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인터넷 독립언론 뉴스타파 앵커를 맡고 있는 최승호 전 MBC PD가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뉴스타파 스튜디오에서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공동취재 1차 결과물 5번째 명단 공개에 앞서 방송 녹화를 위한 리허설을 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 |
ㆍ시민들의 독립언론 ‘뉴스타파’를 만드는 사람들
“안녕하십니까. 99% 시민들의 독립언론 뉴스타파입니다.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즉 ICIJ가 공동기획하는 조세피난처의 한국인들, 그 다섯번째 시간입니다.”
현충일인 지난 6일 오전 9시40분. 서울 마포구 신수동 한 빌딩 6층에 둥지를 튼 ‘뉴스타파’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20평가량의 스튜디오에선 녹화를 위한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MBC
사무실 한쪽 책상에선 최경영 전 KBS 기자가 서류 한 무더기를 쌓아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주 초 발표를 목표로 취재 중인 인사들에 대한 최종점검 중이었다. 최 기자의 얼굴에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비밀계좌를 개설한 인사 몇 명을 만나러 오늘 오후에도 서울과 경기 지역을 분주히 오가야 하는데 만나줄지 모르겠어요.”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는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ICIJ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국제적인 탐사보도다. 우선 방대한 자료 속에서 한국인을 찾아내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 유령회사라는 게 워낙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뤄지다보니 꼬리를 잡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당사자들에게 확인을 거칠 때도 한바탕 소동을 각오해야 한다. 여간한 인내심과 끈기가 없으면 해내기가 쉽지 않다.
사무실 귀퉁이에서 쪽잠을 잔 후 곧바로 취재현장으로 달려나가는 경우도 다반사다. 올해 입사한 취재부 막내 홍여진 기자는 “밤샘작업이 많아 모든 취재인력이 한 달 전부터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스튜디오나 복도 소파에서 칼잠을 자고 나간다”며 “여기자들은 근처 찜질방을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해 역외탈세를 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인들의 면면은 지난 3주 내내 국내 미디어와 여론을 뜨겁게 달궜다. 지금까지 이수영 OCI 회장 부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 회장과 장남 조현강씨, 조민호 전 SK증권 부회장 부부, 김석기 전 중앙종금 사장과 부인인 연극인 윤석화씨, 전성용 경동대 총장,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씨 등 총 18명의 한국인이 세운 유령회사 및 계좌와 북한 관련 계좌가 순차적으로 발표됐다.
■ 신원 확인 과정부터가 ‘모래밭서 바늘 찾기’
반향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철저한 진상 조사를 통해 조세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한껏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론이 들끓자 지난 5일 국세청과 관세청,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4개 감독·사정당국은 공조체제를 구축해 이들의 탈세 여부에 대한 전면적 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지구상에서 가장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면서 태풍의 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뉴스타파’는 이명박 정부하에서 공정보도를 외치다가 해직되거나 징계를 받은 공중파 방송 출신 저널리스트들이 주축이 돼 지난해 1월 온라인으로 첫 방송뉴스를 공급한 신생 비영리 언론기관이다. 직원수는 28명. 이 작은 언론매체가 거대한 주류 제도권 언론들을 제치고 특종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세피난처 유령회사 설립 대행사(PTN, CTL)의 방대한 내부 고객 정보를 2011년 입수해 세계 46개국 출신 기자 86명과 공조해 분석해온 ICIJ가 한국 측 취재파트너로 뉴스타파를 선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은 BBC와 가디언, 미국은 워싱턴포스트, 일본은 아사히신문 등이 ICIJ의 취재파트너로 참여 중이다. 이들의 1차 분석 결과 170개국 13만명이 세계 10곳의 조세피난처에 12만여개의 유령회사를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토대로 ICIJ는 자료 입수 15개월 만인 지난 4월4일 1차 성과물인 조세회피자 명단을 공개했다.
김용진 뉴스타파 대표는 “보도를 접하자마자 ICIJ에 e메일을 보내 뉴스타파가 한국 측 취재파트너로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받아들여졌다”며 “몇 명의 취재진이 워싱턴 본부로 날아가 수주간 함께 작업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KBS 탐사보도팀을 이끌다 정부에 비판적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부산과 울산 KBS로 표적인사를 당하고 정직 4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그는 올초 역시 KBS 탐사보도의 간판 기자로 손꼽히던 최경영 기자와 함께 KBS를 사직하고 뉴스타파에 합류했다.
“ICIJ는 유럽, 북미 쪽과 우선적으로 파트너십을 구축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그쪽 자료가 워낙 방대하다보니 회원사가 있는 필리핀을 제외하곤 아시아쪽 자료를 분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어요. 중국에서 조세피난처 관련 내국인 보도가 아직 안 나오고, 일본은 일부만 공개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ICIJ 모체인 공공청렴센터(CPI)와 뉴스타파 구성원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돼 있었던 점도 작용했다. 최승호 PD는 “2009년 미국탐사보도협회(IRE)에서 연수를 했고, 김용진 대표와 최경영 기자도 IRE를 거쳤는데, CPI에는 IRE 출신들이 많다”며 “인적 네트워크 면에선 한국의 어떤 언론사보다 가까울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타파의 역할은 한국인 명단을 단순히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1차 분석에서 한국인으로 분류된 245명 가운데 공공의 이익이나 가치,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솎아내고 주제별로 그룹화해 꼼꼼한 취재를 거쳐 관련 정보를 보도자료와 자체 탐사 리포트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단순한 사실 나열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부여를 하는 것 또한 저널리즘의 본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최승호 PD는 “체계적으로 구축된 데이터베이스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누구인지 신원 확인 과정부터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고생스럽다”고 말했다.
“한국인 이름이 나오면 뉴스타파는 주소, e메일 주소 등을 추적해 그가 누구인지 찾고, 신원이 확인되면 ICIJ가 확보한 자료 외에도 한국에서 얻을 수 있는 그에 대한 자료와 대조합니다. 전재국씨도 그가 실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인지를 알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신원 확인이 끝나면 두 팀으로 나뉜 취재진이 직접 당사자를 접촉해서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이유와 목적 등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과정을 거치죠. 쉬운 일이 아니에요. 순순히 실토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다수는 대답을 회피하거나 지방이나 해외출장을 갔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도망가니까요. 취재진들이 그들을 잡으러 다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웃음).”
■ 언론이 면밀히 추적할 땐 ‘속살’ 드러날 텐데 아쉬워
김 대표가 거들었다. 그는 “지난 5월30일 3차 발표 명단에 포함돼 있던 전성용 경동대 총장만 해도 취재진이 학교로, 집으로 일주일간 쫓아다녔는데 만날 수 없었고, 분명히 거주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집에선 ‘그런 사람 없다’고 발뺌했다”며 “명색이 대학총장인 분이 학교에도 아예 안 나오고 피해다니면서 취재진의 진을 뺐다”고 회고했다. 이어 “전 총장의 경우 우리나라 족벌사학의 비리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좋은 사례인데, 대다수 언론들이 그날 함께 발표된 김석기·윤석화씨 부부에 집중하면서 소홀히 취급한 면이 있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전 총장은 관련 보도가 나간 후 사임했다.
“대학총장은 기업인보다 더 엄격한 도덕성이 요구되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이 버진아일랜드와 싱가포르 등에 유령회사를 4개나 만들고 비밀계좌를 운용했어요. 그가 왜 비밀계좌를 만들었을까요. 이걸 언론들이 면밀히 추적해보면 족벌사학의 속살을 고발할 수 있을 텐데 아쉬워요.”
김용진 대표가 6일 황일송·홍여진·최경영 기자(왼쪽부터 시계방향)와 취재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 홍도은 기자 |
취재 성격상 험악한 일도 다반사로 겪는다. 최경영 기자는 “조세피난처 관련 첫 한국인 명단 발표 전엔 사이비 기자 취급을 받기도 했고, 보도 후 파장이 커진 후엔 멱살잡이를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1차 발표 전엔 뉴스타파 인지도가 낮다보니, 협박으로 돈이나 뜯어가려는 사람 취급도 받았어요. 그래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서류를 내보이면 이번엔 ‘나만 그러냐, 왜 괴롭히냐’면서 화를 내죠. 2차 발표 명단에 포함된 재벌회사 전직 임원은 직원들을 동원해 저를 문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걸어잠근 후 카메라 기자의 카메라를 빼앗으려고 했어요. 지금 하는 사업체에 세무조사라도 들어올까봐 두려워서였겠죠.”
얄밉게 구는 사람도 있다. “높은 분들을 취재하셔야지 왜 나 같은 사람을 취재하려 하느냐” “국세청에 자료 안 준다니 겁 안 난다”며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말하는 졸부도 있었다는 것이다.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도 뉴스타파의 몫이다. 최 기자는 “대만 기업의 한국인 기술이사가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만든 것으로 나와 추적해보니 실제 유령회사를 만든 것은 대만 기업이었다”며 “따라서 그 회사의 비리를 추적하는 일은 대만 언론의 몫”이라고 말했다.
뉴스타파는 1차 분석된 한국인은 245명이지만 분석 과정에서 그 수가 조금씩 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처럼 공개할 명단을 걸러내고 취재과정을 거쳐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발표할 계획이다. 애초 못박은 대로 취재과정에서 얻은 자료를 국세청, 검찰 등 정부기관에 제출할 뜻은 전혀 없다고 했다. 이는 뉴스타파가 ICIJ와 맺은 협약사항이기도 하다. 취재과정에서 얻은 자료를 정부 하부조직도 아닌데 정부기관에 제공하는 건 저널리즘 원칙에 벗어난다는 판단에서다. 김 대표는 “이번 조세피난처 프로젝트가 우리나라의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작으나마 기여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조세피난처에 한국인들이 유령회사를 만든 해를 분석했더니 2005년 이후 급증했고 특히 2007년과 2008년 금융위기 때 집중된 것으로 파악됐어요. 서민들은 하루하루 힘겹게 사는데 우리나라 최상위층은 자신들의 재산을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목적으로 국민들 모르게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만든 것으로밖에 볼 수 없죠. 그들의 추악한 도덕불감증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깨어 있는 유권자를 만드는 데 뉴스타파가 기여하고 싶습니다.”
▲ MB 정권 때 해직기자들 모여 첫 방송…
“자본·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정의로운 독립언론 되겠다”
“이명박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기성 방송 뉴스가 제 역할을 못하니까 전국언론노동조합 차원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제대로 된 뉴스를 만들어보자는 움직임이 있었어요. 마침 2010년 이후 해직기자와 PD들이 속출하면서 이들을 활용해 만들면 되겠다고 판단하면서 2011년 말 계획이 구체화된 거죠. 뉴스타파라는 이름은 잘못된 기성 뉴스를 타파하고 올바른 뉴스를 보도한다는 의미예요. 지난해 1월27일 선관위 디도스 사건으로 1회 방송을 했어요.”(이근행 PD)
뉴스타파는 2011년 11월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내 제작단으로 출발했다. 언론노조 대회의실을 사무실 겸 스튜디오로 사용하고 구색만 겨우 갖춘 취재 장비는 언론노조 예산으로 마련했다. 취재진은 월급 한 푼 없이 6개월간 뛰었다. 초기 이근행 MBC PD와 노종면 전 YTN 기자, 변상욱 CBS 대기자(현 콘텐츠본부장), 박중석 KBS 기자 등 지상파 방송에서 활동한 해직·현직 저널리스트들이 주축이 됐다. 그러다 지난해 7월 후원을 받겠다는 선언과 함께 무당파 비영리 인터넷 독립언론으로 거듭났다. 공정 뉴스를 계속 생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올들어 KBS 탐사보도의 간판이었던 김용진·최경영 기자가 사표를 쓰고 뉴스타파에 합류했으며, ‘한국PD대상-올해의 PD상’을 두 번 수상한 최승호 전 MBC PD가 앵커로 영입됐다. 데이터저널리즘 전문가인 권혜진 박사도 함께하며 28명이 활동 중이다. 김용진 기자는 뉴스타파 대표직도 맡고 있다. 비영리 독립언론을 표방한 이유에 대해 최승호 PD는 “자본이나 권력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 보도를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뉴스타파는 홈페이지와 유튜브, 팟캐스트, 포털사이트 ‘다음’을 통해 동영상 뉴스를 공급한다. 1회 방송의 경우 수정본을 합해 유튜브로만 90만명 정도가 시청했고 이후 지난해 4·11 총선 전까지 매회 20만~30만명이 본 것으로 집계됐다. 대선 전 8000명 수준이던 후원자 수는 조세피난처 보도 후 3만명에 육박할 만큼 급증했다. 조세피난처 보도 이후 뉴스타파를 바라보는 기성 언론의 시선에도 변화가 일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성 언론은 뉴스타파가 국정원 심리정보국 소속 직원이 대선에서 트위터 여론 조작을 한 사실을 단독 확인해 보도하는 특종을 낚아올렸음에도 철저히 외면했다.
뉴스타파 멤버 중 최승호 PD, 황일송 전 국민일보 기자 등은 현재 복직소송이 진행 중이다. KBS라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올해 뉴스타파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최경영 기자는 “뉴스타파를 통해 언론이 자본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를 지켜나가면서도 당당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RECENT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