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차준홍 기자]
#2003년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법정에 섰다. 법원은 그가 당시 회사에 끼친 손해액(배임액)이 최소 1114억원이라고 인정했다. 여기에 1조5000억원대의 분식회계 혐의도 덧붙여졌다. 최 회장은 1심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2005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형량이 낮아졌다. 1심 선고 후 보석신청이 받아들여져 이미 자유의 몸이던 그는 항소심 판결 후 상고를 포기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10년 뒤인 2013년 최 회장은 또다시 법정에 섰다. 지난해 그를 기소하면서 검찰이 내건 혐의는 회사 자금 465억원을 빼내 개인 투자에 전용했다는 것. 액수만 놓고 보면 10년 전보다 훨씬 작다. 그나마도 한달여만에 모두 반환돼 실질적인 피해자도 없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그때보다 더 큰 고초를 치르고 있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모두 그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최 회장은 아직까지 서울구치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를 대하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태도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최 회장뿐만이 아니다. 현재 법원에서 실형 선고를 받은 대기업 총수 일가는 줄잡아 8명. 최 회장 형제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과 모친인 이선애 전 태광그룹 상무, 구자원 LIG그룹 회장과 아들인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이상 재계 순위순) 등이 그들이다. 이 중 상당수는 이미 항소심까지 완료돼 집행유예 등으로 풀려날 가능성이 더욱 낮아진 상황이다. 현재 몇몇 재벌 총수가 검찰 수사선상에 추가로 올라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대열에 합류하는 총수 일가의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상황이다.

 시계를 2010년 이전으로 잠시 돌려보자. 당시만 해도 대기업 총수들은 설사 구속된다 해도 늦어도 2심 때는 풀려났다. 형량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모두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었다. 법적으로 징역 3년을 초과하면 집행유예를 선고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10년간 선고를 받았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최태원 회장, 박용오·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상 형 확정일자순) 등의 최종 형량은 모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법부는 이들의 행위가 개인 영달보다는 기업 유지 과정에서 불가피한 측면 때문에 이뤄졌고, 이들이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점 등을 양형 참작 사유로 많이 인정해줬다.

 하지만 201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대기업 총수에 대한 관대한 처분은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을 증폭시켰고, 이에 따라 판사들 사이에서 ‘일벌백계’론이 힘을 얻어갔다. 법조계에서는 사법부가 최근 들어 기업범죄의 심각성에 대해 과거와는 다른 인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

 법무법인 바른의 이종범 변호사는 “기업범죄는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저하시켜 정상적 경제활동을 저해하고, 궁극적으로 회사의 존립기반인 자본주의 경제구조 그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며 “최근 들어 법원도 이 같은 인식을 갖고 기업범죄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범죄에 대한 선고형량이 높아진 데는 양형기준도 큰 역할을 했다. 양형기준은 판사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비슷한 범죄의 형량이 고무줄처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현상을 막기 위해 대법원이 외부 인사들과 함께 마련한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대기업 총수 관련 대표적 범죄인 횡령·배임죄의 양형기준은 범죄 액수가 300억원 이상이면 최저 징역 4년 이상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4년 이상의 형량이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다. 어지간한 대기업 범죄의 경우 횡령·배임 액수는 거의 대부분 300억원 이상이다. 실제 판결 내용을 보면 일선 판사들이 양형기준 권고안을 상당히 잘 준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형기준을 벗어나는 관대한 판결을 했다가는 여론의 도마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강경 판결 기조는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사법부가 기업 범죄의 핵심인 배임죄에 대해 폭넓은 인정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 검찰 관계자는 “예전에는 배임 혐의로 기소해도 피고인이 ‘경영상 판단에 따라 내린 결정’이라고 주장할 경우 유죄 판결을 받아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들어 법원이 태도를 적극적으로 바꾸고 있어 검찰도 배임 혐의와 관련해 적극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사법연수원이 발간한 ‘경제범죄론 2013’에 따르면 검찰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과 배임 혐의로 기소(약식기소 포함)한 피고인 수는 2006년 668명에서 2011년 1078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특경가법상 횡령과 배임은 범죄 액수가 5억원 이상일 경우 적용되는 혐의로 수사 대상자가 대기업일 경우 대부분 이 혐의가 적용된다.

 그렇다면 기업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법조계에서는 먼저 총수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법무법인 바른의 윤경 변호사는 “기업범죄는 피해자 양산 등 파괴력이 높고 갈수록 처벌 강도도 높아지고 있는 만큼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건전성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대주주나 경영자들이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by 100명 2013. 11. 26. 1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