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과 밥은 또 하나의 문화 콘텐츠
창조과정 속에서 예술·기술 융합

신의 물방울이라고도 불리는 와인을 주제로 흥미롭고 특별한 전시가 열린 적이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하고 수제 와인 잔을 만드는 리델사가 후원한 전시다. 1975년부터 지금까지 와인이 어떻게 현대화됐는가를 문화산업적으로 접근해 대중과 성공적으로 소통한 전시다. 와인이라는 신의 물방울을 우리가 받아 마시기까지 생산과 소비 과정의 콘텐츠를 관람객으로 하여금 문화적으로 향유하게 유도한다. 와인 향을 느낄 수 있는 미디어아트로 연출된 향기의 벽, 와인문화 탐색, 와인이 만들어지는 자연환경인 테루아르 개념, 대중 매체에서 다룬 와인 이야기, 와인 라벨 전략, 와인을 즐기는 데 필요한 각종 유리공예품, 와인 시음회와 와이너리 투어까지 ‘와인의 모든 것’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면서 캘리포니아 와인산업의 능력을 보여준다.

김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미디어아트학

와인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오랫동안 공존해 온 콘텐츠라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엔 언제나 토양, 기후 같은 자연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또한 날씨에 따라 포도의 질과 양은 달라진다. 하지만 와인생산자는 변화하는 날씨에 조율하는 방안도 마련해 일조량이 부족하면 당분을 첨가하고, 일조량이 과도하면 물을 첨가해왔다. 이렇게 자연과 조율하면서 빚은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 한 병에 600∼800개의 포도알이 들어가는데 그 무게는 약 1kg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수령이 높은 포도나무일수록 포도 송이가 덜 열리며 포도알이 작아 그만큼 풍미가 농축된다. 그래서 수령이 높은 포도나무의 포도에서 빚어진 와인은 확실히 더 깊은 맛과 향이 난다.

포도와 와인처럼 자연과 인간이 오랜 세월을 공존해 온 또 하나의 콘텐츠는 쌀과 밥이다. 일본의 도쿄국제포럼센터에 ‘좋은 먹을거리 프로젝트’로 운영되고 있는 ‘고항 뮤지엄’(밥 박물관)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전시의 예술적 능력에 비하면 그 수준이 많이 낮지만 콘텐츠 산업의 본질적 측면을 일깨울 수 있는 사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볼 만한 곳이다. 쌀의 생산과 소비의 총체적인 창조과정을 미디어아트적인 연출도 적용해 보여준다. 세계 각국과 일본의 쌀 재배지역의 문화지도와 먹거리, 공예품, 화장품 등을 포함해 문화적으로 표현되는 캐릭터 상품까지 전시된다. 또한 이곳에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예품이 각국으로부터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어 쌀과 밥의 문화의 뿌리를 살펴볼 수도 있다.

뮤지엄 안에 있는 ‘고항 카페’(밥 카페)의 식사 메뉴에서도 쌀이 밥이 되는 창조과정을 음미하고 즐길 수 있다. 우리의 막걸리처럼 쌀로 빚어진 일본 술인 사케가 사케 잔이 아닌 와인 잔에 담겨져 테이블 위에 놓인다. 사케 잔보다는 와인 잔이 여러 술을 마시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술잔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항뮤지엄의 특정 부분을 복사한 듯 보이는 한국의 쌀 박물관의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니 어린이 체험관이 나온다. 게임, 동영상, 만화, e북, 캐릭터가 등장한다. 요즘 어린이의 콘텐츠 소비 감각을 아주 낮은 수준으로 보고 만들어진 체험관은 아닌지 조금 염려도 된다. 게임, 동영상, 만화, e북, 캐릭터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이며 문화적 표현을 위한 도구이다. 그릇이 놓이는 상차림과 함께 그릇 안에 담기는 콘텐츠도 중요하다. 가끔 전시나 이벤트 콘텐츠에서 내가 자주 배우게 되는 것이 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사례를 자주 확인한다. 포도가 와인이 되고, 쌀이 밥이 되는 창조의 과정에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 있고 다양한 문화가 발현된다. 문화적 맥락이 결여된 창조의 과정은 콘텐츠 산업으로 성장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두 전시를 거울삼아 다시 확인해본다.

by 100명 2013. 6. 16. 08: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