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명박 낙하산을 밀어내고 박근혜 낙하산이 내려오는 게 아닐까. 이석채 KT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한 뒤로 요즘 KT 분위기는 뒤숭숭하다. 이 회장은 국정조사 증인 출석을 앞두고 도피성 출장을 다녀온 뒤 지난 2일 임직원들에게 사퇴 의사를 담은 전자우편을 보냈다. 이 회장은 “직원들의 고통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솔로몬 왕 앞의 어머니 심정으로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결백하지만 회사를 위해 희생하기로 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KT 관계자에 따르면 이 회장은 5일부터 기한 없이 휴가를 쓰기로 하고 출근하지 않은 상태다. 사실상 경영 공백 상태다. KT는 이르면 11일, 이사회를 열어 이 회장의 퇴임 일자를 확정하고 후임 회장 선임 절차 등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후임 회장이 결정될 때까지 계속 업무를 보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올해를 넘기기 전에 후임 회장이 선출될 것으로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회장이 KT 이사회를 장악한 상태라는 데 있다. 이 회장은 2010년 정관을 개정해 회장 선임 과정에 외부 개입 가능성을 차단했다. CEO(최고경영자) 추천위원회는 7명의 사외이사 전원과 1명의 사내이사가 참여한다. 과거에는 사외이사들과 민간 위원 1명, 전직 사장 1명이 참여하도록 했으나 지금은 이사회=CEO추천위원회나 마찬가지다. 결국 100% 이석채맨들이 모여서 이석채의 후임을 뽑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지난 3일 사퇴 의사를 밝힌 KT 이석채 회장
 
사외이사들 가운데 김응한 미국 미시간대 교수는 이 회장의 고등학교 동문이고 이현락 세종대 교수는 서울대 동문이다. 성극제 경희대 교수와 차상균 서울대 교수 등도 이 회장과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이춘호 EBS 이사장은 사외이사 자격 논란이 일자 이 회장이 “언론 언급과 달리 이춘호 후보는 고결한 인물”이라고 두둔했던 사람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씨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출신의 송도균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은 이 회장이 태평양에 고문으로 재직하던 시절 인연이 있다. 재정경제부 차관 출신의 박병원 은행연합회 회장도 이명박 정부 낙하산 사외이사 가운데 한 명이다. 결국 7명의 사외이사 전원이 이석채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김일영 그룹CC장(사장)과 표현명 T&C부문장(사장) 등 사내 이사 가운데 1명이 CEO추천위원회에 참여하게 된다.

업계에서 거론되는 후임 회장 후보들 가운데서는 방석호 전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과 형태근 전 방통위 상임위원,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 등이 눈길을 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부터 업계에서 후임 후보로 거론됐던 사람들이다. 김동수 전 정보통신부 차관도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KT 출신 인사로는 이상훈 전 사장, 최두환 전 사장(성장사다리펀드 위원장), 홍원표 전 전무(현 삼성전자 사장), 김홍구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사무총장 등도 거론된다.

업계에 떠도는 소문은 무성하지만 결국 청와대의 의중이 결정적이지 않겠느냐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청와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던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희범 경총 회장과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 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내려보낼 거라는 소문도 들린다.

청와대가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에 올랐던 김종훈 전 벨연구소 소장을 접촉했던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청와대가 생각하고 있는 KT 후임 회장은 경륜과 중량감을 갖춘 사람일 거라는 관측이 나돈다. 이 때문에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나 대우전자 사장 출신의 배순훈 전 정통부 장관의 이름도 거론된다. 둘 다 나이가 지나치게 많지만 박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로 볼 때 의외의 인물이 발탁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KT 안팎에서는 삼성전자 출신이 KT 회장으로 내려올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긴장하는 분위기다. 과거 KT가 국내 최초로 애플 아이폰을 도입했을 때 삼성전자의 반발이 심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삼성전자 출신의 KT 회장이 이해상충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해에는 KT가 삼성전자 스마트TV 서비스를 일시적으로 중단해 논란이 됐던 적도 있었다.

KT 관계자는 “실제로 삼성 출신 인사가 회장으로 올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면서도 “이 회장의 퇴진과 후임 인선이 청와대 기획 작품이라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를 드러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창조경제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적인 인물이 내려와 KT를 손발처럼 움직여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판을 뒤흔들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KT 안팎에서는 KT 이사회가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파리 목숨이 된 이석채 낙하산들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거라고 보기 때문이다. 김일영 사장이나 표현명 등이 회장으로 추대되거나 청와대에서 낙점한 인물을 거부하고 의외의 인물을 선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검찰의 무지막지한 전방위 압박 수사의 기세로 봤을 때 이석채 체제가 지속될 거라고 보기 어렵다는 관측에 힘이 더 실린다.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석채씨의 사퇴와 무관하게 검찰에 고발된 배임 혐의는 물론 인공위성 헐값매각, 비자금 조성 등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처장은 “고문이니 자문이니 하는 이름으로 내려온 이석채의 낙하산 울타리들은 물론, 회사 경영에 깊숙이 들어와서 회사를 위기로 몰아넣은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 권력층의 줄대기 인사 등도 이씨와 함께 퇴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 처장은 “KT가 이 지경이 된 데는 CEO를 견제해야 할 이사회가 제대로 역할을 못한 책임이 크다”면서 “이런 이사회가 또 다시 KT의 명운이 걸린 차기 CEO를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안 처장은 “이사회 전원을 교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사내이사들부터 당장 사퇴하는 게 맞다”면서 “CEO추천위원회부터 신망 받는 인사들로 다시 구성해서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을 선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승희 민주당 의원은 성명을 내고 “이 회장의 사퇴가 배임·횡령 등의 책임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비자금 조성과 사익편취 의혹 등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해 엄정한 법집행이 무엇인가 보여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 의원은 “KT 대표이사 자리가 더 이상 정권의 전리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정부의 유일한 역할이라면 국민기업을 이끌 적임자가 정치적 외압에 의해 배제되는 일이 없도록 감시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by 100명 2013. 11. 8. 15: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