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정은균 기자]

< 진달래꽃 > 은 김소월의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의 것이 아니다. < 탁류 > 는 채만식의 것이다. 하지만 채만식의 것이 아니다. < 진달래꽃 > 의 7·5조에 담긴 처절한 한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 진달래꽃 > 의 참주인이다. < 탁류 > 의 여주인공 '초봉'에게 연민을 느끼는가. 당신이야말로 < 탁류 > 의 진정한 주인이다. 문학과 문학가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인론'에 담겨 있다.



< 현대문학 > 누리집에 게재된 사과문.

ⓒ 현대문학 누리집 갈무리

모든 문학은 당대 문학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학은 '현대문학'이다. 모든 문학은 모든 당대의, 그러니까 모든 '현대'의 집결체다. 모든 문학은 모든 '현대'의 맨얼굴을 드러낸다. 모든 문학이 밝거나 어두운 그 시대의 모든 표면과 이면을 드러내는 이유다. 당대 공동체의 목표와, 당대 독자의 희망과 절망이 뒤섞여 있는 게 문학이다. 요컨대 모든 문학은 당대 현실 속의 독자 공동체, 나아가 사회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대의 독자·사회 공동체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멘붕' 소식이 지난 며칠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문예지 < 현대문학 > 으로부터 전해졌다. '안녕하지' 못한 우리나라 문학계의 현 주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었다.

'한류'와 '노벨문학상', 표절 시비 등을 빼고 나면 시민들의 관심을 끄는 문단발 소식이 거의 아무것도 없는, OECD 가입국인 대한민국의 저열한 문화 의식과 수준을 전 세계에 알린 '일대 쾌거'였다. < 현대문학 > 은 '한국 문학이 아직 이렇게 생존해 있었어?' 하는 공동체의 조소를 과연 얼마나 심각하게 듣고 있을까.

< 현대문학 > 이 보여준 일련의 행태는, 대한민국이 '수필'을 사랑하는 대통령(박근혜 대통령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이다)의 나라가 맞는지 의심케 한다. 유쾌하지 않은, 한편으로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었다. 아니, 당대의 독자·사회 공동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냈다고 해야 할까. 시대착오적인 '검열'이 있었다. 권력에 대한 자발적인 굴종도 드러났다. 문학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권력(자)의 시녀가 되는 전형적인 모습들이었다.

현대문학상 수상자 2인, '수상 거부'... 편집진 사퇴로도 수습 불가

파문의 시작은 지난 9월이었다. 거기에는 지금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인 박 대통령이 쓴 수필이 있었다. < 현대문학 > 9월호에는 박 대통령이 쓴 수필 네 편과 대통령이 졸업한 대학의 한 명예교수가 그에 대해 쓴 평문이 실렸다. 평문은 < 수상록 > 의 작가 몽테뉴를 빌려와 박 대통령의 글을 찬미한 민망한 글이었다. < 현대문학 > 에 소설 게재를 거부당한 이제하 작가의 말마따나, "혼의 자유라는 테제가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문학도 문예지도 한낱 남루한 패션으로 전락하고 마는" 생생한 사례였다.

파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석연치 않은 정치적인 이유로 작가들의 글이 게재 거부를 당하는 참담한 일이 터졌다. 연재 중인 작품을 일방적으로 멈춰 세운 어처구니 없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항의해 젊은 문인 74명은 지난 16일 < 현대문학 > 기고 거부 선언을 했다. 작품을 연재중인 작가들의 원고 반려도 이어졌다. "비상식적인 기준으로 작품을 제한하고 작가의 메시지를 검열한 것에 대해 분노와 수치심을"(작가 74명의 '우리는 < 현대문학 > 을 거부한다' 선언 중) 느낀 작가들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조치들이었다.

< 현대문학 > 은 지난 17일 누리집에 올린 '드리는 말씀'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이번 사태의 중심인 양숙진 편집주간을 포함해 편집자문위원(김화영, 이남호, 최승호, 이재룡) 네 명의 사퇴 소식이 전해졌다. 나름대로 '문학적인' 처리 방식이었다. 그런데 '드리는 말씀'을 챙겨 읽는 내내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한 번 큰 사과를 드"린다는 말은 있었다. 하지만 그 '큰 사과'에 걸맞은 자기 반성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비난과 오해의 여지가 있는 잘못" 같은 데서는 변명마저 느껴졌다.

시대착오적인 검열과 권력자 찬양으로 촉발된 이번 사태는 문제 당자사의 사과와 사퇴 등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소식이 들려왔다. 제59회 현대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소설가 황정은(소설 부문)과 평론가 신형철(평론 부문)이 수상을 거부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현대문학의 정상화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 있으므로 시상식엔 참석하지 않겠다. 심사위원들께는 죄송하지만 마음이 기쁘지 않으므로 상을 받을 수 없다."(황정은 작가)

"현대문학이 공신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을 반납했다."(신형철 평론가)

- 18일 < 한국일보 > 기사 < 편집주간·위원 전원 책임 사퇴했지만… '현대문학상' 수상자 2명 상 반납 > 중에서

현재 우리나라에는 300여 개의 문학상이 있다. 적지 않은 숫자다. 작가들이 이들 문학상 수상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학계의 풍토가 척박한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학상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더 많은 독자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후속 창작 활동을 펼치는 데 심적·물적으로 귀한 들무새(재료)가 된다. 이런저런 잡음이 없지 않지만 문학상이 나름대로의 존재 의의를 갖는 이유들이다.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



< 현대문학 > 누리집 첫 화면

ⓒ 화면캡처

그래서 현실 속의 문학상은 그 자체가 권위로 군림할 때가 많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문학상일수록 더욱 그렇다. 유명 문인 이름이 들어간 '동인문학상'이나 '김수영문학상', 정통 문예지 이름이 붙은 문학상들의 권위는 그 자장이 넓고 깊다. 하지만 문학상의 권위가 문학 그 자체의 권위는 아니다. 문학상은 그 수상자와 수상작의 권위를 보장해주는 전제조건이 아니다. 한 작가가 유명 문학상을 받았다고 자동적으로 권위 있는 문학가의 위상을 갖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권위 있는 문학상 수상작이 권위 있는 문학작품이 될 개연성은 있다. 문학상 수상 자체가 그 작가의 권위를 담보해주는 '현실적인' 증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문학상이 문학의 권위를 단단히 지켜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상'을 무기로 문학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문학가의 존엄을 해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점에서 황정은과 신형철의 현대문학상 수상 거부는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결정으로 보인다. 문단 내부의 인적 네트워크는 촘촘한 그물망처럼 엮여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의 결정은 수상에서 벗어난 동료 문인들이나 심사를 담당한 이들에게 '죄송'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문학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제 공은 다시 < 현대문학 > 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의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산문 <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 에서 한 말이다. 문학은 문화다. 살아 있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불온해야 한다. 그것은 기성의 모든 권위에 도전한다. 질서와 규율에 저항한다. 권력을 위한 자발적인 순응과 굴종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불온함'이야말로 문학의 권위와 문학가의 존엄이 터 잡아야 하는 지점이 아닐까.

순수문학의 대표 진영이라는 < 현대문학 > 이 진정 살아 있는 불온한 당대문학으로서의 '현대문학'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 현대문학 > 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에게 '꿈'과 '불가능'을 선사하는 권위 있는 문예지가 되었으면 한다.

by 100명 2013. 12. 20. 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