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계 세대교체 … 제2의 전성기 구가"
김진국차장
freebird@
'스크린쿼터 축소' 제도적 대책마련 시급
마시멜로처럼 부드러우면서 증기기관차와 같은 추진력을 가진 사람.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 김동호(70) 부산국제영화제(PIFF) 집행위원장이 8일 인천사람들을 만났다.
새얼문화재단이 이날 오전 파라다이스호텔인천 카지노홀에서 개최한 '제247회 새얼아침대화'에서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와 한국의 영상산업'이란 주제 강연을 통해 한국 영상산업이 발전해온 과정과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고의 세계적 영화제로 설 수 있었던 동력을 한 시간여 얘기했다. 강연이 끝난 뒤 그를 만났다. 강연내용과 인터뷰한 내용을 함께 게재한다.
"지난 11월5일자 LA타임스에 한국의 영화시장이 1970년 대 뉴아메리칸 시네마 시대와 유사하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1970년은 마틴 스콜세즈와 같은 거장이 나오며 영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였죠."
그는 한국영화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며 최근 영화 '타짜'의 700만 돌파, '괴물'1천300만 명, '왕의 남자' 1천230만 명 등의 수치를 열거했다. 하지만 수년 전만해도 한국영화시장의 현실은 지금과 큰 차이가 있었다.
"한국영화는 1993년 '서편제'를 106만 명이 보면서 최다 관객을 모았다고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이 때 한국영화점유율은 15.9%였지요. 이후 조금씩 늘어나다가 1999년 '쉬리'가 6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한국 영화는 급속도로 성장, 지난해엔 57%의 점유율을 기록했지요."
김 집행위원장은 "자국 영화가 50%를 넘는 것은 수입을 엄격히 제한하는 중국과 인도 정도 밖에 없다"며 "정부의 전폭지원을 받는 프랑스의 경우 30~40%에 그치고 있고 독일, 영국, 이태리의 경우도 10~20%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한국영화가 발전하고 있는 것은 영화계 세대교체, 정부지원이 동력이 됐다.
"10년 전 제가 해외영화제에 다닐 때만 해도 영화계 사람들은 저와 비슷한 나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20~30대가 많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야 40대 후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해외에서 영화공부를 한 사람들이 대거 영화계로 진출해 세대교체를 이룬 것입니다. 이와 함께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5년 간 1천500억 원을 지원했고 영화진흥공사를 위원회로 승격했으며 심의를 등급분류제로 바꾸는 바람에 소재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도 큰 힘이 됐지요."
제작자본의 다양화, 배급체제의 변화, 멀티플렉스 극장의 등장도 한국영화의 물결을 바꾼 에너지였다.
"과거엔 6개의 지방배급업자가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영화를 배급했습니다. 그러나 92년 대우와 삼성이 투자에 나서고, 95년 케이블 티비가 본격화하면서 대기업의 투자가 시작됐지요. 지금은 KT와 같은 이동통신사까지 영화투자에 참여하는 등 제작자본이 엄청 다양해졌습니다. 기획만 좋으면 쉽게 제작자를 구할 수 있게 된거죠. 배급체제 역시 과거 미국 UIP나 CIC와 같은 메이저 배급사가 독점했지만 98년 이후 우리 나라 대기업이 배급에 뛰어들면서 지난해 영화 배급의 1, 2위를 CJ엔터테인먼트나 쇼박스와 같은 우리 나라 배급사가 1, 2위를 기록하고 콜롬비아, UIP 등 외국배급사는 3, 4위에 머물렀습니다. 인천 CGV의 경우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입을 올리는 멀티플렉스 극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의 등장도 한국영화산업 발전에 일조를 했습니다."
이쯤에서 김 집행위원장은 본격적인 부산국제영화제 얘기를 꺼냈다. 한국영화의 양적·질적 성장 배경엔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었음을 그는 강조했다.
"부산영화제는 부산의 젊은 교수 3명이 처음 시작한 것입니다. 93년 제가 영화진흥공사에 몸 담을 때였습니다. 이태리에서 열리는 '페사로'란 영화제가 있었는데 그 때 아드리아노 집행위원장이 한국에 와서 30편의 영화를 골라 상영했고 이때 이용관, 김지섭, 전양준 교수를 초청했습니다.(이들은 현재 부산영화제 스탭들이다.) 영화제에 다녀온 이들은 2년 뒤인 95년 영화제를 만들자고 결의했고 놀고 있던 나를 끌어들여 96년 제1회 영화제를 개최했습니다."
제1회 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영화제엔 전국 20만 명의 관객이 몰려드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85년 생긴 도쿄영화제, 우리 보다 20년 앞서 생긴 홍콩영화제를 제치고 아시아 최고영화제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없을 리 없다. 그가 말하는 부산영화제의 성공비결 네 가지.
"부산영화제는 우리 나라 최초의 국제영화제입니다. 영화제에선 '돈이 되는' 영화보다는 작품성이 있는 다양한 영화를 상영합니다. 따라서 할리우드 영화에 오염됐던 관객들에게 유럽과 아시아의 저예산 영화들을 보여줌으로써 신선함을 안겨줄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영화를 선정하는 프로그래밍이 중요합니다. 부산영화제는 따라서 아시아의 새로운 감독과 영화를 찾아내려 노력했고 제3회 때부터는 부산프로모션플랜(PPP)를 창안했습니다. PPP는 제작비에 허덕이는 제작자와 투자자를 연결시켜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부산영화제는 PPP를 통해 베니스영화제 대상, 베를린영화제 2위 수상 등 혁혁한 성과를 거뒀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개막작인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Three Times' 역시 PPP예산으로 만든 영화로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라인업되기도 했다. 아시아의 영화를 고르려면 부산에 가야 한다, 부산에 영화를 가져가면 반드시 뜬다는 인식이 아시아는 물론, 세계 영화인들의 뇌리에 박히게 된 것은 이런 부단한 노력 때문이다. 이쯤되다보니 각계 사람들이 부산영화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부산시와 많은 기업이 전폭적 지원을 해줍니다. 3회때 부터는 정부지원도 받게 됐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25억~30억 원의 스폰서가 있어야 제대로 치를 수 있습니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없다. 부산영화제의 성공비결 가운데 하나가 전문성과 자율성 독립성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와 행정에서 독립해 철저하게 법인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얘기다.
"1회때부터 장관님이 오건 누가 오건 간에 축사와 같은 것은 절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부산시장 역시 개막선언외에는 연설을 할 수 없습니다."
부산영화제는 한마디로 '영화인들의, 영화인들에 의한, 영화인들을 위한' 잔치인 셈이다. 김 위원장 역시 자신은 스폰서를 구하고 외압을 막거나 국제적인 네트워크 형성에만 관여하고 일을 한다. 영화상영작 선정은 철저하게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부산영화제는 부산에서 어떤 의미일까. 부산영화제는 부산이라는 브랜드를 높여놓은 것은 물론 지역경제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는 반드시 지역에 기여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 따른 것이다.
"2000년 부산영상위원회 출범은 부산을 촬영도시로 탈바꿈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부산에선 촬영뒤 청소까지 지원할 정도로 원스톱서비스를 제공합니다. 그 결과 한국영화의 40%가 부산에서 촬영되고 있고 그러다보니 스튜디오가 2개, 기자재회사, 엑스트라 지원회사가 설립됐지요. 영화전문고등학교가 2개교 생겼고 6개의 대학이 영화관련학과를 신설했습니다."
부산영화제의 전진은 지금도 계속된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 버금가는 부산영상센터를 설립중입니다. 세계의 최고 건축가 7명 가운데 한 명이 선정돼 센터를 짓고 있는데 현재 486억 원의 예산만 확보한 상황입니다. 제대로 지으려면 1천200억 원이 있어야 하므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2012년이면 영진위 건물이 부산으로 옵니다. 남양주 종합촬영소 제2촬영지도 부산에 지어질 예정이지요."
부산이 이처럼 잘하고 있고, 한국영상산업이 괄목할만하게 성장했지만 스크린쿼터(한국영화의무상영일수) 축소가 한창 상승하고 있는 한국영화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당장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위험합니다. 정부와 영화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졸업 뒤 문화공보부 문화국장과 영화진흥공사 예술의전당 사장직을 역임했다. 또 문화부 차관과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등 문화분야에서 주요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 부산국제영화제 탄생과 함께 지금까지 집행위원장을 맡으면서 국내 은관문화훈장은 물론, 프랑스예술문학훈장 기사장을 받을 정도로 문화적이고 국제적인 인물이다.
by 100명 2006. 11. 9. 07: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