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길에 웹툰을 즐겨 보는 직장인 이수정 씨(32)는 얼마 전부터 유료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네이버북스’에 올라와 있는 웹툰 중에는 돈을 내도 아깝지 않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는 게 이 씨 얘기다. 현재 보고 있는 작품은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 아예 구입할 수도 있고 3일간 대여할 수도 있는데 간혹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은 구입을 하기도 한다. ‘신과 함께’의 경우 대여 비용은 권당 500원이지만 구입하려면 권당 5000원을 내야 한다. 이 씨는 “무료 만화보다 작품 수준이 높은 데다 매번 업데이트되는 걸 기다리지 않고 한꺼번에 완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게 유료 만화의 장점”이라며 “하나의 취미 생활로 굳어진 만큼 돈을 내는 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10년 전부터 디지털 콘텐츠 제값 받기 캠페인을 펼쳤지만 번번이 실패한 국내 시장에서 드디어 유료 콘텐츠가 팔리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평가다. 웹툰 유료화의 선봉장에 섰던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올 들어 몇몇 인기 작품(‘은밀하게 위대하게’ ‘전설의 주먹’ 등)을 중심으로 매출이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었다고 밝혔다. 강유경 다음 매니저는 “연재 당시 인기가 높았던 작품이나 단행본 판매량이 높은 작품이 온라인 판매에서도 좋은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전한다. 현재 다음은 약 50편의 완결 작품을 유료로 제공하고 있다.

1월부터 일부 웹툰·웹소설에 대해 유료화 정책을 펼치고 있는 NHN도 약간의 등락 폭이 있지만 전월 대비 성장률은 꾸준히 상승세라고 밝혔다. 웹툰의 경우 월평균 성장률이 11.8%로 두 자릿수를 기록 중. 웹소설도 9.5%로 양호하다. 네이버 유료 웹툰 중 인기 만화인 ‘신과 함께’는 지난 1~2월 합산 매출이 40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NHN 관계자는 “현재 유료 작품이 30개까지 늘었다. 페이지 뷰(PV) 순위가 높지 않아도 콘텐츠 판매가 잘되는 작품이 많다”며 “매출의 70%를 작가에게 되돌려 주기 때문에 작가들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유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디지털 콘텐츠 유료화 움직임은 글로벌 흐름과도 맞물려 있다. 최근 구글은 유튜브 일부 채널을 유료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일부 채널이라고는 하지만 인기 어린이 프로그램부터 코미디, 스포츠 등 50개 채널에 이른다. 구글은 이용료로 월 기준 0.99달러(약 1100원) 이상을 부과할 것이라고 했다. 콘텐츠 공급자가 정하는 대로 이용료는 달라진다. 앞으로 유료 채널은 더욱 많아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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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유튜브, 유료화 전환 움직임에 가세

국내 대표 콘텐츠 마켓으로 불리는 SK플래닛의 ‘T스토어’에서도 유료 콘텐츠 판매가 늘기 시작했다. 애플리케이션, 게임뿐 아니라 VOD(주문형 비디오), 전자책 등 멀티미디어 콘텐츠 수요가 증가한 덕분이다. SK플래닛에 따르면 2012년 T스토어 전체 콘텐츠 다운로드 비중 중 VOD와 전자책 비중은 전년 대비 모두 3배 증가했다.

NHN, SK플래닛 등 일부 대기업이 나름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시작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국내 시장에서 콘텐츠 유료화는 무모한 도전일 뿐이었다.

P2P(개인 간 파일 공유) 음악 사이트 소리바다는 2006년 7월 유료화 서비스를 시작하자 가입자가 대거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매월 3000원만 내면 무제한으로 음악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도록 했음에도 소비자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유료화 서비스 이후 멜론에 1위 자리를 빼앗긴 소리바다는 현재 음원 시장점유율이 7%대로 떨어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소리바다 이전에는 포털 사이트 프리챌이 2002년 전면 유료화 정책을 선언했다가 이용자들이 급감하면서 2년 만에 유료화를 철회한 사례가 있다. 이미 이용자가 다른 사이트로 넘어가는 바람에 프리챌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지난 2월 문을 닫는 사태까지 이르게 됐다.

전문가들은 유료 콘텐츠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위해선 콘텐츠 품질이 더 좋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무료와 유료 콘텐츠의 차이가 없으면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애플의 아이튠즈(iTunes) 스토어 사례가 대표적이다. 애플은 2003년 아이튠즈 스토어를 선보일 때부터 유료 모델을 고집했다. 음원 다운로드 한 건당 가격은 99센트. 곡당 1000원이 넘는 가격을 부과하는데도 소비자들이 냅스터 등 불법 음원 유통 사이트가 아닌 아이튠즈 스토어를 찾은 이유는 음원 수가 20만개에 달하고 음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후 애플은 방송 프로그램과 뮤직비디오도 아이튠즈 스토어에 추가하면서 아이튠즈를 콘텐츠 유통 플랫폼으로 탈바꿈시킨다. 현재 미국 TV 프로그램과 영화 콘텐츠 65% 이상이 이곳에서 소비된다. 2004년 음원 다운로드 수 1억건을 넘어선 데 이어 2010년 100억건을 돌파하더니 지난 2월 초에는 250억건까지 증가했다. 지난 1분기 아이튠즈 스토어를 통해 기록한 매출이 24억달러(약 2조6656억원)에 이른다.

안병도 IT칼럼니스트는 “일부 낙관론자들은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모바일 인프라가 구축되면 자연스럽게 유료 콘텐츠 판매가 늘 것이라고 보지만 사실 콘텐츠 유료화는 시기의 문제가 아니다. 불법 웹하드를 통해 공유되는 무료 콘텐츠의 품질이 높아서일 수도 있고 유료 품질이 낮아서일 수도 있다. 우선은 유료 콘텐츠 품질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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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북스와 T스토어를 잇는 성공 사례가 계속 나올 수 있을까.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등으로 유명한 카카오가 도전장을 냈다. 지난 4월 카카오는 “창작자 스스로가 콘텐츠 가치를 정하고 그 자체로 수익이 되는 건전한 모바일 콘텐츠 생태계를 만들겠다”며 유료 콘텐츠 플랫폼인 ‘카카오페이지’를 선보였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야심작이기도 한 이 플랫폼은 누구나 콘텐츠를 제작해 판매할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운영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출시 전부터 CJ E&M 등 대기업이 참여하겠다고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카카오페이지에서 거래되는 콘텐츠는 건당 최저 500원, 월정액은 2000원이다. 소비자에게 크게 부담되는 수준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 한 달 서비스를 진행한 결과 카카오페이지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다. 구글플레이 누적 다운로드 수는 고작 10만명.

사정이 이렇다 보니 카카오페이지에 입점한 콘텐츠 제공자들이 카카오 측에 불만을 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카오페이지에 입점한 한 업체 관계자는 “기대를 많이 했는데 카카오가 마케팅을 전혀 하지 않고 있어 가입자 수가 늘지 않고 있다. 최소 500만명 이상이 이용해야 수익을 낼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CJ E&M 측도 “카카오페이지 전용 콘텐츠(‘유혹의 정석’ ‘뷰:틴 파우치’ 등)가 매출 순위에서는 상위권에 랭크돼 있지만 이용층이 적다 보니 매출액이 크지 않다”고 전했다.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카카오 측에서 해명하고 나섰다. “카카오페이지가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것도 안 좋을 수 있다. 첫 경험이 부정적이다 보면 추가 방문을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버그 등 문제점을 해결하고 완성도를 높이면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설 계획”이라는 게 카카오 관계자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향후 플랫폼 완성도를 높이고 신규 콘텐츠를 보강하면 카카오페이지가 국내 유료 콘텐츠 시장을 활짝 열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차현나 KT경제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자생적으로 생태계를 구축한 플랫폼을 보면 콘텐츠 제공자와 소비자에게 편리한 사용자 경험(UX)을 제공하고, 소비자가 플랫폼과 콘텐츠 제공자에게 애착을 형성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카카오페이지도 이 두 가지 부분을 충족할 경우 승산이 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전자책 업체 북팔의 김형석 대표는 “허영만 작가의 ‘식객2’ 등 유명 콘텐츠만 내세울 거였다면 처음부터 개방형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하지 말았어야 한다.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 콘텐츠를 판매하기보다 카카오페이지에 맞는 소셜 콘텐츠를 개발해야 소비자들이 돈을 내고 구입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by 100명 2013. 5. 27.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