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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효심 상징 ‘첫 왕릉 터’ 어쩌나…
[동아일보]
화성 사도세자릉 인근 택지지구서 재실-정자각 터 등 발굴돼 논란
“아버지보다 낮은 곳에 첫 무덤 정해”
전문가들 “사적지 지정 종합관리를”
주공은 난색 “시설별 별도보존 방침”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상징하는 정조의 첫 왕릉 시설 터(봉분 터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정자각 및 재실 터)가 발견되면서 이를 사적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정자각 터와 재실 터는 대한주택공사가 아파트단지 건설을 추진 중인 택지개발지구(태안3지구)에 속해 있어 보존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터가 발견된 곳은 경기 화성시의 사적 206호 융릉과 건릉 인근. 이곳엔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융릉)와 아들 정조(건릉)가 나란히 묻혀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정조(1752∼1800)가 처음 묻힌 곳은 현재의 건릉(융릉 서쪽)이 아니라 융릉 동쪽의 한 구릉이었다. 이곳은 지대가 낮은 데다 습하고 좁아 왕을 모실 자리가 아니라는 우려가 많았다. 정조는 왜 애초 건릉을 마다하고 상서롭지 못한 구릉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전문가들은 아버지 곁에 묻히되 아버지보다 낮은 자리에 있으려는 아들의 효심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한다. 이곳에 묻혔던 정조의 시신은 1821년 정조의 비 효의왕후가 죽은 뒤 현 건릉으로 이장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사실은 잊혔고 첫 왕릉 터의 정확한 위치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융·건릉 사적 밖 동남쪽에서 재실 터가 발굴됐으며 이 터는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재실의 평면 배치를 간략하게 그린 ‘재실간가도(齋室間架圖)’와 일치했다.
재실 터에서 서북쪽으로 400여 m 떨어진 곳에서 정자각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무덤으로 가는 큰 길인 신도(神道)에 사용된 전돌들도 발견됐다. 이 터는 정조의 첫 무덤으로 추정되는 융릉 동쪽의 커다란 구덩이에서 남쪽으로 100여 m 떨어져 있다.
조선 왕릉은 봉분과 정자각(봉분에서 100여 m 떨어져 있음), 재실(정자각에서 남쪽으로 300∼400m 떨어져 있음)로 구성되기 때문에 정조의 첫 왕릉 시설 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이남규(고고학) 한신대 교수는 “이 터들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인 만큼 사적으로 일괄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최근 이곳을 실사한 한영우(한국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도 “재실 터만으로도 정조의 첫 왕릉 시설이 확인된 셈”이라며 “봉분 추정 터를 발굴해 이를 확증하고 사적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정자각 터가 발굴이 중단된 채 흙으로 덮였으며 정자각 터와 재실 터가 주공의 택지개발지구에 속해버렸다는 점이다. 경기문화연대와 경기도는 개발지구 전체 약 115만7000m²(35만여 평)를 ‘효(孝) 테마역사문화권’으로 공원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주공은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주공은 최근 정부 관계 기관 회의에서 개발지구 북쪽(49만6000m²·15만여 평)을 ‘효 테마공원’으로 하고 개발지구 남쪽의 재실 터는 체육공원(9만9000m²·3만여 평)에 포함시켜 별도 보존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영우 위원장은 “왕릉을 구성하는 무덤 정자각 재실이 따로 분리된 ‘점’ 단위 문화재가 아니어서 왕릉 관련 시설은 함께 보존할 때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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