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사업 성공 기업 5選
새 사람들에 신사업 맡겨
젊은 COO들 ‘강력한 2등’ 전략으로 효율성 높여


오리온-과자에서 엔터테인먼트로

초코파이로 유명한 오리온은 제과업뿐 아니라 유통·미디어·영화·엔터테인먼트 등 16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이다. 그 모태는 1956년 창업주인 고(故) 이양구 회장이 설립한 동양제과. 담철곤 회장이 진두지휘하는 이 회사는 이제 ‘먹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까지’ 추구하는 토털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탈바꿈했다.

오리온은 2001년 9월 이전까지 동양그룹에 속했다가 사업 확대를 위해 분리되면서 지금의 그룹 이름으로 새출발을 했다. 90년대 초 2천억∼3천억원대에 불과하던 외형이 2002년 말 기준으로 매출 1조2천여억원에 달하는 중견그룹이 됐다.

오리온은 90년 편의점 바이더웨이를 시작하면서 유통 사업에 뛰어들었고, 94년에는 케이블TV 투니버스로 미디어 사업에 참여했다. 이후 95년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베니건스, 99년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메가박스, 2001년에는 공연사업에도 손을 댔다.

최근에는 스포츠토토까지 인수해 토털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모양새를 갖췄다. 지난해 신사업에서 일어난 매출은 2천억원이 넘는다. 본업인 동양제과의 매출 5천억원에는 못 미치지만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오리온 그룹의 양대 축이 제과와 엔터테인먼트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처음 신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전통적인 과자회사가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뛰어든다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오리온의 최고경영자(CEO)인 담회장이나 이화경 사장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신규사업을 위해 아예 기존 조직과는 무관한 새 사람을 썼다. 현재 신사업 부문을 맡고 있는 김성수(온미디어·41), 문영주(롸이즈온·40), 김우택(메가박스·39) 본부장 등이 바로 그들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젊은 본부장들로 하여금 새 사업을 주도하게 했다. 회장이나 사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젊은 본부장들이 낸 아이디어가 오리온의 신사업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젊은 본부장을 중심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들 신사업이 시작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90년대 중반 신규사업팀에 소속돼 새 아이템을 모색하면서 20여억원을 소비했다.

연예 매니지먼트·커피숍·레스토랑 등은 대표적으로 실패한 사업들이다. 그러나 담회장은 이를 질책하지 않고 담담하게 수용했다. 허비한 돈과 경험은 고스란히 사람에게 쌓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제대로 되는 일도 없이 돈만 낭비했지만 회장님과 사장님이 크게 문제삼지 않았어요. 지나고 보니 그것들이 신사업의 자양분이 된 것 같습니다.” 롸이즈온 문영주 대표의 회상이다.

신사업이 비교적 안착한 지금까지도 오리온에서 지켜지는 규칙이 하나 있다. 제과 인력과 신사업 인력 간의 교류가 없다는 것. 관리나 지원 쪽을 제외하고는 제과 인력이 신사업부문으로 간 예가 없다. 비즈니스의 성격이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담회장도 “그룹의 통합 정체성보다 개별회사의 개성을 살려야 그룹이 살아난다”는 점을 늘 강조하고 있다.

외형적 1등보다는 내실 있는 ‘강력한 2등 전략’을 쓴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청률과 광고 수주액 분야에서 케이블 TV업계 1위인 온미디어를 제외하면 메가박스나 베니건스는 규모 면에서 모두 업계 2∼3위권이다.

하지만 좋은 위치 선정과 고급스런 인테리어로 둘 다 멀티플렉스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가지게 됐다. 오리온보다 자금력이 뛰어난 CJ나 롯데를 상대로 경쟁하기 위한 전략이다.


신사업의 주역들

김성수 본부장과 문영주 본부장은 둘 다 제일기획 출신. 1991년 신규사업 아이디어 뱅크팀에 입사하면서 오리온그룹과 인연을 맺게 됐다. 김본부장은 오리온의 첫 케이블TV 채널인 만화채널 ‘투니버스’ 설립을 시작으로 미디어 브랜드 ‘온미디어’를 발족했다.

미국 캐피탈 그룹과 타임워너로부터 대규모 외자를 유치해 온미디어가 국내 최대 프로그램 공급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현재 9개의 채널을 갖춘 온미디어는 케이블TV 채널 점유율 35%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문본부장은 95년부터 오리온 신규사업부 외식사업 담당 팀장을 맡아 미국 베니건스 브랜드를 도입하고, 이후 사업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총 18개 매장을 오픈했으며, 2002년에는 매출액 6백20여억원을 기록했다. 2001년에 총 1백억원을 투자한 ‘오페라의 유령’ 공연으로 매출액 2백억원을 기록하며, 한국 뮤지컬을 산업화의 단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오리온그룹의 영화 관련 사업을 총책임지고 있는 김우택(오른쪽) 본부장은 오리온그룹의 최연소 임원이다. 96년 종합상사 동양글로벌에서 근무하다 97년 케이블 만화채널 투니버스 부장으로 오리온 그룹과 첫 인연을 맺었다. 미디어플렉스 본부장 시절 세계 최대의 영화관 체인업체인 LCI로부터 2천만 달러의 외자를 유치, 메가박스 씨네플렉스를 설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실패 딛고 ‘딤채’ 탄생

경영자 신뢰가 큰 힘… 김치 알려고 1만 포기 담기도

위니아만도-차량 부품에서 가전으로

위니아만도는 사람들에게 김치냉장고와 에어컨으로 잘 알려진 회사다. 특히 ‘딤채’의 경우 김치냉장고 시장 점유율 1위일 뿐만 아니라 브랜드 파워에서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전신인 만도기계 시절에는 상용차 에어컨이나 히터·라디에이터 등을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차량용 공조부품 전문회사였다.

알짜 회사였지만 위니아만도에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부품을 생산하는 하청회사였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이 ‘기침’을 하면 ‘감기몸살’을 앓아야 했다. 또 최종 생산품(end item)을 생산하는 회사가 아니라서 브랜드를 알리거나 주가를 관리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경영진에서는 고민 끝에 업종 변경을 시도했다. 일단 신사업 ‘1번 타자’는 에어컨으로 잡았다. 공조회사의 핵심기술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었기 때문. ‘위니아’라는 브랜드로 출발한 에어컨 사업은 그런대로 순항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에어컨이 여름 상품이기 때문에 1년 중 반은 공장을 놀려야 했던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겨울용 아이템 개발에 들어갔다. 온풍기·가습기·보일러·식기세척기·자판기 기계 등 여러 아이템을 개발하고 판매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한국 문화에 맞지 않거나 기존 업체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곱명의 본부장 중 한사람으로 김치냉장고 사업을 맡고 있던 황한규 사장은 “실패했을 때 경영자의 신뢰가 큰 힘이 됐다”고 회상한다.

김치냉장고는 틈새 제품이라 경쟁자도 별로 없었다. 김치라면 국민적인 음식이기 때문에 소비층도 두터운 편이었다. 문제는 김치의 맛을 어떻게 살리는가였다. 이때부터 김치냉장고가 아니라 김치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1만 포기 이상 김치를 담았고, 점심 때마다 김치 반찬에 라면을 먹기도 했다.

95년 제품을 개발했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부품회사였던 탓에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마케팅 부서조차도 없었고, 마케팅에 드는 비용에도 인색했다. 일반 소비자를 상대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마케팅 부서를 만들고 외부에서 마케팅 인력들을 수혈했다. 컨설팅도 받았다. 부족한 역량은 과감히 외부에서 수혈한 것이 주효한 셈이다.

[인터뷰 황한규 사장]“아파트 부녀회장 통해 테스트 마케팅”

신사업으로 가전을 생산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위니아만도는 원래 부품회사였기 때문에 마케팅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일반 소비자들을 상대하는 제품은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다행히 김치냉장고는 우리가 선발주자여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기존에 없던 제품이라 설명하기 어렵지 않았나.

“그래서 테스트 마케팅을 했다. 일단 써보고 마음에 들면 사라는 것이다. 수도권의 소비자 단체, 요리사, 정·재계 여성 인사와 서울 시내 대단지 아파트 부녀회장까지 포함시키니 3천명 정도 됐다. 이들을 대상으로 승부를 걸었다.”

실패도 했을 텐데, 회사 내에서 눈총을 받지는 않았나.

“‘딤채’를 내놓기까지 번번이 실패를 거듭했다. 조직 내에서도 나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사장님이 내 말을 끝까지 믿어줘서 좋은 결과를 이룬 것 같다.”

‘딤채’ 는 출시하자마자 잘 팔렸나.

“그렇지 않았다. 처음에는 가정용보다 업소용으로 생각하고 대용량으로 제작했다. 하지만 주방아줌마를 두고 있는 업소에서는 그때그때 담아 먹는 것이 비용상으로도 저렴했기 때문에 굳이 김치냉장고를 살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가정용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문제 개선하니 돈 돼”


건물의 ‘숨통’ 창문 공략… 조직·법인 별도 구성

이건산업-목재에서 창호로

한국에 ‘시스템 창호’라는 새로운 개념의 창문을 선보인 곳이 바로 이건창호다. 경쟁업체들도 지금은 다들 시스템 창문을 생산하고 있다. 창호 제품을 한단계 끌어올린 이건창호는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이 처음 시작한 사업이다.

합판가공 등 건자재 사업을 하는 이건산업은 88년 창호사업에 손을 댄다. 당시 이건산업은 건축자재 중에서 가장 낙후된 것이 바로 창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창문은 건물의 ‘숨통’에 해당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데도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틈새를 공략키로 한 것이다.

이한우 이건창호 부장은 “회사 내에서 신사업에 대해 고민하면서 ‘건자재 중에서 가장 문제 있는 분야를 찾아 개선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창호를 신사업으로 설정하면서 조직과 법인도 별도로 구성했다. 중간재 산업인 이건산업의 인력으로는 트렌드에 맞는 디자인이 생명인 창호사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장은 “그때만 해도 이건산업에는 임학과 출신들이 많았다. 하지만 창호사업은 건축이나 디자인이 꼭 필요해 아예 인력도 따로 뽑았다”고 기억했다.

이건창호 역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셈이다. 초기 시장 진입은 순탄한 편이었지만 90년이 지나 주택건설이 주춤해지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때 이건창호는 주택 외에 빌딩용 시스템 창호 쪽에 눈을 돌렸다.

다행히 93년 대전 엑스포를 기점으로 95년까지는 빌딩용 창호 시장이 살아났고, 그 뒤 3년 주기로 주택과 빌딩 시장이 번갈아 살아났다. 이부장은 “신사업이 성공적으로 런칭하더라도 몇번의 변곡점이 있다. 그때 어떻게 불씨를 살리느냐가 안착 여부를 좌우한다”며 지속적인 성장동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빵 매출 ‘본업’에 육박”

특급호텔의 노하우와 벤처 같은 유연함 결합

조선호텔-베이커리 사업 확대

지난해 조선호텔은 외식사업부문을 외식사업부와 베이커리사업부로 분리했다. 베이커리사업부의 외형이 커졌기 때문이다. 올 상반기에 베이커리사업부는 3백19억원의 매출 실적을 올렸다.

외형만 놓고 보면 ‘본업’인 객실부문(3백30억원)에 육박한다. 이 회사 박성호 베어커리사업부 마케팅팀장은 “베이커리사업부의 연말까지 매출 목표를 7백80억원에서 8백50억원으로 상향조정했다”고 말했다.

조선호텔이 베이커리사업에 적극 뛰어든 것은 96년 이마트 분당점에 ‘데이앤데이’를 입점하면서부터다. 객실과 외식사업이라는 호텔의 기존 비즈니스가 외형적인 한계에 봉착하면서 다양한 수익원을 발굴하기 시작한 것. 관계사인 신세계와 손잡고 이마트에는 ‘데이앤데이’를, 신세계백화점에는 ‘달로와요’를 오픈했다.

베이커리사업부의 호조에 힘입어 최근 경기도 용인 1, 2 공장에 이어 충남 천안에 제3공장 기공식을 가졌을 만큼 활발한 투자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감한 인력 투자도 한몫 했다. 조선호텔은 국내 제빵기술사 1호인 김원복씨를 고려당에서 스카우트해 사업부장(상무)에 임명할 정도로 ‘새 식구 찾기’에 성의를 보였다. 김상무는 보란 듯이 불과 3년 만에 조선호텔 제과부문의 매출을 4배로 성장시켜 회사 측의 성의에 보답했다.

조선호텔이 ‘방’이 아닌 ‘빵’ 사업에서 이렇게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김상무는 올해 크게 히트한 찰개빵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으면서 “특급호텔의 전문적인 노하우와 벤처기업 같은 유연함이 결합됐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린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유행하는 것을 도입해 우리 입맛에 맞는 신상품을 내놓기까지 불과 3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대기업이지만 벤처기업 같은 유연함을 갖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고급 밀가루와 버터를 고집하는 특급호텔의 노하우를 살려 까다로운 소비자들의 입맛을 잡았다.”


‘히트 CEO’ 만나 기사회생

기존 설비 이용할 수 있는 아이템 찾다 ‘곡물음료’ 착안

웅진식품-인삼음료에서 곡물음료로

‘아침햇살’ ‘초록매실’ 등 곡물음료로 유명한 웅진식품은 1976년에 태어난 회사다. 당시의 사명은 ‘미보산업’. 섬유를 제조하는 조그만 회사를 웅진그룹에서 인수했으며, 이듬해 웅진인삼으로 사명을 바꾸게 된다.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 당시의 주력 사업은 인삼관련 제품 판매였다. 그러나 시장규모가 미미해 인삼으로는 더 이상의 수익을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당시 웅진인삼의 한해 매출 규모는 60억원대에 불과했다.

“공장 설비를 변경하지 않은 채 새롭게 개발할 수 있는 아이템은 없을까.” 웅진식품의 구원투수로 투입된 당시 조운호 웅진그룹 기획실장(현 사장)의 고민이었다. 그러다가 “서양에서 병과 캔을 먼저 만들어 커피를 담아 팔았듯 우리도 병과 캔에 숭늉이나 매실차를 담아 팔면 그것이 음료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조사장 특유의 ‘용기론’(用器論)이다.

전통 마실거리에 대한 고민은 95년 10월 ‘가을대추’ 출시로 이어졌고, 이듬해에는 아예 회사 이름을 웅진식품으로 바꾸었다. 99년 1월 선보인 아침햇살은 제품을 출시한 지 10개월 만에 단일 브랜드로는 국내 음료사상 최단기 1억병 판매라는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회사 조규철 기업문화팀장은 “현재 웅진인삼 시절 판매하던 제품은 모두 철수했고, 당시 인삼제조기술을 적용한 ‘장쾌삼’과 ‘용홍삼’ 등이 명맥을 잇는 정도”라고 말했다. ‘곡물음료’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60억원대 회사를 3천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견 음료회사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대표 브랜드의 컨셉트와 이름이 대부분 조사장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다는 것은 업계에서도 유명한 얘기다. 그는 일단 ‘판’을 벌이면 앞뒤 재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10년 안에 연 매출액 20조원을 돌파하겠다는 게 조사장의 포부다.


* 출처: Economist 706 호 2003년 09월 29일 (월)
by 100명 2005. 2. 23. 1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