발이’ 청년시절=최 사장은 1951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춘천중학교를 졸업한 뒤 춘천고를 1년 정도 다니다가 서울로 가기 위해 다시 서울고 시험을 봤다. 고교 시절 별명은 ‘딸깍발이’였다. 꼬장꼬장한 자존심 하나로 사는 가난한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고집도 세고 매사에 잘 따지고 드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1971년 서울대 무역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딸깍발이의 눈에 박정희 독재정권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교련 반대 시위를 하며 거리로 내달렸다.

삼성그룹 신입사원 때도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77년 경기도 용인의 삼성그룹 연수원 대강당. 4주 간의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 ‘새내기’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었다. 번쩍 손을 들고 일어선 한 사원의 발언에 강당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솔직히 말해 삼성의 신입사원 교육에 실망했습니다. 경쟁 그룹인 현대에선 정주영 회장까지 직접 나와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한다는데, 우리는 이게 뭡니까?”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그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신입사원 교육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갔다. 이 당돌한 청년이 30년 뒤 삼성전자 정보통신총괄 사장에 오른 최 사장이다.

‘유럽의 보부상’으로 뜨다=삼성물산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80년대 중반 반도체 해외영업을 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룹 비서실에서 신규 사업을 검토하는 업무를 하던 중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문)으로 발령이 났다. (엔지니어가 아닌 비전문가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반도체 기술자들이 읽는 1000쪽짜리 교재를 달달 외우고 다녔다.)

8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1인 지사장’으로 나갔다. 외국에서 ‘삼성’ 이나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막막한 시절이었다. 64KD램을 팔기 위해 전화번호부에서 ‘전자’와 ‘PC’라는 상호만 나오면 무조건 찾아갔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유럽 곳곳으로 ‘무박 2일’ 출장도 많이 떠났다. 밤길에 알프스산맥을 넘기도 했다.

(‘유럽의 보부상(褓負商)’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최 사장은 유럽 진출 첫해인 85년 혼자서 100만 달러어치의 반도체를 팔았다.) 86년 500만 달러, 87년 2500만 달러, 88년 1억2500만 달러어치를 팔아 해마다 500%씩 판매를 늘렸다. 91년 귀국한 그는 삼성전자 관리팀장에 올랐다. 영업맨 출신으론 최초였다.

장사꾼 최지성의 경영 스타일=최 사장을 아는 이들은 그를 ‘타고난 장사꾼’이라고 평한다. (그가 부르짖고 주문(呪文)을 외우면 현실이 된다. 그는 지난해 업계 최초로 100억 달러 이상의 TV를 팔겠다고 했다. 그는 디지털 기술이 가전산업을 부활시키고 있다며 ‘디지털 르네상스’라는 말을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목표를 달성했다.)

DM총괄 사장 시절 한 해 100일 이상을 해외로 다녔다. 삼성물산 시절부터 정확한 일 솜씨와 절도 있는 생활 덕분에 ‘독일병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출장 일정을 짤 때도 그는 남달랐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서 최 사장은 자신의 전형적인 남미 출장 일정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일요일 인천 출발→같은 날 저녁 뉴욕 도착, 주재원들과 저녁→다음날 오전 사무실에서 업무보고→점심 먹고 상점 시찰→오후에 마이애미행 비행기 탑승→공항 도착 즉시 식당으로 직행, 주재원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업무보고→새벽 1시 비행기 탑승→새벽 4시 반 브라질 마나우스 도착→샤워 후 오전 7시 조찬→오전 8시30분부터 현지 공장 현황 보고 및 현장 시찰→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4시간30분 걸리는 상파울루로 이동→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칠레 산티아고·페루 리마·콜롬비아 보고타 등에서 하루씩 체류하며 비슷한 일정 소화→멕시코 멕시코시티에 저녁 도착→다음날 아침 티후아나로 이동해 공장 방문→오후 차량을 이용,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로 옮겨 주재원과 저녁→밤 10시 LA 공항으로 이동해 다음날 0시50분 귀국편 탑승→다음날 인천공항 도착’.

총 9박10일의 숨가쁜 일정이 사내에 알려지면서 최지성(CHOI GEE-SUNG) 사장의 이니셜을 따 ‘GS루트’라는 이름의 ‘표준적인’ 남미 출장 일정표가 생겼다고 한다.

‘보르도 휴대전화’ 나올까=애니콜 성공신화를 만든 정보통신총괄은 요즘 여건이 썩 좋지는 않다. 노키아와 모토로라의 저가폰 공세와 소니에릭슨의 고가폰 시장 잠식 탓이다. 게다가 애플까지 뛰어들고 중국 업체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휴대전화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 소니에릭슨의 약진은 눈길을 끈다. 소니에릭슨의 선전은 뮤직폰과 카메라폰 등 고가 프리미엄 시장에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휴대전화 3200만 대를 판매했지만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7% 감소했다. 매출은 4조6500억원. 달러로 계산하면 45억9000만 달러다. 삼성전자 측은 “소니가 해외법인의 매출을 포함한 것과 달리 우리는 본사(국내) 매출만 발표하고 있어 실제로는 삼성전자가 소니에릭슨보다 여전히 매출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니에릭슨의 평균단가가 약 188달러인데 반해 삼성전자의 평균단가가 176달러라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고가 시장에서 소니에릭슨이 더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삼성 휴대전화 사령탑을 맡은 최지성 사장이 저가폰이나 디자인 면에서 애니콜의 전략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주목된다. 평판TV 히트작인 ‘보르도 TV’ 같은 제품이 휴대전화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 최 사장이 이번에도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을 겸임하기로 해 애플의 ‘아이폰’처럼 파격적인 디자인을 내놓을 것이라는 성급한 관측이 벌써 나오고 있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마케팅”이라고 말하는 최 사장은 스스로 장돌뱅이라고 칭할 정도로 마케팅을 강조한다. 최 사장 특유의 마케팅과 디자인 감각이 TV처럼 삼성 휴대전화를 세계 1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by 100명 2007. 1. 29. 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