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은 세계 6위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위였지만 유럽 국가들이 국가 차원에서 초고속인터넷 확충에 나서면서 순위가 밀렸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써왔던 ‘IT 강국’이란 표현이 머쓱해지는 순위다. 애플, 구글 등 해외 업체뿐만 아니라 국내 업체들이 내놓는 신제품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소 몇 달 이상 기다려야 만나볼 수 있다. 다른 나라들이 웹 표준화를 부르짖으며 버리는 ‘액티브X’도 여전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다 한국이 전 세계의 IT 흐름에서 고립되는 ‘갈라파고스화’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업체 제품 국내에선 못 사

지난해 10월 구글의 넥서스4가 발표될 때 국내 스마트폰 이용자들은 한껏 들떴다. LG전자가 만든 이 스마트폰은 16GB 모델 가격이 349달러로 당시 90만원 이상이던 국내 스마트폰 가격의 절반 수준이었다. 게다가 사양도 LG전자의 옵티머스 G와 거의 유사해 기대치는 하늘을 찔렀다. 지난해 5월부터 정부가 단말기 자급제를 실시한 터라 국내에 들어올 명분도 충분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 제품의 국내 출시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구글과 LG전자 모두 명확한 이유를 밝히진 않았다. ‘협의 중’ ‘국내 이용자 편의’ 등의 말만 반복됐다. 국내 이용자가 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을 해외에서 구매대행으로 사오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그러다 제품 출시 7개월가량이 지난 지난달 30일에야 국내 판매가 시작됐다. 너무 늦게 나온 탓인지 시장 반응은 출시 초기처럼 뜨겁지 못하다. 한 이동통신 업체 관계자는 “최근 단말기 출고가가 지속적으로 내려가면서 넥서스4의 가격이 메리트가 없게 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갤럭시S4 미니와 갤럭시S4 액티브를 잇달아 발표했다. 오는 20일 런던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제품을 공개하고 유럽 등에서 판매에 나설 계획이다. 하지만 이 제품 역시 국내 출시 여부는 알 수 없다. 삼성전자 측은 “지금으로서는 국내 출시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제품들은 국내 시장을 겨냥해 만든 제품이 아니다. 업체 입장에서는 시장의 수요가 없다면 굳이 내놓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최첨단 기기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한국 소비자들은 이런 상황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달 22일 태블릿PC ‘서피스’를 국내에 출시했다. 서피스 역시 지난해 7월 미국에서 판매가 시작됐다. 국내에는 10개월가량 늑장 출시가 된 셈이다. 최근 시넷 등 일부 외신에서는 크기가 8인치로 줄어든 차세대 서피스가 나올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신제품이 나오는 시점에 재고 처분을 위해 국내에 출시한 것 아니냐는 비난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MS 관계자는 “처음 내놓은 태블릿PC 제품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판매 지역을 늘려가는 상황”이라며 “한국시장을 차별해 늦게 내놓은 것은 절대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표준 무시하고 ‘액티브X’ 아직도 사용

웹 분석업체 스탯카운터에 따르면 올해 5월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 인터넷 브라우저 점유율 1위는 69.9%의 MS 익스플로러다. 2위 구글 크롬(20%)과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는 크롬이 41.4%로 1위고 익스플로러가 27.7%로 2위다. 이미 지난해부터 1, 2위가 바뀌었다.

유독 우리나라만 여전히 익스플로러가 득세하는 것은 ‘액티브X’ 사용과 관련이 있다. 액티브X는 웹브라우저에서 새로운 콘텐츠나 프로그램을 추가할 때 사용되는 프로그램으로 특정 웹페이지에 접속하면 자동 설치된다. 편리하다는 장점은 있지만 최근 들어 악성코드 유포 경로로 악용되면서 사용하지 않는 추세로 돌아서고 있다. MS조차도 “보안, 구동속도 등을 고려할 때 단계적으로 액티브X 사용을 지양하겠다”는 입장이다.

방송통신위원회도 지난해 액티브X를 대체할 새로운 웹 기반 기술을 개발하겠다며 ‘차세대 웹 표준 HTML5 확산 추진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금융기관, 인터넷 쇼핑몰, 정부기관 등이 액티브X를 사용하고 있다. 방통위가 지난해 2분기 200대 민간·행정기관 사이트의 액티브X 사용현황을 조사한 결과 74%가 여전히 액티브X를 사용하고 있었다. 액티브X를 사용하는 이유는 보안, 결제·인증 때문이었다.

최근 민주당 최재천·이종걸 의원 주도로 공인인증제도를 폐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전자금융거래법과 전자서명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정부 주도로 이뤄진 인증제도가 보안상 큰 결함이 있고, 이 과정에서 비표준 기술인 액티브X가 불필요하게 많이 설치된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공인인증 체계에서는 전자서명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를 구현하기 위해 액티브X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픈넷 등 시민단체들은 공인인증서 외에 다른 대체인증기술을 허용하고 정부가 특정기술을 강요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아마존, 이베이 등 외국 온라인 쇼핑몰은 공인인증서가 없어도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주장의 근거다.

김기창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술진보의 속도가 빠른 IT산업 분야에서 정부가 특정 기술이나 특정 서비스를 사용하도록 강요하거나 제도적으로 지원할 경우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나 기술 혁신을 저해하게 된다”면서 “무선인터넷 프로그램규격 위피(WIPI)를 정부가 강요하다가 국내 IT산업에 적지 않은 타격을 가하게 된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by 100명 2013. 6. 8. 0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