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복이어서 그런가. 이미 본적이 있다. 상황은 5년 전 10월과 완벽할 정도로 판박이다. 지난 2008년 10월 16일 검찰은 KT를 긴급 압수수색했다. 남중수 당시 사장을 비롯한 KT 경영진의 비리 혐의였다. 이후 딱 20일 만에 남 사장은 납품업체와 계열사로부터 납품 및 인사 등의 청탁과 수억 원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반복되는 전임 정부 인사 밀어내기, 이석채의 사필귀정

2005년 8월부터 재직했던 남중수 사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임명됐고, 연임도 했다. 임기는 2년여 남아있었다. 개인 비리 혐의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당시 남 사장에 대한 수사를 두고 ‘찍어내기’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적잖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 초기이던 당시에는 이른바 ‘좌파 인사 적출’이라고 사회 각 분야에서 전임 정부의 인사들을 밀어내는 겁박이 횡행했었다.

남중수 사장이 밀려나고 들어선 이가 이석채 회장이다. 애초, 유력했던 것은 윤창번 현 청와대 미래전략수석이었다. 하지만 윤 수석이 당시 김신배 SK텔레콤 사장과 처남-매부 사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임명이 보류되는 진통 끝에 이 회장은 KT 대표이사 사장 자리에 올랐고, 이후 회장으로 영전해 지금까지 오고 있다.

   
▲ 남중수 전 KT 사장 (KT제공)
이 과정은 KT의 지배 구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역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KT는 언제나 ‘전리품’으로 여겨졌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민주 정부조차도 그랬다. KT는 항상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이들이 적당한 자리를 차지하는 기업쯤으로 자리매김해왔고, KT 역시 이 정치적 과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역대 KT 사장들의 취임 과정에선 그래서 항상 크고 작은 잡음과 함께 ‘정권과의 교감’이 작용했단 얘기들이 돌았다. 이석채 회장은 그 가장 최근의 그리고 단적인 예이다.

주인이 없기에, 역설적으로 주인이 분명한 KT의 현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하필 KT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KT의 규모와 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KT는 총자산이 24조에 달하고, 임직원 수가 3만 명을 상회한다. 자본금도 1조 5600억 원에 달하는 초거대 기업이다. KT보다 자산 규모가 큰 기업은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롯데, 포스코 정도 밖에 없다. 하지만 KT는 민영화 이후 실질적 지배주주가 없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주인 없는 회사인 셈인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주인이 분명한 회사이기도 하다.

정권 교체기마다 KT 사장 자리를 놓고 치열한 혈투와 암중모색이 벌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권 입장에서 KT 사장은 임명권은 없지만, 반드시 임명할 수 있는 자리이고 해임할 수 없지만 언제든 해임시킬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KT는 사장을 비롯해 관계사까지 30여 개의 사장 자리를 낼 수 있는 기업이다. 티 안 나게 앉힐 수 있는 연봉 1억 이상 자리도 최소한 100개는 된다”고 말한다. 공신들을 흩뿌리기에 이만한 조직과 집단은 대한민국 전체를 따져도 없다.

고질적인 ‘CEO리스크’ 기업이 된 KT

그래서 KT를 아예 ‘CEO리스크 기업’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금융권과 함께 정권의 들고 나감에 따라 CEO의 입지가 파리 목숨인 대표적 기업이란 뜻이다. 이러한 전근대적 광경은 엄청난 구조적 모순이자 그 자체로 심각한 시스템의 부조리다. 우리 사회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굴지의 기업 CEO 자리가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KT가 ‘CEO리스크’를 갖는 기업으로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KT의 사업 영역이 사실상 정부의 보장에 기반 한 ‘특권경제’ 영역에서 속하기 때문이다. 국내 다수의 재벌 기업들도 그러하지만, 흔한 말로 KT는 사장이 누가 되건 상관없이 굴러가는 기업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통신 3사 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부의 논리일 뿐, KT의 사업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확고하다.

예컨대, 스마트폰 가입 경쟁이 극에 달했던 지난 5년간 KT의 매출은 107조 5,004억 원에 달했고,(SK텔레콤이 67조 5,945억 원, LG유플러스가 50조 2,916억 원) 영업 이익은 8조 96억 원으로 SK텔레콤(10조 9천 962억 원)에 뒤졌지만 역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이석채 회장이 아니었다면 이런 수치가 나오지 않았을까? 단언컨대, 아니었을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통신망을 활용해 손쉽게 국민의 주머니를 터는 통신 산업의 행태에서 회장이 누구이냐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특권경제의 기업 이익과 관련해 한 경제 평론가는 “특권경제에 속한 기업은 회장의 자식이나 운전기사나, 심지어 내가 가서 앉아있어도 똑같은 이익을 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고 할 정도다.

특권경제 기업 KT와 이석채라는 문제적 인물

물론, 이 특권경제는 KT가 국가 기간 통신 시설을 운영하는 회사라는 공공성을 갖고 있기에 가능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KT는 공공성을 기반 한 특권기업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문제는 이 공공성을 권력은 ‘전리품’으로 해석하고 있단 것이다. 공공성이란 개념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가뜩이나 희박한 사회적 풍토에서, 특히 권력을 움켜진 자들은 이 공공성을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권력’ 쯤으로 오인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런 상황에서 이석채 회장은 더욱 문제적 인물이다. 2대 정통부 장관을 지낸 이 회장은 정통부 인맥의 맏형이자 정점으로 불린다. 한 통신계 인사는 “박태준 회장이 영원한 철강왕이라면, 이석채 회장은 그에 견줘 통신왕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한다. 사석에서 여전히 이 회장을 ‘장관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이 회장의 이 특별한 존재감은 그가 KT의 특권경제 초석을 놓은 인물이란 점에서 신화화됐다. 이 회장이 정통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 KT의 전신 한국통신은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되었다. 민영화의 출발이었다. 이후 KT는 2002년 완전 민영화되었는데, 말하자면 이 회장은 그 출발점을 마련하고 설계도를 입안했던 인물이었다.

이러다보니 KT 회장에 등극한 이후 이석채 회장의 위상은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견줄 만 했고, 지금은 최문기 미래부 장관이나 이경재 방통위원장인 이경재보다도 앞선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이 회장이 KT 내부에서 ‘공포 경영’을 펼치며 아무의 눈치도 안 보는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상 그가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회장이었단 점을 반영한다. 지금도 민의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불러도 꿈쩍 않는 그의 배짱은 그 권력의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취업 청탁의 황금어장이었던 이석채 체제 KT

이 회장 체제의 KT는 그야말로 ‘취업 청탁의 황금어장’으로 기능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완벽한 사유화가 이뤄진 탓이었다. 고릿적 YS때 인물부터 이명박 정부의 인사들 그리고 최근에는 친박계 낙마자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다양한 이들이 이 회장의 필요와 간택 속에 KT에 자리를 잡았다. 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국감 자료에 따르면, 이석채 회장 체제에서 KT에 뿌려진 고위직 낙하산은 확인된 것만 40여명에 달한다. 그들이 가져간 연봉은 웬만한 중소기업의 매출과 맞먹을 정도이다.

   
▲ 이석채 KT 회장 (KT제공)
이 낙하산들의 향연을 보면, 애초 ‘YS 사람’이었던 이석채 회장은 확실한 ‘MB맨’이 됐다가 올 초부터는 ‘여자의 남자’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홍사덕, 김병호, 김종인 같은 친박계 낙마자들은 통신기업의 정체성과 전문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고위직에 위촉하고 별도의 개인 사무실을 내주며 비서까지 붙여주는 것이 이석채 체제의 KT 경영이다. 그래도 아무런 지장이 없으며 심지어 내부 비판조차 없는 것이 오늘 날 KT의 현실이다. KT는 오히려 이런 영입을 “경력과 경륜이 글로벌 기업 KT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도단적인 설명까지 버젓이 내놓을 정도로 이미 완전히 염치를 잃은 기업이 됐다.

이석채 회장이 자신과 KT에 닥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KT 내부는 물론 업계 전체는 5년 전의 전철을 밟을 것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5년 전 KT도 매출 정체와 경영 실패 그리고 고용 불안이 문제로 지적됐다 더 나빠졌단 차이 뿐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KT는 정권 차원에서 압박을 가하면 회장은 물론 이사회 전체 그리고 경영 자체가 언제든 장악이 가능한 구조라는 점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개인 비리 혐의 외에도 배임과 흉포한 노무 관리에 따른 사회적 눈초리도 뜨거운 상황이다. 오죽하면 ‘죽음의 기업’이라고 부릴 정도다. 명분도 충분하단 얘기다.

문제는 오히려 그래서 이석채 회장 이후이다. 이석채 회장의 퇴진이 새로운 ‘취업 청탁의 황금 어장’ 개장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이석채 회장을 고발한 참여연대와 끊임없이 이석채 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던 KT새노조는 이 회장의 퇴임을 계기로 KT가 공공성에 기반 한 국민의 기업으로 다시 자리매김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그 당연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5년 전 그때보다도 전망은 훨씬 더 어두워 보인다. ‘나쁜 놈’ 다음에 ‘좋은 놈’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한 놈’이 오는 것은 아닌지, 믿을 수 없는 정부의 행보가 벌써부터 두렵다.
 

by 100명 2013. 10. 23.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