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사람들] <3> 영화 <산다> 주인공 중 하나가 된 손일곤 씨

KT 노동 문제는 어제오늘 불거진 사안이 아니다. 세상에 알려진 후 적잖은 시간이 흘렀지만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노동자 연쇄 사망 등 정도도 심각하다. 공공성을 내려놓고 사유화를 택한 후 '신자유주의 교과서'라는 말에 모자람이 없는 길을 걸어온 KT가 자초한 일이라는 지적이 많다. KT의 새 회장으로 누가 선임되든 풀어야 할 문제다. KT와 인연을 맺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이 문제를 살펴본다. <편집자>

KT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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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말, 손일곤 씨의 '삐삐'(무선 호출기)가 울렸다. 호출자는 한국통신(현 KT). 새해에 출근하라는 내용이었다. 1997년 공채에 합격한 후 1년간 기다리던 연락이었다. 연락을 기다리다, 귀농한 선배 집에서 일을 돕던 손 씨에겐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2013년, 어느새 42세의 중년이 된 손 씨는 KT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 <산다>의 주인공 중 한 명이 됐다. 시쳇말로 회사에 찍혔지만, KT에서 버티며 노동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을 지속하는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에 출연했다.

KT와 함께한 15년, 손 씨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일 경기도 부천에서 손 씨를 만났다.

15년 만에 노동 인권 영화 주인공이 된 KT 노동자

손 씨가 한국통신에 입사할 무렵, 한국의 직장인들은 파리 목숨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위기로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IMF 위기로 제대로 된 회사에 자리 잡는 것 자체가 힘든 때"였다. 채용이 확정된 이들의 입사를 보류하거나 취소하는 기업도 여럿이었다. 손 씨가 합격 후 입사까지 1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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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손 씨는 회사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흘간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전화국으로 배치됐다. 교육이 아니라 오리엔테이션이었다. 교육 없이 바로 가는 이유는 그 직전에 명예퇴직으로 사람들이 많이 나가서라고 하더라. 업무를 잘 몰라도, 전화만 받아도 일이 된다고 했다."

손 씨가 배치된 곳은 용산전자상가 뒤편 원효전화국(현 KT원효지사)이었다. 2009년 전남 고흥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700 서비스, 기업용 1588 서비스 등이 손 씨의 업무였다.

손 씨가 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노동조합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고개 숙이고 살았으면 <산다>에 출연할 일도 없었겠지만, 손 씨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IMF 위기가 터진 후 회사는 아무 대책 없이, 해만 바뀌면 사람을 쫓아낼 생각을 했다. 그건 너무나도 잘못된 것 같았다."

손 씨가 첫 출근을 하기 직전인 1998년 12월, 한국통신은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5만8000여 명의 직원 중 1만5000여 명(26퍼센트)을 내보낸다는 계획이었다. 260개 전화국 가운데 84개를 인근 전화국으로 통합하고 114 안내 서비스를 외부에 맡기는 등의 방식으로 조직을 30퍼센트 축소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민영화(한국통신은 2002년 민영화 기업 KT로 탈바꿈했다)를 앞두고 수익성 위주로 조직을 재편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2003년까지 거의 매년, 적게는 800여 명, 많으면 5000여 명씩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런 모습은 이석채 전 회장 시절에도 이어졌다. 이 전 회장이 취임한 2009년, 5992명이 명예퇴직으로 KT를 떠났다. 사상 최대 규모였다. 공공성이 밀려난 자리에 '수익성 위주, 주주 고배당 경영'이 들어선 결과였다.

▲ KT 노동자 손일곤 씨. ⓒ프레시안(최형락)


"해만 바뀌면 사람 쫓아낼 생각을 하는 회사"…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저항했다. 한국통신 노동조합은 2000년 12월 '민영화 반대, 강제 인력 감축 및 일방적 구조조정 중단'을 요구하며 파업을 선언했다. 손 씨도 적극 참여했다.

"명동성당에서 구조조정 반대 농성을 크게 했다. 당시 노조 위원장이 이동걸 씨였는데, 위원장을 비롯한 집행부는 사실 싸울 의지가 별로 없었다. 민주 노조 성향 활동가들이 '회사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노조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느냐'고 압박하고 현장 조합원들도 이에 공감하면서, 집행부가 떠밀려 파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도 '집행부가 제대로 대응을 안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라서 사내 게시판 '노사 소식'란에 사람들이 글을 많이 올렸다. 직원이 4만 명이 넘을 때로 기억하는데, 많으면 1만2000명까지 보고 그랬다." (당시 노조 위원장이던 이동걸 씨는 이명박 정부 때 사회를 뒤흔든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과 관련해 세간의 관심을 모은 인물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 정책보좌관으로 일한 이 씨는 장진수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4000만 원을 건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 씨뿐만 아니라 서유열 KT 사장도 민간인 사찰 사건에 활용된 대포폰을 만들어줬다는 의혹에 휩싸이는 등 KT 인맥들은 이명박 정부의 불법 행위와 관련해 도마에 올랐다. <편집자>)

손 씨는 파업이 끝난 후, 2001년 중징계를 받았다. 처음에 해고 통보를 받았으나 재심을 거쳐 정직 3개월로 조정됐다. 그 사이 손 씨는 114 분사에 반대하는 투쟁에도 동참했다.

정직 기간이 끝난 후 복귀한 손 씨는 2003년 다시 징계를 받았다. 한국통신(KT)이 추진한 '설비비형에서 가입비형으로 유선전화 전환' 문제가 적잖은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던 때였다.

"전환 문제 관련 민원이 많았다. 민원을 받다보면, 시민들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고객들에게 회사가 너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글을 사내 게시판에 쓰고 퇴근했는데, 다음 날 난리가 났다. 상사들이 글을 지우라고 했다. 얼마 후 감사를 받았다. 정직 1개월이었다. 감사 과정에서 '게눈을 어떻게 감추나? 경영진 계좌에 돈이 들어가는 걸 봤나?' 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KT 경영진과 정보통신부 관료들이 국민의 돈을 게눈 감추듯이 감췄다'고 쓴 것에 대한 반응이 그랬다."

2008년에도 손 씨는 징계를 받았다. 연수원에서 교육받던 중 동료 두 사람과 술을 마셨다는 이유다. 징계 이력이 없던 두 동료는 애초에 거론되던 수위보다 낮은 징계를 받았다. 이와 달리 손 씨는 두 번 징계를 받은 이력과 교육 중 집에 다녀온 것('무단 외박')이 가중돼 동료들보다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4년 8개월, 힘들었던 "귀양살이"

2009년 2월, 손 씨는 고흥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울에서 4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남해안이었다. 연고는 없었다. "연고가 없으니 거기로 보내지 않았겠나." 노부모와 아내, 두 아이는 집에 두고 혼자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내려간 고흥에서 보낸 시간은 손 씨에게 힘든 시기로 기억된다. 첫 1년은 견딜 만했다. "민주 노조 활동을 한 것 때문에 눈에 보이게 (배제)하진 않았다. 퇴근 후 선배들이 '혼자 뭐하겠나? 한잔하자'고 하곤 했다. 그런 게 직장 생활의 재미 아니겠나."

2010년, 상사가 바뀌면서 많이 힘들어졌다. 전에 해본 적이 없는 업무가 할당됐다. "플라자라고 하는 일선 창구 업무다. KT 상품 체계가 정말 복잡하다. 그 모든 사항과 관련해 찾아오는 고객들의 요구를 처리해야 하는 자리였다.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창구에서 혼자 해야 했다. 다른 의도가 있는 업무 배치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손 씨를 힘들게 한 건 늘어난 업무 스트레스만이 아니었다. 동료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직장 생활의 재미"가 어느 순간 손 씨에게서 멀어졌다.

"회식이 있어도 연락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석채 회장 취임 후 명예퇴직을 거부하다가 쫓겨 온 A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를 '왕따' 시킨 것 아니겠나. 언제부턴가 퇴근 후 사택에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도 거의 받아주지 않았다. (이유를 대고 거절하기가) 구차하니까 안 받은 것 아니겠나. 몇 번 그러면 나도 비참해져서 연락을 안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끔 함께 마셔준 B씨가 있었다. 이분도 다른 곳 출신인데, 전화하면 내게 꼭 물어봤다. '누구랑 같이 있냐. 주변에 전화국 직원은 없냐.'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왔다. 어느 날 B씨가 상사에게 불려갔다고 한다. '내 안테나가 높다. 그런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마라. 가족이 있는 곳에 가야 하지 않겠나.' 이랬다더라. 무서운 이야기다."

ⓒ프레시안(최형락)

혼자 소주라도 한잔해야 잠이 드는 날이 늘었다. 손 씨는 이러한 상황 변화가 민주 노조 활동과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손 씨는 '강제적 인력 구조조정 반대' 파업에 적극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KT 새노조 조합원이기도 하다. KT 새노조는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 관련 KT의 국제전화 사기 의혹을 폭로한 후 해고된 이해관 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곳이다. KT의 노동 인권 문제 등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그래서 사측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한 상사가 그러더라. '노조 대의원 출마, 포기하면 안 되겠느냐.' 민주파 대의원이 출마하는 지부가 전국에서 몇 군데 안 된다. 그런 곳은 본사 관심선상에 오를 테고, 그러면 자기가 피곤해질 것 같으니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상사는 '나랑 잘 있으면 가족이 있는 데로 보내주겠다'고 하더라."

손 씨는 자신이 조직적으로 차별과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여기고 지방 노동청에 진정을 넣었다. 동료들이 '주말 무급 노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지방 노동청에 이 문제도 제기했다. 그러나 모두 만족스런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아버지 쓰러지셨다' 소식에 '50만 원 택시' 상경, "곁에 있었으면…"

일터에서 동료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맺기 어렵게 된 후 손 씨는 전교조 조합원, 농민회원 등과 어울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외로움을 모두 달랠 수는 없었다. 손 씨는 매주 금요일 저녁을 바라보며 생활했다. 가족에게로 향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금요일 오후 6시 40분에 고흥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순천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다시 집까지 가는 데 6시간 정도 걸렸다. 그렇게 토요일에 집에 도착하면 많이 피곤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싶어 매주 올라왔다."

주말엔 웬만하면 다른 모임에 가지 않고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조금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일요일 밤이면 어김없이 내려와야 했다.

"일요일 밤 11시 반, 잠든 아이들에게 뽀뽀를 하고 집을 나섰다. 막차를 타고 월요일 새벽 순천에 도착해 PC방에 있다가 고흥행 버스를 탔다. 그렇게 내려올 때 기분이, 뭐라고 표현하기가 참 그런데, 묘하다. 고흥에 오면 잊고 일에 매몰되려 했다. 그래야 다른 생각이 덜 들어서다."

올해 열 살인 아들과 일곱 살인 딸은 아빠와 함께 있는 걸 좋아했다. 아빠가 왜 주중에 함께 있지 못하는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이해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다. "딸아이가 집 밖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우린 집이 두 개다. 아빠 집도 있고 엄마 집도 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혼한 줄 알 거다." 손 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손 씨는 이런 생활을 "귀양살이"라고 표현했다. "귀양살이" 중이던 올봄, 큰일이 터졌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퇴근 후, 집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아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데, 아버지가 집에서 쓰러지셨다는 것이었다. 택시를 불러 바로 올라왔다. 택시비가 50만 원 나왔지만, 무조건 빨리 올라와야 하는 상황 아닌가. 내가 곁에 있었으면 더 잘 대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미안했다."

ⓒ연합뉴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 가능한 곳에 발령하는 법 만들어졌으면"

올해 10월, 손 씨는 다시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고흥에서 생활한 지 4년 8개월 만에 부천으로 근무지가 바뀐 것이다. 요즘 손 씨는 "종일 고객들의 욕을 먹는 일"을 한다. 콜센터에서 고객 민원을 1차로 받는데, 거기서 해결되지 않으면 손 씨가 속한 부서로 넘어온다. "막말하는 일부 고객들"을 상대하는 것도 업무의 일부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하고 퇴근 후 오랜 친구들과 한잔할 수 있게 된 건 손 씨에게 반가운 변화다.

얼마 전, 손 씨는 <산다>를 아내와 함께 봤다. "우리 신랑,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고생했네." 손 씨 아내의 소감이다. <산다>는 손 씨 같은 이들에겐 고마운 영화다. 그렇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영화가 현실보다 덜 잔인하다고 하는 활동가들도 있다."

손 씨가 가족의 곁으로 돌아온 직후, 이석채 씨가 KT 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몰락을 자초한 건 이 전 회장 본인이라는 것이 손 씨 생각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소통을 많이 이야기했지만 국민들은 불통이라고 하지 않았나. KT도 마찬가지다. 이석채 전 회장도 소통 전문가라는 청와대 전 대변인(김은혜 전무, 전 MBC 기자)까지 데려와 날마다 소통을 강조했다. 하지만 전혀 안 됐다. 회사가 아주 억압적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서워서 의견을 못 내는 거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회사가 망가졌다. 이걸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누가 다음 회장으로 오든 나아지는 게 없을 거다."

11월 초, 한 일간지에 KT를 "한국판 구글"에 비유하는 기사가 실렸다. 원하는 장소를 직원 스스로 선택해 일할 수 있는 '원격 근무제'를 적극 도입하는 등 스마트 워킹(smart working)을 권장하고 있다며 KT를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귀양살이"를 경험한 손 씨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다. 노동 인권 문제가 심각한 KT에 적합한 평가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연고가 없는 먼 곳으로 발령을 내는 것이 사측에서 직원들을 통제하는 최고의 방법일 거라고 본다. KT만이 아니라 사업장이 전국에 흩어진 곳은 다 그럴 거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거리 내에 발령해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KT 노동자로 살아온 15년, 손 씨는 많은 일을 겪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자부심과 야속함이 교차한다.

"처음부터 이만큼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한 10년 넘으면 중간 관리자도 돼 봐야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소통의 공간인 사내 게시판에 (의견이 있으면) 쓰라고 하니까 쓴 것이고 회의 때 이야기하라고 하니까 이야기한 걸 갖고 사실상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러니 운신의 폭이 줄었다. 그러면서 여기까지 온 거다.

여전히 힘들지만 40∼50대 정규직이 KT에 이만큼이라도 있는 건 명동성당 파업, 114 투쟁 등의 힘이다. 그렇게 일자리를 지키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물론 나를 외면한 동료들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민주) 노조의 기반이 막 무너지던 2006∼2008년엔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나이도 적잖게 들었고 애들도 있는데, 살아야 하지 않겠나."

손 씨는 오늘도 "고객들의 욕"을 먹으며 그렇게 산다.

by 100명 2013. 11. 29. 0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