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만 넣으면 스케줄이 자동 생성된다

영화계의 합리적인 현장 운영을 위한 ‘CINE-ERP프로그램’ 공개시연회 열려

뻔하디 뻔한 가상의 CF 하나. 오늘도 제작부 A는 각종 스케줄표를 만드느라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다. 장면별, 장소별, 시간별, 배역별 등등 시나리오 하나를 가지고 A가 짜야 할 스케줄표는 수도 없다. 게다가 아직 손에 익지 않은 엑셀 프로그램 탓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중이다. 안 그래도 촬영 때문에 챙겨야 할 게 많은 A에게는 컴퓨터를 놓고 씨름하는 이 시간이 죄스러울 정도다. 이때 다른 영화의 제작부 B가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는 A 앞에 나타난다. “무슨 일이야?” “스케줄표를 짜는 게 너무 복잡해서 미치겠어.” “아니, 자네는 아직도 엑셀로 스케줄표를 만드나? 자, 여기 CINE-ERP프로그램을 써보라고!” B의 말에 놀란 A는 거듭 큰소리로 되새긴다. “CINE-ERP프로그램?”

합리적인 현장 운영을 위해 지난해 5월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CINE-ERP프로그램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동국대학교충무로영상센터가 공동설립한 주식회사 씨네이알피서비스의 작품인 이 프로그램은 시나리오 표준양식과 자동스케줄생성기, 스탭들의 이력과 급여관리를 비롯해 예산관리 시스템을 디지털화하여 통합한 것이다. 지난해 7월 영화노사협약 발효와 함께 출퇴근 관리프로그램을 앞서 공개했던 것에 이어 5월28일 열린 공개시연회에서는 시나리오 편집기를 비롯해 스케줄러 프로그램과 CINE-ERP사이트가 소개됐다. 프로그램 개발을 주도한 아이필름의 오기민 대표는 “아직은 약간씩 불편한 점이 있는데, 차후에 업그레이드할 예정이다. 많은 사람들이 활용하면서 업그레이드에 필요한 예산책정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가상의 러닝타임까지 계산해주는 시나리오 편집 기능

CINE-ERP프로그램의 첫 번째 단계는 ‘씨네한글’이란 이름을 단 시나리오 편집기다. 아래아한글을 제작한 한글과컴퓨터가 개발한 ‘씨네한글’의 핵심은 신 넘버와 지문, 캐릭터, 대사가 각각 다른 방식의 텍스트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작가는 각각의 단축키를 이용해 신 헤드와 지문, 캐릭터 이름, 대사를 적는다. <추격자>를 예로 들어보자. ‘#.4 초소 앞. 밤’이란 신 헤드를 적은 뒤 엔터키를 치면 바로 지문을 쓸 수 있는 상태로 커서가 옮겨간다. 그런 뒤 엔터를 치면 커서는 화면의 가운데로 옮아간다. 캐릭터 이름을 쓸 수 있는 상태다. 그리고 다시 엔터키를 치면 대사를 쓸 수 있다. 이런 양식으로 한편의 시나리오가 완성됐다고 가정하자. 이 상태에서 씨네한글은 여러 가지 리포트를 생성한다. 우선 흔히 영화 제작현장에서 쓰이던 신, 등장인물, 장소, 시간 등의 항목별 리스트가 자동으로 생성된다. 이 리스트에는 항목별로 모여진 장면들의 시나리오를 소리내서 읽었을 때의 시간과 대사만 읽었을 때의 시간이 계산되어 기록된다. 그리고 이 시간 기록은 다시 가상의 러닝타임으로 합산된다. 작가 입장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시간으로 계산할 때 유용하다. 만약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이내에 첫 사건을 터트리고 싶다면 혹은 <추격자>의 경우 영민과 중호가 추격을 벌이는 시퀀스의 분량을 미리 가늠해보고 싶다면, 사용할 수 있다. 불편한 점을 꼽는다면 작가의 취향대로 서체와 자간, 포인트를 바꿀 수 없다는 것. ‘씨네한글’에서 생성한 정보를 그대로 스케줄러로 입력시키기 위해서는 표준양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스케줄 자동구성뿐 아니라 로케이션 DB 구축도 가능

스케줄러는 말 그대로 스케줄 구성을 용이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씨네한글이 생성한 신 리스트를 스케줄러에 입력시키면 역시 신, 장소, 배우, 시간별로 구분이 되어 나타난다. 스케줄을 짜야 하는 제작부원과 연출부원은 이때 크랭크인 날짜와 크랭크업 날짜를 설정한 뒤, 한회차에 카메라를 세팅하는 횟수나 한회차에 찍을 시나리오의 페이지 수를 설정한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우선순위로 할지는 알아서 한다. 이 정보를 받은 스케줄러는 장소별, 시간별을 고려해 시나리오를 분석한 뒤 페이지 수나 카메라 세팅 수에 맞춰서 회차를 결정해 리포트를 생성한다. 물론 촬영현장이 언제나 정해진 스케줄만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생성된 리포트를 기본으로 나머지 변수에 의한 스케줄 변경은 직접 수정해야 한다. 여기에 신별로 촬영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등록하는 ‘신 브레이크 다운’을 미리 설정하면 한번의 수고로 많은 스케줄표를 감당할 수 있다. 배우별 연락처와 사진(조·단역 포함), 장비와 소품별 담당자와 연락처, 그리고 촬영장소의 이미지도 등록이 가능하다. 감독이 장면마다 따로 코멘트를 추가하거나, 장면 설명에 도움이 될 만한 이미지도 첨부할 수 있다. 만약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장소를 헌팅했다면 그 정보를 미리 등록할 수도 있다. 오기민 대표는 “이렇게 등록된 자료를 모아서 각 지역 영상위원회와 함께 로케이션 DB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스탭들이 키워드를 검색하면 관련 장소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예산이 필요한 문제다.

스케줄러에서 모든 일정을 챙겨 넣었다면 이제는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촬영용 달력을 생성할 차례다. 미리 설정한 휴일부터 날짜마다 찍어야 할 신 넘버와 설명이 자동으로 기입된다. 장면 설명과 장소, 필요한 소품, 어제 찍은 장면과 다음날 찍어야 할 장면 등이 기재된 일일촬영계획표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슈팅스케줄, 브레이크 다운 시트, 로케이션 리스트도 각각 따로 생성되며 각 팀을 위한 스케줄 리스트도 따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편하게 만든 스케줄표를 제작부원이 일일이 스탭과 배우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면 부담은 그리 줄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완성된 스케줄 파일을 CINE-ERP사이트에 전송할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스탭들이 각자의 아이디로 이 사이트에 접속해 스케줄표를 확인할 수 있다.

정확하고 세밀한 인사·예산 프로그램도 지원

씨네한글이 작가, 스케줄러가 제작부원과 연출부원에게 직접적으로 유용한 프로그램이라면 CINE-ERP사이트는 모든 스탭을 비롯해 제작사와 투자사까지 사용할 수 있다. 스탭들은 자신의 급여를 확인할 수 있고,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스탭들의 근태를 관리하고, 예산사용처를 파악할 수 있다. 투자사는 제작사로부터 예산안을 받는 게 용이하며 직접 집행할 수도 있다. 직접 문서에 사인할 필요없이 이곳에서 전자결제도 가능하다. 이 사이트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작사가 기업회원으로 가입해 제작에 들어가는 작품을 등록해야 한다. 그런 다음 스탭들을 개인회원으로 가입시켜 미리 등록한 작품의 카테고리에 끌어들인다. 스탭별로 미리 계약한 내용에 따라 시간급적용, 포괄적용, 도급적용을 설정할 수 있다. 이때 씨네이알피서비스쪽은 스탭들에게 영화인 카드를 발급한다. 스탭들이 카드를 들고 현장에 비치된 일명 ‘똑똑이’ 단말기에 출퇴근 시간을 체크하면 이 정보는 CINE-ERP사이트로 전송된다. 근태관리 페이지에는 그날 현장에 모이기로 한 콜타임부터 출근시각, 퇴근시각, 선작업(촬영 전 준비)과 후작업(촬영 뒤 정리) 시간, 그리고 지각 여부가 기록된다. 또한 이곳에서는 다음날 콜타임이 정해질 경우, 스탭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휴대폰에 문자를 보낼 수 있다. 이 비용은 공짜가 아니다. 제작사마다 문자캐시를 구입해서 이용해야 한다.

CINE-ERP사이트에서 제작진들이 가장 공들여 마련한 것은 예산안 프로그램이다. 기존에 여러 투자사와 제작사가 제작한 150개의 예산안을 분석해서 뽑아낸 1007개의 예산안 항목이 등록되어 있다. 이것을 통해 예산청구서를 만들 수 있는가 하면 사용내역도 정리가 가능하다. 심지어 기존에 영수증을 서류철에 붙여서 보관하던 것에 착안해 영수증을 붙이는 서류양식도 엑셀 파일로 출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직 여러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고, 더 보완해야 할 항목들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CINE-ERP프로그램은 “굳이 이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세심하게 제작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이 IT강국의 기세를 떨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발명품인 것은 아니다. 스케줄러는 기존에 할리우드에서 이용되고 있는 무비매직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한 것인데다, 통계프로그램인 SPSS의 기능을 차용한 것이고 씨네한글은 아래아한글의 기초에서 제작됐다. CINE-ERP사이트는 여러 기업들이 외주로 이용하고 있는 급여정산사이트가 모델이다. 하지만 스케줄을 짜야 하는 스탭들의 밤샘작업,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불가피한 신경전, 그리고 제작사와 투자사간의 불신 등 촬영현장의 불가피한 잡음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많이 사용하고, 불평하면서 업그레이드할 일만 남았다.

by 100명 2008. 6. 3.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