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오징어] 극장 앞 오징어 아저씨의 한숨…"피부로 느낀 충무로 불황은?" (종합)

기사입력 2008-06-11 13:06

[스포츠서울닷컴 | 임근호·김지혜기자] 신촌 A극장 앞에서 오징어를 판매하고 있는 홍사천(61)씨는 오늘도 씁쓸히 손수레를 정리한다. 지독한 충무로 불황. 영화와 무관해 보이는 그에게도 충무로의 그늘은 어둡기만하다. 1.5평 남짓한 손수레에 오징어를 싣고 극장을 찾은지 10년. 홍씨는 "매출은 줄고 한숨만 늘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영화계 관계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불황'이라는 단어다. 충무로, 나아가 영화산업 자체에 이런 위기는 없었다고 걱정을 늘어 놓는다. 실제로 2008년 한국 영화는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2006년부터 감소해온 관객수는 2008년 상반기가 되도 좀처럼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영화계의 위기는 곧 산업 종사자의 근심으로 이어졌다. 노는 감독, 노는 배우들이 늘어난 것. 그래도 그들은 여유있는 편이다. 영화 산업 뒤편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이게 지금 충무로의 현실은 지옥과도 같다. 일손을 놓은 스태프는 물론이고 극장 앞에서 오징어를 파는 아저씨까지 2008년 오뉴월은 그 어느 때 보다 춥고 배고프다.

"극장에 사람이 많아야 나도 먹고 사는거야. 어떡해야 극장에 사람이 몰리냐고? 재밌는 영화가 많아야지. 볼거리가 있어야 극장에 나오는 거 아니겠어. 힘들다 힘들다 하지 말고 제발 영화 좀 재미있게 만들어봐. 우리도 먹고 살 수 있게…."

극장 앞을 터전으로 삶을 꾸려온 오징어 아저씨와 아줌마. 그들이 피부로 체감한 한국 영화계의 불황은 싸늘했다. 대신 한국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냉정했다. 그리고 한국 영화에 대한 지적과 바람은 충무로 그 어느 관계자보다 냉철했고 뜨거웠다.

◆ "불황, 영화도 오징어도 마이너스"

A극장 앞에서 10년째 오징어를 팔고 있는 홍사천씨의 주름은 어느새 더 깊게 파였다. 흑자는 커녕 적자를 면키도 힘든 상황. 한국 영화의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홍씨의 어림짐작에 따르면 주말 A극장을 찾는 사람은 평일에는 1,000여명, 주말에는 4,000여명 안팎이다.

"너무 장사가 안돼 어느 날은 극장 앞에 앉아 표 끊는 사람을 세어봤어. 평일은 1,000명을 넘지 않았어. 주말은 4,000명 정도 극장을 찾더구만. 그럼 오징어는 얼마나 사먹냐고? 100명 당 2명 꼴로 사. 한국영화가 잘나가던 2000년도 초반에 비해 관객도, 손님도 많이 줄어든 편이지"

홍씨의 하소연은 데이터로도 설명된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CJ CGV가 지난해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집계한 관객수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관객수는 1억5,752만 5,412명(서울 4,880만 2,659명)으로 1996년 이후 최저 수치다. 1995년 이후 12년 만에 기록한 마이너스 성장이다.

홍씨 역시 불황의 직격탄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수입 또한 마이너스 성장. 버터 오징어, 반건조 오징어, 말린 문어, 쥐포 등의 어포류를 팔고 있는 홍씨는 평일 평균 매출은 5만원. 주말은 15만원 정도 팔린다. 지난 1998년 손수레를 끌고 나온 이래 최저 매출. 영화 '실미도'(강우석 감독)와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가 1,000만 관객을 불러 모으던 2004년과 비교해 수입이 40% 이상 줄어 들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10시간씩 자리를 지키고 있어. 잘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어렵게 시작한 일인데. 요즘은 너무 힘이 드네. 평일에는 영화를 보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관객만을 대상으로 오징어를 팔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돼. 그래도 단골 손님이 찾아 주니까…. 그렇게 근근히 버티고 있어."

◆ "노력하지 않으면 맛도 없다"

홍씨가 극장 앞에서 오징어를 굽은지 만 10년째다. 잘 다니던 직장, IMF에 무너져 궁여지책으로 찾은 곳이 신촌 극장가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극장에 오르내리는 간판을 지근에서 지켜봤으니 홍씨 역시 한국 영화 역사의 '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생각하는 한국영화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홍씨는 그동안 한국영화가 너무 안일했다고 지적한다. 포스터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는 뻔한 영화가 우후죽순 쏟아지며 관객의 발길도 돌아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국영화? 똑같지. 맨날 조폭이잖아. 물론 한때는 묻지마 관람 시절도 있었어. 조폭영화라도 걸면 사람들이 몰려 들었어. 하지만 요즘 어디 그런게 통하나. 관객이 얼마나 똑똑한데. 영화정보 다 챙겨 듣고 오는 사람이 태반이야. 심지어 나한테 저 영화 어떠냐고 물어보기도 한다니깐."

때문에 재밌는 영화로 승부해야 한다는 게 홍씨의 생각이다. 뻔한 스토리에 예쁘고 잘생긴 배우 엮어서 눈 먼 관객 유혹하던 시절은 끝났다는 것. 다양한 먹거리 속에 손님의 입맛이 까다롭게 변했듯 다양한 영화 속에 관객의 기준도 높아졌다는 주장이다. 그는 오징어 파는 것과 영화 파는 것은 어찌보면 비슷하다며 불황을 뚫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설명했다.

"영화에 따라 매출도 변해 그렇다고 영화만 바라볼 수 있나. 나름의 자생력을 키울려고 노력했지. 3,000원 짜리 버터구이 오징어를 굽는데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어. 버터 비율에 따라 오징어를 찍는 방법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거든. 시행착오를 거치며 최고의 맛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 그래서 이 불황에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거야."

◆ "한국영화, 단골손님이 필요하다"

홍씨는 '어렵다', '어렵다' 말만 하지 말고 스스로 살아 남을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주변 환경이 어려우면 현실을 뛰어 넘을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지. 스크린 쿼터를 원망하고, 티켓 가격을 핑계 대다가는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고 충고했다.

"한국영화는 변명거리만 찾는 것 같아. 그렇다면 나도 핑계될 거 많아. 일단 극장에서 버터구이 오징어를 파니깐 더 힘들어진 건 사실이거든. 하지만 괜찮아. 우리집 오징어가 더 맛있거든. 양도 더 많지. 그래서 단골들은 꼭 우리 오징어를 사지. 한국 영화도 나름의 맛을 내며 단골을 잡아야 돼."

홍씨는 그동안 한국영화가 너무 배짱을 부렸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영화가 르네상스를 맞으며 1,000만 관객을 몰고 다니면서 안일해진 건 사실이다. 충무로에 정체 모를 돈이 몰리자 이 영화 저 영화 막 찍어내며 관객을 우롱한 것도 맞다. 홍씨의 말처럼 지금의 불황은 한국 영화계가 마구 내던진 부메랑에 뒤통수를 맞은 격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홍씨의 바람을 들었다. 예상대로 한국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냈다. 물론 재밌는 외화가 많이 수입돼 관객이 늘어도 좋다. 그래도 홍씨는 한국 사람이기에 한국 영화가 우선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오징어가 팔리는 것도 좋지만 관객의 얼굴에 웃음꽃이 필 때도 기분 좋아. 요즘 '아이언맨', '인디아나 존스', '쿵푸 팬더' 덕분에 주말 관객이 늘었어. 뭐가 재밌는지 다들 웃으며 나오는데 내가 괜히 기분이 좋더라고. 한국영화는 '추격자'때 그랬거들. 다들 신나했지. 그런 영화가 많아졌으면 좋겠어. 다시 한국영화가 재밌어지면 사람이 몰릴테고, 그럼 오징어도 많이 사먹겠지?"

흥행의 역사는 반복된다. 꼭지가 있으면 바닥이 있고, 바닥을 치면 꼭지를 향한다. 지금은 큰 사이클로 봤을 때 바닥에 불과하다. 한국 영화산업 자체가 망한 게 아니다. 오징어를 파는 아저씨의 말처럼 위기를 기회로 삼는다면 단골손님은 또 금방 늘 것이다. 골이 깊을 수록 산도 높다.

by 100명 2008. 6. 11.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