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유료방송 보급률은 이미 100%가 넘는다. 거의 모든 가구가 유료방송에 가입해 있는 데다 중복 가입도 많다. 외국과 비교하면 공영방송 수신료도 낮고 유료방송 수신료도 매우 낮은 편이다. 유료방송 시장의 경쟁이 워낙 치열해서 수신료를 올릴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케이블TV 가입자가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IPTV 가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도 최근 3년 동안 나타난 주목할 만한 변화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KBS 수신료 납부자 수는 2178만명인데 유료방송 가입자 수는 2445만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기업이나 사업자가 아닌 일반 가구 가입자는 2016만명. 얼추 따져 봐도 보급률이 121.3%나 된다. 방통위는 전국 1749만가구 가운데 92.1%, 1611만가구 정도가 유료방송에 가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4분의 1 이상이 중복 가입 상태라는 계산이 나온다.

가입자 수만 놓고 보면 유료방송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선 상태에서 서로 가입자 뺏기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양승우 삼성증권 연구원은 “아날로그 케이블 방송에 단체 가입돼 있는 공동 주택 거주자들이 IPTV 등에 추가로 가입하면서 가입자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체 가입이 해지될 경우 사라질 수 있는 허수 가입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유료방송 업계에서는 최근 동일 서비스 동일 규제가 화두다. 같은 시장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케이블과 IPTV의 점유율 규제가 달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케이블 사업자들은 단일 사업자가 전체 케이블 가입자의 3분의 1 이상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에 묶여 있다. 그런데 IPTV 사업자는 전체 유료방송 가입자의 3분의 1만 넘지 않으면 된다. 애초에 기준이 다른 셈이다.

   
 
 
케이블 업계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의 가입자 수는 6월 말 기준으로 356만명. 전체 케이블 가입자 1495만명 기준으로 점유율을 계산하면 23.8%다. 만약 법이 바뀌지 않는다면 CJ혤로비전의 가입자 한도는 498만명, 최대로 늘린다고 해도 142만명 밖에 늘리지 못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만약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돼서 전체 유료방송 가입자 2445만명 기준으로 점유율을 계산하면 14.6%, 최대 815만명까지 가입자를 늘릴 수 있게 된다.

KT의 상황은 정반대다. KT IPTV 가입자는 448만명, 전체 유료방송 시장 대비 점유율이 18.3% 밖에 안 되지만 자회사 KT스카이라이프의 위성방송 가입자 197만명과 위성방송-IPTV 결합상품인 올레TV스카이라이프 가입자 203만명을 더해야 한다. 중복 가입을 빼고 645만명. 점유율이 26.4%로 껑충 뛰어오른다. IPTV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특수관계자 합산 점유율을 적용하면 KT는 가입자를 170만명 밖에 더 늘리지 못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CJ헬로비전이나 KT나 점유율 규제에 명운을 걸고 정치권에 온갖 줄을 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CJ헬로비전은 지역의 군소 케이블 사업자들을 인수·합병해 덩치를 불려왔는데 점유율 규제가 풀리지 않으면 이런 성장 전략이 한계를 맞게 된다. KT는 거꾸로 점유율 규제가 강화되면 올레TV스카이라이프 등 결합상품 판매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수도 있다. CJ헬로비전은 호재가, KT는 악재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다분히 사업자들 밥그릇 싸움 성격이 짙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시장 상황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 케이블이나 IPTV의 콘텐츠 경쟁력이 거의 차이나지 않는 데다 해외에서는 케이블 사업자들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를 끌어들이면서 점유율을 만회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통신 3사들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다. 케이블 사업자들이 저가 아날로그 상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가입자당 매출(ARPU)은 오히려 줄어드는 추세다.

양승우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지상파 방송의 영향력이 상당하면서도 유료방송 보급률이 매우 높은데 이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독자적인 전송 환경을 갖추기 보다는 유료방송 재송신으로 접근성을 높이고 광고 수익을 확대하는 전략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양 연구원은 “케이블 사업자들도 IPTV 사업자들을 의식해 낮은 가격으로 가입자 기반을 확대하고 홈쇼핑 송출 수수료로 돈을 버는 기형적인 수익모델로 성장해 왔다”고 지적했다.

   
유료방송 '점유율'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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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에 육박하는 IPTV의 높은 점유율도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미국이나 유럽은 10% 미만인 나라들도 많다. 해외에서는 케이블 사업자들이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확대하면서 가입자 이탈을 방어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판 ‘코드컷팅’이라는 말도 나오고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의 70~80%까지 IPTV 결합상품에 가입할 거라는 전망도 나오는데 케이블 사업자들은 전략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케이블 사업자들이 최근 짝퉁 디지털 케이블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클리어쾀이나 8VSB 같은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서 화질을 개선하는 궁여지책이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관계자는 “IPTV의 화질과 속도가 크게 개선되면서 이제 케이블과 IPTV의 경계가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면서 “우리도 당연히 디지털 케이블로 옮겨가고 싶지만 당장은 가입자 이탈을 막는 게 시급하다”고 털어놓았다.

김민정 하나대투증권 연구원은 “케이블 사업자들은 권역별 독점 체제를 구축해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성을 보장받고 있었지만 IPTV라는 강력한 대체제가 등장하면서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 연구원은 그러나 ”IPTV법 개정안은 방송통신 융합 시대에 성장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규제로 칸막이를 제거하기 위한 개정안이 오히려 새로운 칸막이를 만들 수 있어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by 100명 2013. 10. 26. 06: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