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안전성정보센터가 발표한 '2012년 GMO(유전자조작농산물) 주요 통계' 자료에 따르면 2012년 GMO가 포함된 콩, 옥수수, 면실 등 농산물의 국내 수입승인 규모는 26억7000만 달러(784만 톤)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GMO 관련 안전성에 대한 우려는 높아지고 있지만, 수입량은 줄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GMO 수입품목과 수입량에 대해서 정확한 내용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밥상에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GMO의 다양한 이면을 들여다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편집자말>

아파트에 살다 보면 정기적으로 소독을 한다. 그때마다 게시판에는 '한 집이라도 빠지면 바퀴벌레 등의 벌레들이 그 집에 모였다가 다시 퍼지니 한 집도 빠지지 말아달라'는 당부의 글이 붙곤 한다. 1970년대 우리네 농촌도 그랬다. 사실 우리나라가 농업에 농약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부터이지만 농약 사용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나선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1970년대 병해충이 돌 우려가 있거나 돌기 시작하면 정부는 즉각 전국의 농민에게 농약을 뿌려 방제하도록 했다. 왜 하필이면 1970년대 이후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농약을 치도록 권장했을까.

1960년대 미국에서는 레이첼 카슨의 책 <침묵의 봄>으로 인해 화학산업의 발달과 농약의 과도한 사용이 환경오염뿐 아니라 생태계까지도 위협한다는 경고가 퍼지게 됐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이런 위험을 줄이기 위해 농민들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것이 미국에서 최초로 유기농단체를 만든 계기가 됐다. 이렇게 선진국에서 유기농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화학약품에 의존하는 농사가 아닌 자연과 더불어 상생하는 농업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화학약품에 의존하는 농업, 왜 생겼을까

같은 시기인 1960년대에 개발도상국들은 경제성장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역시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작으로 수출경제를 통한 경제성장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기반이 없는 우리나라와 같은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이 넘겨주는 산업을 이어받아야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화학산업이다. 화학산업은 그야말로 공해를 유발하는 산업으로, 그 가운데에는 농약과 비료라는 화학약품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의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농이 시작되었다. 줄어든 농가 일손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농약, 화학비료, 농기계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시설투자가 시작되었고 경지를 정리하고 마을길을 넓혔다. 새마을운동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농업의 변화에는 그럴 듯한 이유가 붙었는데 그것이 바로 전국민이 흰 쌀밥을 먹을 수있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농약과 화학비료를 견뎌내고 수확을 늘릴 수 있는 다수확품종들이 대세를 이루고 그에 따라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량도 늘어만 갔다. 그렇게 선진국에서 유기농을 고민하던 시기에 우리나라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농업의 필수요소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산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우연치고는 정말 절묘한 우연이었다. 이같은 시기적인 일치가 중요한 것은 그 후에 일어난 일들 때문이다.

1980년대 세계는 온갖 환경오염과 생태계파괴 등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그런 몸살의 한 켠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록 더이상 내버려둘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세계적인 환경운동의 발전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1982년 공해문제연구소라는 기록상 최초의 환경운동단체가 발족했다. 이런 환경운동의 발전은 농업분야의 화학약품 사용에도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본격적인 환경농업 내지는 유기농업운동이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세계가 환경과 생태계를 고민하는 시대로 접어들었고, 이는 1992년의 리우선언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이제 세상은 실제로 얼마나 그것을 먹는가의 문제와는 별도로 적어도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농업이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위협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에 동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다른 화학산업도 마찬가지다. 농약을 주요품목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해오던 농화학기업은 자신들의 존립기반에 대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됐다.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이윤을 확보할 수 없다는 위기는 그들에게 돌파구를 찾도록 만들었다. 이 시기는 이미 제약분야에서 유전자조작기술을 활용한 인슐린과 성장호르몬이 상품화하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 화학약품을 생산해오던 제약기업들은 화학약품의 내성 등을 비롯한 부작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물로부터 직접 추출한 성분의 의약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생물로부터 추출하는 것은 그 양이 제한적이어서, 이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기술로 유전자조작기술을 선택하기에 이른다. 제약회사의 유전자조작기술은 미생물에 자신들이 원하는 유전자조작을 넣어 배양을 통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농화학기업에 새로운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미생물을 통한 배양 성공은 농화학기업들에게 식물에 그 기술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유전자조작종자가 만들어진 이유

그런 와중에 한 기업이 유전자조작기술을 식물에 적용해 무르지 않는 토마토를 만들어냈다. 당시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식물에 그 기술을 활용할 수 있다는 또다른 희망이 나타났다. 그렇게 유전자조작농산물(GMO)이 만들어졌다. 농화학기업은 이 기술을 자신들의 사업에 이용하기 위하여 세계 곳곳의 종자기업을 손에 넣었으며 그렇게 얻은 종자에 유전자조작기술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농약과 궁합이 맞는 종자들을 만들어냈다. 제초제내성 유전자조작종자와 살충성 유전자조작종자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처음 이 종자를 만든 후 농화학기업들은 이 종자에 대해 친환경적인 종자라고 홍보를 했다.농약 사용량을 줄일 수 있으므로 친환경적이며, 때로는 유기농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제초제내성 유전자조작종자가 그 종자를 만든 기업의 제초제, 그중에서도 독성이 가장 강한 제초제인 전멸제초제에만 반응하는 것이라는 말은 굳이 홍보 내용에 담지 않았다.

즉, 종자를 팔면 덩달아 제초제까지 팔 수 있으니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익인지를 알리지 않았다. 또한 그 제초제가 일반적으로 농작물 생육기에는 사용하지 않으며, 모든 식물을 다 죽일 능력을 가진 전멸제초제라는 것 역시 홍보 내용에 담지 않았다. 단지 제초제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친환경적이라고 선전했을 뿐이다. 유기농에서 흔히 사용하는 미생물농약인 BT균의 유전자를 뽑아내 그것을 종자에 삽입한 살충성 유전자조작종자가 그 농산물 자체로 살충성 독소를 뿜어낸다는 것 역시 굳이 알리지 않았다. 대신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니 친환경적이라고만 했을 뿐이다. 결국 땅이 넓고 경작규모가 큰 나라의 농민들은 자신들의 농사 편의를 위해, 생산비 절감을 위해, 생산비 절감을 통해 수출시장에서의 가격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유전자조작종자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편리함은 잠시, 이런 종자들은 또다른 문제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즉, 전멸제초제에 내성을 지닌 잡초의 등장에서부터 새로운 해충의 등장까지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이 종자들은 이웃의 농지에까지 꽃가루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이웃의 농민들은 유전자조작종자에 대한 지적재산권 침해라는 누명까지 쓰기 시작했다. 미국 내에서만 지적재산권으로 등록된 유전자조작종자를 기업 허락없이 심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농민들이 소송을 당하는 사례가 수백, 수천 건에 이르고 있다.

자, 이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유전자조작종자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은 농약으로 엄청난 이윤을 기록한 농화학기업이 환경과 생태계를 고민하는 전세계 환경운동의 붐을 타고 번성했다. 무엇을 위해서 만들었는가? 당연히 농화학기업 자신들의 이윤을 끊임없이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것은 환경과 생태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더 나아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발생한 다양한 일들이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 뿐 농화학기업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수 있을까? 원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게 기업의 속성이고 그것은 농화학기업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by 100명 2013. 4. 25. 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