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반영한 한국 영화 일대기-영화에 우리의 어제와 오늘이 있다 ①

기사입력 2008-06-17 12:06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타임머신을 탄 듯 우리의 과거와 만나게 하며, 거울처럼 현재를 마주하게 한다. 새삼스레 밑줄 쫙 그으며 머리 쥐나게 우리 역사를 공부하자는 말은 아니다. 딱딱하게 정치적 이데올로기, 애국주의, 프로파간다로서의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적 순간들이 우리 영화에 재구성되었고, 현재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사고들도 언젠가 미래의 영화에 반영될지 모른다. 고조선 시대부터 200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만 년의 유구한 한반도 역사를 요모조모 담은 우리 영화를 연대기 순으로 모아봤다.

● BC. 2333년 고조선 건국

사실 고조선이 어느 지역에 위치했는가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학설이 분분하다. 다만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조선은 단군왕검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만큼이나 고조선의 건국 신화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이 있었던 터라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그리 흔치가 않다. 최근 개봉한 <가루지기>는 원래 조선시대가 배경이며 서민들 사이에 유포된 음담패설을 영화한 것이지만 단군신화의 극히 일부분이 상상과 함께 엮여 있다. 웅녀가 등장하는 것. 단군신화는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세상을 다스리던 중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웅녀와 혼인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단군왕검이 되었다고 전한다.

<가루지기>에는 제 짝을 찾지 못한 웅녀가 오랫동안 동굴에 칩거한 채 분노해 나라에 가뭄이 들고 그녀를 달래줄 능력을 소유한 단 한 사람인 변강쇠가 나서게 되는 부분이 있다. 신화에서 웅녀는 100일간 동굴에서 인내한 끝에 여자의 몸이 되지만 혼인해 주는 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해 웅녀와 혼인을 한다. 사실 <가루지기>는 코믹 에로라는 장르 안에서 웅녀를 매우 희화화하고 있지만, 그 모티프는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영윤 기자

고조선 단군신화의 웅녀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가루지기>(2008). 사실 <가루지기>에서의 웅녀는 코믹 에로라는 장르 안에서 역사나 신화와는 매우 다르게 희화화돼 있다.


● AD. 918년 고려 건국

1970년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한 <태조 왕건>은 고려의 건국 과정을 스크린에 재현했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가 술과 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만 가고 이에 변방을 지키던 왕건이 백성의 뜻에 따라 대군을 거느리고 입성해 고려를 건국하게 되는 것.


고려 사회는 군현민과 부곡민, 양인과 천민 같은 차별 구조가 존재하면서도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고 함께 제사를 받드는, 남녀가 평등하던 사회였다. 종교적으로는 불교, 유교와 더불어 도교와 풍수지리설도 독자적인 역할을 한 다양성이 존중되던 사회였으며, 사대의 예를 갖추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황제국 체제를 취한 자주적인 국가였다. 하지만 1231년 몽고의 침략 후 고려는 100여 년간 중국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와 현재 촬영 중인 유하 감독의 <쌍화점>은 바로 이 시기,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던 고려 말을 배경으로 한다. 왕권과 권문세족에 결탁한 불교의 폐단이 극에 달하고, 황후장상의 씨가 본디 따로 있느냐며 노비가 난을 일으키는 등 기층민의 반발이 이어진 시대.

<쌍화점>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려왕(주진모)과 왕이 총애하는 호위무사 홍림(조인성)을 수장으로 한 36인의 미소년 친위부대인 건룡위, 그리고 원나라 출신의 아름다운 왕비(송지효)를 둘러싼 사랑과 배신을 그리게 될 예정이다. 제목인 ‘쌍화점’은 원래 연악을 즐겼던 충렬왕 시대(1236~1308)에 지어진 다소 음탕한 내용의 노래로 전해지고 있는데, <쌍화점>이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한편 <무사>는 실제 <고려사>에 기록된 대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진 후 소식이 끊긴 무사들의 흔적을 따라간다. 고려 우왕 1년, 서력 1375년. 당시 중국은 원과 명의 정권이 교체되던 혼란기였다. 고려의 무사들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졌다가 간첩 혐의를 받고 머나먼 귀양길에 오른다. 조선시대와 더불어 우리 역사의 중세 사회에 해당하는 고려는 918년 건국해 1392년 멸망까지 475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지속했다.

안영윤 기자

고려 말,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진 무사들, 김성수 감독의 <무사>(2001)는 고려로 돌아가기 위해 황량한 중국 대륙을 처절하게 이동했을 고려 무사들의 흔적을 좇는 한편 노비 신분인 여솔(정우성)을 통해 고려의 신분계급을 엿볼 수 있으며,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청와대 경호실이라 할 만한 용호군과 군역의 의무를 진 상비군이라 할 수 있는 주진군 등 고려의 군사 체계를 만날 수도 있다.

●1392년 고려 멸망, 조선 건국

시작은 창대했다. 그러나 그 왕조의 끝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치욕과 눈물로 얼룩지게 되었다. 519년에 걸친 조선왕조의 역사는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그럴싸한 배경을 이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큼 파란만장했다.

일찍이 최인현 감독은 1965년 신영균 김지미를 주연으로 조선의 건국이야기를 담은 <태조 이성계>를 완성했고, 신상옥 감독은 <성춘향> <연산군>(1951), <폭군연산>(1962), <대원군>(1968), <이조여인잔혹사>(1969), <효녀심청> <장화홍련전> <궁녀>(1972) 등 조선시대를 비춘 수많은 사극을 남겼다.

김유진 감독의 <신기전>(2008)은 세종의 비밀 병기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 (2005)는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광대를 조명했고, <청풍명월>(2002)은 1923년 인조반정으로 황폐해진 조선, 비운의 두 검객 이야기를 전한다.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1999)이나 김미정 감독의 <궁녀>(2007)는 숙종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고,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음란서생>(2005)은 18세기(정조 시대로 추정)를 배경으로 연애와 사랑, 색에 관한 이색적인 이야기를 창조했다. 이인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원한 제국>(1995)은 정조(안성기)와 노론의 이념 대립과 세력 다툼을 스릴 있게 그리고, <혈의 누>(2005)는 19세기 말엽, 벌어진 살인사건을 과학적 수사 방법으로 흥미롭게 엮어나간다.

한편 <취화선>(2001)은 실존 화가 장승업(1843~1897)을 비추고, <이재수의 난>(1999)은 제주민란을, (YMCA 야구단)(2002)은 1905년 ‘황성 YMCA 야구단’을 역사적 근거로 삼았다. 시나브로 암울한 기운이 감돌던 조선왕조는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끝으로 그 이듬해 일본에 합병됐고, 이 역사적 사건은 <도마 안중근>(2004) 등에 기록되었다. 안영윤 기자

<신기전>(2008)은 세종 30년, 1448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제목 '신기전'은 100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던 세계 최초의 로켓포이자 세종이 대륙을 견제하기 위해 진행한 비밀울 프로잭트다.

<왕의 남자>(2005).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을 아픔을 가진 인물로 재탄생시켰고, 요부로 통하던 연산의 애첩 녹수는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조정에서 갖은 멸시를 받았지만 왕에게 사랑받기 원했던 비운의 여자로 그려진다. 또한 <연산군일기>에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라고 감히 왕을 꾸짖었다가 참형을 당한 인물로 기록된 천민 신분의 광대 공길은 이준기가 연기하며 동성애적 아름다움을 발휘하는 인물이 되었다.

<궁녀>(2007). 조선 숙종시대 궁을 배경으로 궁녀의 의문스런 죽음을 공포 영화 장르로 풀었다. 장희빈이 낳은 세자 균(훗날 경종)의 출생을 둘러싼 야사를 소재 삼았다.

<이재수의 난>(1999). 1901년 제주도에서 실제 일어난 천주교인과 주민들 간의 충돌 사건을 다뤘다. 평민 교인들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한 후 치욕스러워 자살하는 양반, 가족까지 몰상 당한 천주교인 등 참담한 역사가 펼쳐진다.

(YMCA 야구단)(2002). 서당을 운영하는 선비, 야구라는 신문물에 호기심을 갖는 서당집 아들, 을사조약 체결로 자결한 신여성의 아버지 등 1905년 YMCA에서 조직한 한국 최초의 야구단 이야기를 암울한 역사와 함께 흥미롭게 그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쏜 독립투사 안중근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도마 안중근> (2004).


● 1910년 일제 강점기 및 1945년 8·15 광복

굳이 말해 무엇 하랴. 이 시기는 핍박과 설움, 고난과 수난의 암울한 시대였다. 1920년대 상하이를 무대로 한 <아나키스트>(2000)는 일체 치하의 격동기에 젊음을 바친 다섯 남자를 이야기한다. 항일 비밀 결사대인 의열단의 역사적 사실이 영화의 바탕이 되었다.

<청연>(2005)은 일제의 한인 차별과 여성 차별을 극복하고 조선의 여류 비행사가 된 박경원의 삶을 다룬다. 박경원보다 먼저 비행기 조종사가 됐고 독립운동에 앞장선 권기옥(1901~1988)의 이야기가 알려지며 일본 비행사로 활동한 그녀의 삶을 다뤄 친일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청연>은 1920~30년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이인수 감독은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정준 김보경이 주연한 <창공으로>(2006)는 1920년대 조국 독립을 위해 미국에서 전투비행사의 길을 선택한 한인 최초의 비행사들에 대한 역사적 실화를 다뤘고, 안재모 주연의 (2005)에서는 미 정부에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수차례 경고하며 조국의 설움을 알린 이중첩보원 한길수를 조명했다.

암울한 이 시기가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매력적인 시대로 유쾌하게 그려진 것은 2007년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라듸오 데이즈>부터였을 것이다. 2008년 하반기 개봉을 앞둔 <모던보이> 역시 1930년대 경성이 배경이지만 우울한 기운보다는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시대를 뒤로 한 채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낭만과 로맨스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모던보이’가 주인공인 것.

상류 1퍼센트에 속하는 부유층이자 조선총독부 서기관으로 근무하는 이해명(박해일)은 댄서로 등장한 조난실(김혜수)에게 첫눈에 반해 꿈같은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해명에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정지우 감독은 <모던보이>를 통해 개인의 행복이 시대의 운명과 무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안영윤 기자

<아나키스트>(2000).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 베이징에서 조직된 후 주로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 비밀 결사체인 의열단의 활동에 근거한 역사 드라마. 의열단의 활동 상황은 역사적 저서와 일본에서 비밀해체된 문건 등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청연>(2005). 대구의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난 박경원은 비행사의 꿈을 안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비행사 자격증을 따며 뛰어난 비행 실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1933년 조선을 거쳐 만주로 가는 장거리 비행에 나섰다가 사망했다.

<라듸오 데이즈>(2007). 1930년대 조선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코믹 드라마. 시대는 암울하지만 인물들의 의상은 밝고 로맨틱하며, ‘귀차니즘’ 한량 PD, 만능 소리효과맨, 사고뭉치 재즈가수 등 유쾌하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1937년 경성을 배경으로 한 <모던보이>(2008)는 전통사상과 서구문명이 충돌하며 신문물이 유입되던 낯설고도 매력적인 이 시대를 유쾌하게 그리면서도 시대와 무관하지 않게 담을 예정이다.

(2005).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미 정부에 수차례 경고하며 한국의 상황을 알렸던 한길수. 그의 이야기는 2002년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고, 이를 연출했던 이인수 감독은 그 후 2년, 그의 화려한 첩보 활동을 영화로 완성했다.

1945년 해방 전후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 <원스 어폰 어 타임> (2007). 모습을 감춘 채 활동하는 독립군들의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만나 코믹 액션 영화로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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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100명 2008. 6. 17. 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