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채 KT 회장이 결국 사퇴했다. 시시각각 강도를 높이며 조여 오는 압박을 더 이상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퇴진은 박근혜정부가 출범하면서 줄곧 제기돼 왔다. 시기가 문제였을 뿐 결론은 이미 나 있었던 셈이다.

‘이석채 소동’은 공직과 인사에 대한 권력 최상층부의 인식이 여전히 후진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좋은 예다. 공직을 대선 승리의 전리품쯤으로 여기고, 그 인선은 전문성보다 권력자와 친밀도로 잣대를 삼는 구태가 박근혜정부 들어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권력을 잡으면 따라오는 게 자리다. 혹자는 그게 3000~4000개가 된다고 하고, 혹자는 1만개도 넘는다고 한다. 계량은 안 되지만 그만큼 많다는 소리다. 하긴 죽기살기로 권력을 쟁취하고, 또 그 주변을 맴도는 것도 바로 ‘자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자리는 국가의 안위와 발전이라는 큰 원칙에 바탕을 두고 적임자를 기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권력은 언제나 그렇지 못했다.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배출되자 적어도 이런 유의 인사 후진성은 탈피하지 않을까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낙하산 인사는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전문성이 없는 정치권 인사들이 선거 공신이란 이유로 특정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도 피력했다. 공공기관장 인사가 늦어지는 것이 관료들 낙하산이 많아져 일시 중단했다는 풍문도 흘러나왔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질 만한 대목들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허망한 바람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공항공사 사장에 임명되는 등 전문성과 거리가 먼 인사들이 속속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급기야 “전문성이 요구되지 않는 자리는 정권 공신을 임명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다. ‘우리도 달라지지 않겠다’는 공개선언처럼 들린다.

이 회장은 이명박정부 때 노무현정부에서 임명한 남중수 당시 회장을 찍어내듯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꼭 5년 뒤 검찰의 수사를 받는 것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밀려나왔다. 재임 중 공과(功過)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우리 사람’, ‘내 사람’이 아니면 자리를 비워줘야 한다.

어디 KT뿐이겠는가. 포스코와 KB금융 등 민영화된 공기업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들은 모두 한국 대표 기업들이다. 언제까지 최고경영자(CEO) 리스크에 시달려야 하는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게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알고는 있는지….

정준양 포스코 회장도 청와대에 사퇴를 표명했다는 소식이다. 정부 지분 한 푼 없는 민간기업 CEO의 거취를 청와대에 알릴 이유는 하나 없다. 부끄럽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적어도 정 회장의 자연스럽게 물러갈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그리고 포스코든, KT든 정권의 입김을 배제하고 전문성과 리더십을 갖춘 적임자를 내부적으로 선임할 수 있는 토양전통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렇게 해야 다음 정권에서는 ‘이석채 소동’처럼 볼썽사나운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 그 고리를 끊을 때가 되지 않았나.

by 100명 2013. 11. 9. 0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