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가을,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뱀이 나오는 소동이 벌어졌다. 미국의 거대영화사인 유니버설과 파라마운트가 합작한 배급전문회사(직배사) 유아이피(UIP)가 당시 국내에 영화를 직접 배급하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생존이 어렵다는 위기감에 빠진 영화인들이 극장에 뱀을 푸는 극단적 대응까지 들고나왔던 것이다. 우리 사회와 영화계에 ‘직배’라는 낱말은 유아이피와 뱀이라는 두개의 단어가 오버랩되면서 대중들에게 각인됐다.
그렇게 격렬한 반대 속에 들어와 20년 가까이 탄탄하게 유지되어오던 미국 영화사 직배체제가 최근 일대 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시장 상황에 따라 미국 영화 메이저들의 이합집산 구도가 바뀌었다. 또 국내 파트너들인 배급사들의 협력관계도 변화면서 직배 구조가 새 판으로 짜이고 있는 것이다.
메이저들의 이합집산-UIP 한국에서 퇴장 헐리우드 직배사 시대는 1988년 유아이피가 들어와 <위험한 정사>를 개봉하면서 열렸다. 이어 1993년 디즈니(현재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까지 5개 직배사가 자리잡았다. 그러나 올해부터 이 구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우선 유니버설과 파라마운트 합작 직배사 유아이피(UIP)코리아는 지난 12월31일로 해체됐다. 유니버설 영화를 직배하는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UPI)가 1일 설립됐고, 파라마운트 영화들은 씨제이엔터테인먼트가 2월부터 독점으로 배급한다. 직배사 가운데 한국 시장에서 점유율 4위와 5위였던 소니픽쳐스릴리징코리아와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는 지난달 합병해 1일부터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라는 법인명으로 공동 배급에 나섰다.
이런 변화는 거대 메이저회사 본사들의 이합집산 구도가 바뀐 결과다. 1981년 유아이피를 만든 유니버설과 파라마운트 두 영화사는 영국, 호주, 프랑스 등 큰 시장에서 각자 길을 가기로 하고, 스칸디나비아, 남아시아, 멕시코와 브라질을 뺀 라틴아메리카 등 시장 규모가 비교적 작은 곳에서는 유아이피를 그대로 유지하며 계속 공동배급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비교적 큰 나라에서 경쟁체제로 돌아간 것은 이들 시장의 파이가 커졌기 때문이다. 또한 각 나라들에서 만드는 영화를 배급하는 경쟁도 치열해진 것도 이유로 주요 미국 언론들은 보고 있다.
반면 브에나비스타와 소니는 해외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멕시코, 브라질, 말레이시아 등 15개 나라에서 협력 관계를 맺었다. 시장이 작은 나라에서 공동 배급하면 각각 새 망을 만드는 것보다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몸집을 불려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서다.
한국 영화 강세 속 공조 대 경쟁 전략 파라마운트가 한국에서 새 지사를 만들지 않고 씨제이엔터테인먼트와 손을 잡은 까닭은 뭘까? 우선 씨제이엔터테인먼트가 창업 주주로 참여해 아시아지역 독점 배급권을 따낸 영화사 ‘드림웍스’를 지난해 파라마운트가 사들이면서 협력 관계를 다진 것이 주된 이유로 볼 수 있다. 또 파라마운트로서는 한국 영화 시장 점유율 선두이자 극장 체인까지 계열사로 연결돼 있는 씨지브이엔터테인먼트를 통하는 것이 배급에 유리해진다. 씨제이엔터테인먼트는 해외 진출할 때를 대비해 미리 협력 기반을 다진다는 전략이다.
소니와 브에나비스타 한국지사가 합병한 데는 한국 대형 배급사들에 맞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위기감이 한몫했다. 배급사의 힘은 상영 영화 라인업과 극장에서 나오는데 씨제이엔터테인먼트나 쇼박스와 달리 직배사는 극장이 없으니 합병으로 라인업을 늘리려는 것이다. 소니 관계자는 “해마다 점유율이 줄어가는데 마케팅비용은 늘고 있다”고 합병 배경을 설명했다. 이 둘은 함께 올해 <캐리비안의 해적 3> <스파이더맨 3> 등을 배급한다. 한 배급사 임원은 “한국 영화 점유율이 훨씬 높은 상태가 굳어질 전망이라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한국 영화 제작·배급사와 손잡지 않은 직배사들도 한국 영화 배급·제작 등을 고민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한국 영화 시장규모가 1989년 800억원대에서 지난해 1조300억원 규모로 커진 것으로 추산한다. 총관객수는 1996년 4220만명에서 지난해 1억6000여명으로 4배 늘었다. 반면 직배사 수입액은 523억원(1996년)에서 1190억원으로 2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01년 외화 점유율을 추월한 뒤 2006년엔 61.2%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1~11월 서울 관객을 기준으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산출한 배급사별 시장점유율을 보면 씨제이엔터테인먼트가(24.3%)로 1위이며 쇼박스(19.2%)가 뒤를 이었다. 이에 비해 유아이피는 7.4%, 브에나비스타 5.8%, 소니는 4.8%에 그쳤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