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너머에서 생긴 일 <목구멍 깊숙이>의 진실
[필름 2.0 2006-01-20 18:20]

1972년 개봉한 하드 코어 포르노 <목구멍 깊숙이>는 의도치 않게 미국 사회의 문화와 정치, 이데올로기의 격전장이 됐다. 30여 년이 흘러 <목구멍 깊숙이>에 관한 모든 것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가 공개되면서 다시 한번 이 전설적인 포르노에 대한 관심이 불붙고 있다.

1972년 6월 12일, 뉴욕 맨해튼 49번가에서 모종의 포르노가 개봉했다. <목구멍 깊숙이 Deep Throat>라는 제목만 봐서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극장에 간 이들은 깜짝 놀랐다. 구강 성교가 이토록 적나라하게 클로즈업된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게다가 주연 배우 린다 러브레이스는 엄청난 젖가슴을 인공적으로 흔들어대던 여타의 성인물 배우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까지 성인물에 출연한 적 없는 듯 수줍게 연기하는 모습, 그리고 건강한 자연스러움이 넘치는 미소는 예쁜 이웃집 소녀를 엿보는 듯한 판타지를 불러일으켰다. <목구멍 깊숙이>는 단숨에 입 소문의 위력을 발휘했다. 이 2만5천 달러짜리 포르노는 상영 첫 주 주말 수익으로만 이미 3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70년대 내내 미국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스캔들, <목구멍 깊숙이>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미국 포르노의 역사

<목구멍 깊숙이>라는 하드코어 포르노영화가 불러일으킨 반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상황을 알아야 한다. 영화평론가 리처드 콜린스가 2005년 '타임'지에 쓴 '그 오래된 느낌: 포르노가 시크했던 시절 That Old Feeling: When Porno Was Chic'은 미국 포르노의 역사를 매끈하게 일별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다. 리처드 콜린스는 기본적으로 70년대를 ‘포르노가 사람들을 자극시킬 수 있었던 시절’이자 ‘포르노(로 대표되는 문화적 환경)가 더 대담했고, 더 기이했으며, 훨씬 더 좋았던 시절’로 규정한다. 시작은 1959년 B급 영화의 제왕 러스 메이어의 소프트 코어 히트작 <부도덕한 티즈 씨>부터였다. 그리고 다른 한 켠에서는 남자들끼리의 모임에서 은밀하게 유통되던 스태그 필름(stag film)이 존재했다. 가면을 쓴 배우들이 20분가량 실시간 섹스를 벌이는, 일종의 다큐멘터리 같은 무성 푸티지들이 그것이었다. 미국에서 첫 번째로 공개 상영된 ‘포르노’도 다큐멘터리였다. 필리스와 에버하트 크론하우젠의 다큐멘터리 <사랑에 이르는 자유>(1969)는 일종의 킨제이 보고서였지만, 감독 존 워터스의 회상을 들어보자. “그 작품은 ‘진지한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에 불법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성기 삽입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앤디 워홀이 통조림 캔으로 진지한 예술을, <에드 설리반 쇼>에 출연한 비틀즈가 리듬 앤 블루스를 끝장냈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메인 스트림 영화들과 아트 하우스 영화들도 본격적으로 섹시해졌다. 잉마르 베리만의 <침묵>(1963)이나 데니스 호퍼의 <이지 라이더>(1969), 존 술레진저의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 등 줄줄이 X등급을 받은 영화들은 사회적인 이슈와 섹스를 결합시켰다. 두상 마카베예프의 <WR: 유기체의 신비>(1971)나 스탠 브래키지, 브루스 코너 등의 섹슈얼한 아방가르드영화 역시 평론가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으며 대학교, 뉴욕현대미술관, 각종 시네 클럽에서 상영되었다. 당시 포르노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시도했던 영화평론가 브랜든 질은 “우리 집에서 5분만 걸어가면 20개에 달하는 포르노 극장들이 있다. 이런 기대치 않은 관용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목구멍 깊숙이>, 관능적인 골칫거리

1959년에 잉태된 씨앗은 그렇게 무르익어 1971년에는 극장에 본격적인 하드코어 포르노 장편이 걸리게 됐다. <모나>와 <스쿨 걸>은 70년대라는 ‘시크한 포르노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선구자였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익명과 가명의 보호막 아래 개봉했기 때문에 별다르게 큰 주목을 끌지 않았다. 1972년, 드디어 <목구멍 깊숙이>가 등장했다. 원래 미용사였던 제라드 다미아노는 미용실을 가득 채웠던 중산층 여성들의 수다를 엿들으며 남편에게서 별다른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그녀들의 불행을 동정했고 마치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가 된 기분으로 여성들의 세계를 탐구했다. 잉마르 베리만을 비롯한 유럽영화들에 심취했던 그는 마침내 필생의 꿈이었던 영화, 그것도 여성의 성적 만족에 관한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마피아 세력으로부터 2만5천 달러의 돈을 투자받은 그는 생짜 신인배우 린다 보어만을 우연히 알게 됐다. 망나니 남편 척 트레이너의 손에 이끌려 성인물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린다는 출연료로 옷 가게라도 낼 생각이었다. 척은 다미아노에게 린다의 특별한 섹스 테크닉을 자랑했고, 그녀가 실연해 보인 구강 성교 능력에 감명받은(?) 다미아노는 <의사, 왕진가다> 혹은 <검을 삼키는 여자> 등의 제목으로 구상 중이던 이야기를 전면 바꾸었다. 린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영화, 그러니까 클리토리스가 성기가 아니라 목구멍 깊숙이 달린 여성의 섹스 체험기에 관한 영화였다. 제목은 <목구멍 깊숙이>였다. 어설프게 급조한 스탭들조차 이 말도 안 되는 내용에 경악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다미아노는 린다 러브레이스로 개명한 여배우에게 1,200달러의 개런티를 지불한 뒤 단 6일 동안 이 영화를 촬영했다.

<목구멍 깊숙이>는 분명 조악하기 짝이 없는 포르노다. B급영화도 이렇게 엉성한 B급영화가 없다. 린다는 최선을 다해 대사를 읊지만 교과서를 읽는 수준이고, 클리토리스가 목구멍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는 린다에게 의사가 위로랍시고 건네는 대사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잖아?”다. 게다가 엔딩은 연인과의 섹스가 끝난 다음 지극히 만족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말하자면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 한 사람에게 정착하는 지극히 보수적인 멜로드라마의 결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구멍 깊숙이>에는 기묘한 활기가 존재한다. B급영화 풍의 황당무계한 코미디와 적나라한 섹스 신이 결합되며 상상하지 못했던 활력이 더해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섹스, 그중에서도 구강 성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포한다. 그전까지 구강 성교는 여성에게 굴욕감을 안겨주는, 쌍방 교류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남성에게만 서비스하는 일종의 ‘불법’ 섹스로 여겨졌다. 그러나 <목구멍 깊숙이>는 믿거나 말거나 구강 성교가 여성에게도 오르가슴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며, 남성의 쾌락만큼 여성의 쾌락도 중요하다는 것을 되풀이 강조했다. 미키 앤 실비아의 히트곡 'Love Is Strange'처럼 시대 분위기를 잘 살린 경쾌한 사운드트랙이 한층 흥을 돋우는 가운데, 섹스를 은밀하게 숨기고 즐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모두의 대화 주제로, 거리낌 없이 토로하고 해결해나가야 하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노출시켰다. 말하자면 <목구멍 깊숙이>는 60년대 ‘사랑의 여름’ 산물이었다. 70년대가 보수 반동으로 돌변하기 이전, 아직까지 그 뜨거운 기억이 남아 있던 시절의 산물 말이다.

권력의 암투

<인사이드 딥 스로트>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 전까지 포르노 극장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들이 되도록 멀찍이 떨어져 앉아 홀로 영화를 즐기는 음침한 장소였다. 그러나 <목구멍 깊숙이>는 달랐다. 커플들이 대낮에 당당히 입장하여 폭소를 터뜨리며 영화를 관람했다. “세 블록 넘게 줄을 섰다고요.”(래리 플린트, '허슬러' 발행인) “완전 말장난이죠. 그래도 미국인들은 그 말장난에 영혼을 팔아넘겼어요.”(노먼 메일러, 작가) “이 영화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더러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내 자유죠.”(이름 모를 할머니) 유명인들이 앞 다투어 극장을 찾았고, 자니 카슨이나 밥 호프 같은 코미디언들이 전미 지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 쇼에서 <목구멍 깊숙이>에 관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반면 엄격한 원칙주의자와 도덕주의자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랜디 바바토와 펜튼 베일리의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딥 스로트>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지점도 바로 <목구멍 깊숙이>를 둘러싼 뜨거운 공방전이다. FBI 요원 빌 켈리, 판사 조엘 타일러, 그리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음란한 영화가 전 미국을 들썩거리게 하는 현상을 위험한 징후로 간주했다. “이건 반드시 잘라내 버려야 할 목구멍이다. 즉시 수술을 시행해야 한다.”(조엘 타일러) 경찰이 상영관을 기습했고, 제작과 배급에 관련된 117명이 기소되었으며, 23개 주에서 상영 금지 처분을 내렸다. <목구멍 깊숙이>의 괴짜 의사를 연기한 해리 림스는 ‘연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5년형을 선고받은’ 전무후무한 재판을 받았다. 마약보다 음란한 영화가 더 위험하다고 모두들 소리 높였다. 흥미롭게도 닉슨 대통령의 하야를 불러온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워싱턴 포스트'의 칼 번스타인과 봅 우드워드에게 제공한 내부 고발자의 닉네임 역시 ‘딥 스로트’였다. 결국 리처드 닉슨에게나, 70년대 미국에게나 ‘딥 스로트’는 여러 가지로 골칫덩어리일 수밖에 없었다.

포르노 산업이야말로 돈벌이가 되는 신천지임을 깨달은 마피아들도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애당초 <목구멍 깊숙이> 제작비를 범죄 조직으로부터 구했던 감독 다미아노는 영화가 예상을 뛰어넘은 수익을 올리자 어떤 남자들이 찾아와 영화의 배급권을 빼앗았다고 회상한다. 벌써 3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늙어버린 다미아노는 한사코 그 남자들의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다. 표면적으로 <목구멍 깊숙이>가 벌어들인 수익은 총 6억 달러였지만 범죄 조직으로 은밀하게 흘러들어간 돈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배급에 관여했던 익명의 마피아는 “우리도 총 얼마가 있는지 몰라요. 세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냥 무게로 달죠”라고 자랑했다. 이는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정작 다미아노와 린다 러브레이스에게는 어마어마한 수익의 조금치도 돌아가지 않았음을 명시한다.

한편 70년대에 단연 두각을 나타낸 페미니즘은 포르노를 자신들의 싸움지로 삼았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던 린다 러브레이스가 그들에 가담했고, 심지어 유명한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함께 토크 쇼에 출연해 <목구멍 깊숙이>에 관한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녀는 당시의 남편 척 트레이너의 상습적 폭력과, 포르노를 찍을 당시의 강간당하는 듯한 느낌 등을 폭로했다. 그러나 2002년 자동차 사고로 죽기 전, 가난을 견디다 못한 린다는 51세의 나이로 다시 한 번 세미 누드 사진을 찍으며 컴백했다. 그러니까 린다 러브레이스라는 개인의 삶에, 그리고 <목구멍 깊숙이> 한 편에 70~80년대 미국 사회의 모순과 혼란, 변화의 양상이 집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목구멍 깊숙이>를 둘러싼 다양한 관점들의 흐름은 닉슨 이후 지미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조지 부시에 이르는 미국 사회의 변천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구멍 깊숙이, 더 깊숙이

물론 <목구멍 깊숙이>를 비롯한 여타의 포르노 산업에 필연적으로 따라붙은 폭력과 범죄, 성적 착취의 현실까지 묵인할 순 없다. 그러나 <인사이드 딥 스로트>와 거기 출연한 이들이 무언으로 합의하는 바는, 포르노 한 편이 사회적, 문화적 함의를 표상한 채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영향력을 가질 수 있던 시대, 그리고 공권력이 폭력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거꾸로 변화의 양상을 드러내 보여 주었던 시대가 이미 갔다는 것이다. 2006년, 지금은 TV에서 재닛 잭슨의 가슴이 그대로 노출되더라도 아무렇지 않고, 어린아이가 인터넷으로 성인물 사이트에 접속해 밤새 음란물 동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다.

여기에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나 마이클 윈터바텀의 <24시간 파티 피플> 비슷한 정서가 존재한다. 과거는 혼란스럽고 더럽고 죄책감 서린 시절이었으나, 돌이켜 보았을 때 그 시절에는 적어도 꿈틀거리며 달라지고 싶어 했던 변화의 기운이 엿보였다는 그리운 정서 말이다. 우리의 현재는 얼마나 노골적이고 뻔뻔한 동시에 아무것도 감각할 수 없는 시대인가. 다미아노는 카메라 뒤편의 바바토와 베일리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당신들도 그때 직접 봤어야 했어. 얼마나 짜릿했는지 몰라. 나한테 카메라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뻤던지!” <목구멍 깊숙이>의 프로듀서는 수줍게 고백한다. “영화를 찍을 때만큼은 우리 모두 고다르라는 기분이었어요.” 공포영화의 거장 웨스 크레이븐 역시 엷은 미소를 지으며 회상한다. “포르노와 영화 사이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뭔지 말할 순 없지만, 나도 하나 찍었어요.(웃음) 영화를 찍는 것 자체가 반항으로 간주되던 시기였고,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모두 그랬어요.” 생각해 보면 1975년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조스>가, 1977년에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가 개봉했다. 영화는 더 이상 자기 표현의 예술적 수단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며 거대 산업으로 변화할 준비를 마쳤다. 포르노도 더 이상 필름이 아닌 비디오 시장과 인터넷 시장으로 숨어들었다.

1972년, <목구멍 깊숙이>의 엔딩 자막은 “And Deep Throat to You All"이었다. 그리고 30년 뒤에 등장하여 과연 우리에게 각자의 ‘딥 스로트’가 있었는지를 경쾌하게 질문하는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이제는 가버린 ‘시크한 포르노의 시대’를 향한 고별사이자, 포르노 한 편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던 시절에 대한 흥미진진한 보고서다.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돈다.

70년대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포르노

짐과 아티 미첼 형제의 1972년 작 <녹색 문 뒤에서>는 환각적인 아방가르드-포르노에 가깝다. 당시 아이보리 비누 모델로 활동하던 마릴린 챔버스가 기꺼이 집단 섹스의 쾌락에 온몸을 맡김으로써 엄청난 센세이션을 몰고 왔다. 경악한 아이보리 비누사에서 서둘러 그녀가 광고한 제품을 회수했지만, ‘순도 99%의 순수 미인’으로 불렸던 마릴린은 포르노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여주인공으로 군림하며 스타가 되었다. 극도의 클로즈업과 슬로 모션의 활용, 빼어난 음악과 시각 효과, 별다른 대사 없이 사이키델릭한 이미지만으로 내러티브를 끌고 가는 기법. <녹색 문 뒤에서>는 <목구멍 깊숙이>만큼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오진 않았으나 미첼 형제의 예술적 야심을 충분히 활용한, 포르노 역사상 가장 기묘한 포르노 중 한 편으로 꼽힌다.
김용언 기자

by 100명 2006. 1. 20. 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