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깨끗하게, 더 아름답게 e충무로 시대 개막 2
[필름 2.0 2005-09-22 18:50]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한국영화 제작 과정을 뿌리부터 바꿔놓고 있다. 디지털 색보정, CG, 3D 동영상 콘티, 디지털 사운드 레코딩 등 디지털의 마력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한국영화 제작 현장의 변화를 추적한다.

'잘못 찍은 필름 수선, 어두운 화면 밝게, 어긋난 콘트라스트 맞춰 드립니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디지털 현상소들이 광고 전단지를 만든다면 필경 이런 식의 문구가 들어갈 것이다. '디지털 색보정'이라고 알려진 디지털 인터미디어트(Digital Intermediate, 이하 'DI')를 위시한 다양한 디지털 프로덕션 공정이 한국영화의 시각 혁명을 가져 올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영화인들은 이제 거의 없다. DI와 CG, 3D 동영상 콘티, 디지털 사운드 레코딩 등 디지털 관련 테크놀로지는 한국영화 제작의 전 과정을 아우르며 그 놀라운 능력을 증명하고 있다. 디지털 프로덕션이라 함은 통상 후반 작업 기간 중에 이루어지는 DI와 CG, 촬영 단계에 속하는 현장 편집, 현장 녹음 작업, 여기에 최근 몇몇 영화에서 시도해 효과를 본 3D 동영상 콘티를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힘을 빌어 제작 과정의 효율성 증진과 완성도 향상을 꾀하는 작업들을 통칭하는 것이다. 효율성과 완성도 향상이라는 1차적인 공헌 외에도 디지털 프로덕션은 디지털 매체 환경에 적응하려는 한국영화의 체질 개선과도 관련이 깊다. 각 공정이 긴밀하게 연동돼 한편으로, 한국영화의 시청각 혁명을 주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임박한 D시네마 시대를 예비는 사려 깊은 영화 운동인 셈이다.

난 움직이는 그림만 믿는다

봉준호 감독(<플란다스의 개> <살인의추억>)은 신작 <괴물>에서 예전에 없던 모험적인 시도들을 계획하고 있다. 광명천지, 한강변에 출몰하는 괴물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는 이 영화는 상상력 속에만 머물고 있는 괴물의 비주얼을 구체화하기 위해 손에 잡힐 듯 움직이는 그림이 필요했다. 봉준호 감독은 <청연>의 3D 동영상 콘티를 만들었던 디지털 필름 스튜디오 '인사이트 비주얼'에 3D 동영상 콘티를 의뢰했다. 인사인트 비주얼이 만든 테스트 콘티를 본 봉 감독은 몇 장면의 3D 콘티 작업을 결정했다. 괴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사용된 3D 콘티는 총 24컷 정도다. <괴물> 외에도 그동안 <태극기 휘날리며> <아라한 장풍대작전> <여고괴담 4: 목소리>(이하 <목소리>) <남극일기> <청연> 등이 부분 또는 전체적으로 3D 콘티를 활용한 작품들이다.

3D 콘티는 '시나리오상에 활자로 표현된 내용을 3차원 공간에 움직이는 영상으로 시각화 하는 것'이다. <종이 콘티가 2차원 평면에 정지된 그림으로 간단한 촬영 정보를 담는 수준에 그쳤다면 3D 콘티는 입체 공간에서 인물의 동선, 카메라의 움직임, 장비 세팅 등을 일목요연하게 계획할 수 있는 일종의 '사전 시각화(previsual) 작업이다. 인사이트 비주얼 강종익 대표는 "사전 시각화 작업으로서 3D 콘티는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디테일한 촬영의 거개를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는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최근 영화들에서 사전 시각화가 더 요구되는 이유는 복잡한 촬영의 메커니즘이나 현장에서 즉흥성을 발휘하기 힘든 고난도 촬영, 또는 CG나 특수 효과팀과 사전 조율이 필요한 장면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 장르의 다변화와도 맞물리는 문제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카메라 이동이 많거나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가상의 장면들을 논의해야 할 때, 불확실한 종이 콘티나 말에 의지하기보다 선명하게 보이는 동영상으로 사전 시각화를 해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3D 콘티 작업을 했던 스탭들은 한결같이 "시간과 비용 절감은 물론, 영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입을 모은다.

<목소리>를 올 3D 콘티로 작업한 dna(digital & animatiom) 김승식 아트워크 팀장은 "사전 계획이 필요한 복잡한 장면의 경우, 시퀀스 단위 아이디어를 내고 스탭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은 동영상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김승식 팀장은 처음에는 밑그림 콘티를 그리다가 "머릿속에 있는 그림이 평면 위에 도저히 그려지지 않아" 3D 콘티로 방향을 선회한 경우다. 종이 콘티와의 가장 큰 차이는 스탭들간 장면 연출의 이해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수 효과나 CG, 액션 연출이 많아 어떤 그림이 나올지 예측하기 힘든 장면,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난이도 높은 장면에서 카메라 움직임, 조명, 배우 동선, 세트 설계까지 미리 설정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3D 콘티는 "미리 영화를 한 번 찍어보는 작업"에 비유되기도 한다. <목소리>에서 종이가 날아가 영언의 목에 꽂히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CG를 통해 완성될 때까지 결과를 알 수 없었던 이 장면은 3D 콘티로 만든 동영상을 보고 촬영 계획이 세워지고 사전 공유 작업이 이루어진 경우다.

<목소리>를 연출한 최익환 감독은 "3D 콘티를 활용하면 카메라 움직임이나 타이밍을 잡을 때 훨씬 디테일한 약속이 가능하다. 스테디캠 기사나 촬영감독에게 복잡한 카메라 워킹을 요구할 때 한나절 설명할 걸 수십 초짜리 3D 콘티 하나로 해결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3D 콘티의 제일 원칙은 '촬영 가능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좋은 계획도 찍을 수 없게 짠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김승식 팀장은 "3D 콘티를 만드는 동안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가 입체적인 시공간을 통해 실체화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밑그림을 그리되 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다. 3D 콘티 작업이 보편화된 할리우드에서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차원에서 콘티를 만들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은 정교한 3D 콘티를 만들어 편집은 물론, 더빙까지 해본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거의 애니메이션 한 편을 만들 공력을 쏟아붓는 셈이다. <스타워즈 에피소드3-시즈의 복수>(이하 <시즈의 복수>)를 찍을 때 조지 루카스는 3D 콘티를 교과서로 사용했다. 루카스는 "더 이상 종이 콘티를 그리지 않고 있어도 보지 않는다. 난 움직이는 그림만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 촬영현장에서 시간은 곧 돈이다. 정교한 3D 콘티로 사전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 놓으면 최소 30% 이상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게 3D 콘티를 경험한 스탭들의 증언이다. 그렇지만 사전 계획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모든 영화에 3D 콘티를 쓸 필요는 없다. "홍상수 감독 영화에 3D 콘티를 쓸 이유는 없다. 난해한 액션이 있거나 카체이스, CG, 특수 효과, 카메라 무빙이 많은 영화들에서 부분적으로 활용할 때 효과를 볼 수 있다." dna 김승식 팀장의 말이다. 3D 콘티는 종이에 그리는 평면적 그림이 전하는 두루뭉실한 관념이 아니라 실재이며 막연한 준비가 아니라 계획적인 설계를 가능하게 만든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디지털 프로덕션이라고 하면 후반 작업에 국한돼 있었다. DI, CG 등 디지털 제작 공정의 상당량이 후반 작업 기간에 대거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상황은 변했다. 3D 콘티 같은 프리프로덕션 프로세스가 생겼을 뿐 아니라 촬영 중에도 디지털 기술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현장 편집과 현장 녹음 분야가 대표적이다. PC를 이용해 현장에서 바로 편집을 하는 현장 편집은 몇 년 전부터 상용화돼 지금은 필수 공정이 됐지만 현장 녹음을 할 때 하드디스크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디지털 프로덕션이라고 하면 통상 눈에 보이는 '그림'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이 분야의 선구는 '사운드' 영역이다. 사운드 녹음, 믹싱 업체 블루캡의 김석원 실장은 "작업의 편의성과 비용 절감의 차원"에서 디지털 사운드 기술의 혁신성을 평가한다. "기계의 덩치가 크고 대수도 많이 필요했던 과거에 비해 동일한 기능에 소형화된 기계를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용 절감은 물론, 질 높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후반 작업 기간 녹음과 믹싱을 디지털화한 것에 이어 현장 사운드 채록을 디지털 사운드 레코더로 하게 된 건 주목할 만한 변화다. 1998년 데뷔작 <여고괴담>에서 아날로그 '나그라' 녹음기로 현장 녹음을 시작한 이태규 녹음 기사는 얼마 전부터 '아톤'이라는 디지털 레코딩 장비를 쓰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녹음 테이프 대신 하드디스크에 녹음 소스를 담는 이 놈의 능력은 보통이 아니다. 2채널 녹음 방식이었던 과거 느림보에 비해 멀티채널이 가능한 디지털 레코더는 한 번 세팅으로 여러 가지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경제성을 자랑한다. 테이프를 갈아야 하는 불편함이 없고 리와인드 없이 바로 모니터링이 가능하며 믹싱 작업에 들어갔을 때도 거의 음질의 손상이 없는 높은 보존력을 자랑한다. 단점이 있다면 가격이 비싸다는 것.

이태규 기사는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돈을 많이 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멀티트랙 레코더가 없어서 녹음기 두 대를 돌려야 했던 아픈 경험을 딛고 이 고가의 장비를 마련했다. "2 채널에서 놓치는 소리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준다. DVD 음질을 현장에서 녹음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더 이상 두 대에 나누어 녹음한 소리들을 맞추기 위해 고생할 필요가 없어졌다. 유위강 감독의 <데이지>에서 처음 사용한 이 장비를 통해 이 기사는 여러 가지 사운드 소스를 하나의 하드디스크에 담아 들리지 않던 소리도 한꺼번에 채록하는 효과를 보게 됐다. 디지털 프로덕션의 거개가 그러하듯 디지털 사운드 레코딩 역시 시간 단축과 표현 영역의 확장을 가능케 한다. 디지털화된 사운드는 별도의 중간 공정을 거치지 않고 녹음실에서 바로 받아쓸 수 있는 상태로 저장된다. 리얼 타임으로 사운드를 받아야 하는 아날로그 방식에 비해 디지털은 2~3분이면 다운을 받아 다음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 현장에서 디지털 사운드 레코딩의 보급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할리우드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디지털 방식을 쓰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략 10% 정도"가 하드 레코딩 작업을 하고 있다. 이태규 기사는 "완성도 높은 소리 채록을 위해서 최소한 4 트랙 이상의 디지털 레코딩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지만 장비가 고가이기 때문에 투자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된다"고 말한다. 배우들에게 채우는 무선 마이크도 두 개면 되었던 것을 네 개 이상으로 늘여야 하고 믹서도 멀티채널을 지원하는 장비로 새로 구입해야 되고 마이크도 종류별로 필요하기 때문에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부대 비용도 만만치 않다. 몇 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1~2년 안에 하드 레코딩이 대세가 될 것"이라는 게 이태규 기사의 말이다. 현장에서 에러가 적고 테이프가 씹힐 염려도 없으며 더 나아가 후반 작업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효율성이 비용의 압박을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컴퓨터로 샤워한 이미지

신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눈부시다 해도 아직까지 디지털 시네마 프로덕션의 총아는 ‘있는 걸 돋보이게 하는’ DI와 ‘없는 걸 만들어내는’ CG다. DI 작업을 한 한국영화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10%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올해에는 30% 수준까지 증가세를 보였다. 헐리우드필름레코더(HFR) 이용기 이사는 “내년에는 50%까지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다. DI 작업은 통상 1차 보정(primary correction)과 2차 보정(secondary correction)의 두 단계로 나뉜다. 1차 보정은 불균질한 필름의 톤과 질감을 통일하는 단계다. 시공간의 차이, 명도의 차이, 질감의 차이 등에서 오는 이질감을 말끔하게 통일시킨다. 2차 보정에서는 프레임 내 요소들의 디테일을 손 보게 된다. 촬영 과정에서 실수로 생긴 흠결을 보정하거나 색깔을 조정하고, 콘트라스트를 조율하고, 먼지를 지우는 등 2차 보정을 통해 변환할 수 있는 기능은 무궁하다. 강종익 대표는 "아날로그 색보정을 뛰어넘는 DI만의 독보적 기능은 2차 보정의 효과"라고 말한다.

디지털의 권능을 절감하게 되는 DI의 축복은 ‘영상적 표현 능력의 확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근 개봉한 <형사 Duelist>(이하 <형사>)는 이 같은 DI 효과를 톡톡히 본 사례로 거론된다. <형사>는 색의 표현, 콘트라스트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2차 보정이 특히 위력을 발휘했다. <형사> DI 작업을 한 HFR은 남순과 슬픈 눈 사이의 대결의 미장센을 시각화하기 위해 장면마다 강한 콘트라스트 대비를 원했던 이명세 감독의 컨셉이 지상 명령으로 떨어졌다. 대결을 전경화하는 콘트라스트의 강조, 눈이 부실 듯 화려한 색감의 구현을 위해 DI 역할은 막중했다. 다소 밋밋하게 보였던 장면들이 극렬한 대비의 질감으로 살아나게 된 건 DI 작업의 공이 컸다. 색채의 퍼레이드를 원했던 감독의 주문에 따라 순수한 색의 질감이 살아나도록 했고 기존 2K 작업 방식 보다 선명한 화질을 구현하는 4K 방식으로 작업해 이미지의 선명도를 증가시키는 효과를 봤다.

시종일관 스크린 위를 수 놓는 춤을 추듯 일렁이는 빛과 그림자, 총천연색 물감을 끼얹어 놓은 것 같은 색의 물결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형사>에서 볼 수 있듯 DI를 하는 이유는 창작자의 표현 범위가 확장되기 때문이다. 결과물을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효과 외에도 후반 작업 과정에 스탭들의 참여와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HFR 옥임식 실장은 “DI는 작업 도중 바로 모니터링이 가능하기 때문에 촬영, 연출, 마케팅 담당자들까지 참여해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후반 제작 공정으로 보자면 전체 작업의 본부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인사이트 비주얼 강종익 대표는 “DI 작업을 하면서 감독의 참여도가 훨씬 높아졌다”고 말한다. 색의 톤을 맞추거나 필름의 질감을 균일화하는 아날로그 색보정은 촬영감독과 색보정 기사가 작업을 전담하지만 프레임의 디테일을 부분적으로 보정하고 색감이나 속도, 프레임 수, 다양한 광학적 효과를 연출할 수 있도록 표현 범위가 넓어지면서 ‘디렉팅’ 개념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DI 작업과 더불어 CG는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디지털 프로덕션의 핵심이다. 최근 한국영화 CG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 보다 작업 방식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과거 후반 작업 시기에만 매몰됐던 CG 작업 스타일은 이제 프리프로덕션과 촬영 단계부터 깊숙이 관여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3D 콘티 작업을 통해 CG가 사용될 장면의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현장에서는 CG 작업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다른 부서와 나누는 협력 체계가 구축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CG가 활용된 SF, 공포, 무협 액션 따위의 상상력을 요구하는 장르뿐 아니라 전 장르에 걸쳐 그 활용도를 넓히고 있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액션 장면의 와이어를 지우는 작업, 블루 매트(상이한 시공간에서 촬영한 장면들을 합성하기 위해 후면에 대는 푸른 영사막)를 통한 화면 합성, 신의 스케일을 부풀리는 블로업, CG 캐릭터의 활용 등 다양한 CG 효과가 한 영화에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 강종익 대표는 “한국영화 CG가 과거 보완의 CG에서 창조의 CG로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 제작의 각종 한계를 메우기 위한 신묘한(?) 능력을 발휘하는 CG에서 없었던 것을 창조하고 표현의 가능성을 확대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작비 절감, 시간 단축이라는 단순 경제 효과에 매몰되지 않고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모험적인 시도를 통해 '비전'을 바꾸는 생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 소스 멀티뷰 시대의 총아

디지털 프로덕션, 특히 후반 작업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1차적 목표 외에도 또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다. HFR 이용기 이사는 “DI 작업을 하는 건 한 작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디지털 시네마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라고 말한다. 이 이사는 요즘 DI 기술이 한국영화의 미래를 위해 떠맡게 될 역할에 대해 고민 중이다. “어느 날 갑자기 디지털 시네마 시대가 왔다고 상상해 보라. 지금 손놓고 있다가 그때 가서 준비하면 늦는다. DLP 영화관을 채울 수 있는 콘텐츠가 할리우드영화뿐이라고 생각해보라. 한국 영화 산업이 고사될 수도 있다." 일부 극장에서 <친절한 금자씨>를 DLP 프로젝터로 상영했던 실험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난 이게 스크린 쿼터 운동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쿼터만 지킨다고 한국영화가 잘되는 건 아니다. 우리도 디지털 시네마 시대를 대비한 영화도 만들고 관련 시스템도 차근히 준비해야 한다."

디지털 시네마로 완전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에 관련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하는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많다. 이렇게 됐을 때, 디지털 현상소는 다채널화된 콘텐츠 소스의 생산 기지 역할을 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DI를 통해 만들어진 영화가 극장뿐 아니라 다양한 윈도를 통해 보여지는 소스가 된다는 말이다. 디지털화된 매체 환경에서 영화 콘텐츠는 원 소스 멀티뷰의 중심에 있다. DI 작업을 거쳐 영화 소스를 내보낼 수 있는 채널로는 DVD, 비디오, DLP 시네마, 모바일 등이 있고 게임기, 위성이나 인터넷 네트워킹을 통한 영화 송출도 조만간 실현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나의 소스를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보게 됐을 때, 관건은 얼마나 원본에 가깝게 각 매체에 뿌려줄 수 있는가이다. 휴대전화, 게임기, DVD, 인터넷 등 매체마다 압축이나 영상 신호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안정적이고 균일한 소스를 만들어내는 기술력 확보가 절대적이다. DI를 통한 안정적 영상 소스의 확보는 '원 소스 멀티뷰' 시대에 한국영화가 새로운 시장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잣대가 될 전망이다.

DI나 디지털 사운드 레코딩 장비 등의 테크놀로지 발전으로 인해 영화의 진화 속도가 빨라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효율성과 편리함이 곧 진화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3D 동영상 콘티는 특수 효과나 CGI 기술을 활용해야 하는 블록버스터들이 선호하는 선택 사항일 뿐이다. 하지만 이 같은 기술을 사용하는 영화가 늘어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어쩌면 그 속도가 예상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다. 최근에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새로운 도전 영역들도 생겨나고 있다. 과거의 필름을 복원하는 ‘디지털 복원’도 그중 하나다. 스크래치, 화면 떨림과 깜박거림 등을 보정할 수 있는 DI 기술 발전으로 고전영화의 필름 복원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기술 발전 덕분에 시간을 절약하거나 비용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남는 시간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이 다시 생겨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현장에서 손을 놓고 노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 현장은 더 신속하고 콤팩트한 역동적인 변화의 장의 될 것이다. 이태규 현장 녹음 기사는 다음과 같이 변화된 상황을 증언한다. "디지털 필름 레코더를 쓰면서 과거에 포착되지 않았던 소리를 듣게 된다. 현장의 느낌이 살아 있는 그 소리를 들을 때는 묘한 흥분이 인다." 앞으로 더 많은 한국영화 스탭들이 그와 비슷한 말을 하게 되리라는 건 분명하다.

중국에서 뜬 비행기가 미국 하늘을 날다

오는 12월 개봉을 앞둔 <청연>은 3D 콘티와 DI, CG 등 디지털 프로덕션의 제반 프로세스가 총화된 결과물이다.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후반 작업까지 디지털 기술로 생기를 부여받은 그림들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박경원의 파란만장한 인생 유전을 쫓는 이 영화의 비행 장면은 예고편에 공개된 일부만으로도 기대를 품게 만든다. <청연>은 난해한 항공 촬영이 많은 관계로 프리프로덕션부터 3D 동영상 콘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청연>의 3D 콘티는 최종 결과뿐 아니라 해당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지를 세분화한 촬영 설계도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청연>의 3D 콘티, CG, DI 작업을 총괄한 인사이트 비주얼 강종익 대표는 “미국, 중국 스탭들과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3D 프리비주얼 작업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미국과 중국에서 진행된 항공 촬영에서 외국인 스탭들에게 원하는 그림을 이해시키는 데 3D 콘티는 큰 역할을 했다. 한국영화에서 3D 콘티를 활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미국 스탭들의 보는 눈이 달라졌을 정도다.

<청연> 비주얼 컨셉의 핵심은 영화의 30%에 달하는 비행기 액션에 있다. 비행 장면에서 주로 사용될 CG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한국영화 중 양과 질에서 최다, 최고 수준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보다 2백여 컷이 많은 800컷 분량의 CG가 사용되는 이 영화는 한국영화가 보여 준 적 없는 '창공의 비주얼'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로 궁금증을 자아낸다. 복엽기가 날아가는 비행 장면들은 모두 다른 공간에서 찍혔다. 카메라를 매단 헬기로 찍은 복엽기 비행 장면은 미국에서, 활주로 이륙 장면은 중국에서 찍어 둘을 합성하는 식이었다. 붙이고 지우고 늘리는 게 CG가 하는 일이다. 세트에서 찍은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화면 합성, 비행 대회 장면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는 비행기를 심어넣는 작업, 비행기를 조종하는 진짜 조종사를 지우는 작업, 사막을 활주로로 바꾸는 작업까지 다양한 CG 기술이 활용됐다. 비행기가 회전할 때, 기울 때, 장애물이 놓인 지형 지물을 통과할 때마다 다르게 적용할 수 있는 ‘프로펠러 움직임 자동화 프로그램’을 개발해 다양한 그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다국적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한 필름에 시각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작업도 <청연> 디지털 프로덕션의 관건이었다. 시나리오상 공간은 한국이지만 무생물 주인공인 비행기의 활약을 담기 위해 다국적 로케이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미국, 일본, 중국까지 4개국에서 촬영한 필름에 일관성을 부여하고 서로 다른 공간을 합성해 하나의 장소로 바꾸는 것은 DI와 CG의 몫이었다. 각 나라마다 찍어온 그림들의 색깔과 배경, 공기, 하늘 따위가 모두 달라 애를 먹었다. 무려 11개월의 촬영 기간 동안 흙 색깔, 잔디 색깔, 먼지의 질감, 하늘 빛깔 등이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DI의 위력은 도저히 하나의 시공간으로 보이지 않는 이 중구난방의 영상을 한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처럼 바꿔놓았다.
장병원 기자

by 100명 2005. 9. 27. 1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