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벼락 때문에 한국 영화 망칠라
투자자들, 스크린 채우기 위해 다작 요구 … 시설·전문인력 부족, 흥행 부담 ‘이중고’

대기업들이 스크린 수 우위 확보 경쟁에 나서 제작과 배급까지 겸하면서 영화사들이 대기업에 종속되는 현상이 날로 심화되고 있다.

커리지필름의 최용기 대표는 “60편 제작되던 시절에는 투자자가 나름대로 옥석을 구분했지만, 100편을 만드는 상황에선 이런 판단이 필요하지 않다. 전에 문제가 있어 유보됐던 작품들이 갑자기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정된 영화 제작 인력이 쪼개져 영화를 만들면 품질 저하는 필연적이고, 그 결과는 수익률 저하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영화계에서는 IMF 이후 대기업들이 철수하면서 영화 편수가 한 해 50편 미만으로 줄고, 대신 프리 프로덕션이 철저해지면서 대부분의 영화가 중간급 흥행 성적을 거두었던 것을 현 상황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다 ‘쉬리’가 터졌고, 최초로 영상펀드가 다수 생겨나면서 부실한 기획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삼성영상사업단 출신으로 투자, 제작, 매니지먼트사를 겸한 영화사 노비스를 세운 노종윤 대표는 “예전 대기업 자본이 콘텐츠에서 승부를 보려 했다면, 지금 극장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은 유통사업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위험 부담이 있는 콘텐츠를 만들 이유가 없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 관계자들이 부정적인 시각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부분 관계자들은 한국 영화 제작 붐을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신인 감독과 경험이 짧은 스태프가 대거 참여하면 영화의 질이 떨어질 위험이 커지는 만큼 새 인력이 발굴되고 실습 기회가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 투자자가 영화의 흥행 가능성을 판단할 능력이 없거나 편수만 채워주길 바라는 입장이라는 점을 활용(?)해 실험과 도전이 이뤄지기도 한다. 출연료가 비싼 스타 대신 연기력을 갖춘 배우를 기용하고 스타일이 강한 감독에게 연출을 맡김으로써 상업성은 떨어지지만 참신한 영화가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투자자이면서 기획자였던 삼성, 대우 같은 대기업이 얄미울 정도로 깔끔한 상업영화들을 만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는 편수 채우기용의 ‘부수효과’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해서 올해 ‘사랑을 놓치다’ ‘온 더 로드 투’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모두들, 괜찮아요’ ‘가족의 탄생’ ‘구타유발자들’처럼 흥행은 저조해도 의미 있는 한국 영화들이 나올 수 있었고, ‘달콤 살벌한 연인’이나 ‘짝패’처럼 뜻밖의 흥행작이 나와 영화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만든 MK버팔로의 심보경 이사는 “올해 상반기에 나온 작품만으로 제작 상황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엔 무리다. 한국 영화의 수익성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관객을 찾아나가는 계기도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극장 수입에 75% 의존 ‘허약 체질’

한국 영화계는 ‘쉬리’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등 새로운 흥행 신화가 만들어질 때마다 돈벼락을 맞았고, 이는 마구잡이식 기획을 낳았다. 그 결과 대부분 후속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고, 관객과 외부 자본이 급속히 빠져나가는 일을 겪었다. 영화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 숙련된 영화 인력이 영화계를 떠나고, 이때 영화 제작의 경험과 노하우도 함께 사라지게 되는 공황 상태가 발생한다.

한 영화인은 “지난해 말 영화계에 돈이 쏟아져 들어올 때 또 ‘빙하기’가 왔음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이긴 하지만, 한국 영화계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영화의 흥행 타율은 높으면서도 한 편의 흥행에 영화계 전체의 운명이 휘둘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by 100명 2006. 7. 4. 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