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韓食) 세계화 막는 엉터리 영어메뉴판

기사입력 2008-05-31 02:50 |최종수정2008-05-31 09:19

외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이 출입구에 세워놓은 메뉴판.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영어 메뉴가 한식의 세 계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유황오리→sulfur duck… 콩비지찌개→bean curd refuse stew…

황당한 직역 많아 외국인들에겐 '난수표'

메뉴판에 재료등 간단한 설명 달아줘야


한국관광공사는 영어 홈페이지의 식당 소개란에서 유황오리를 '설퍼 덕(sulfur duck)'으로 번역해 놓았다. 유황오리가 '유황 섞인 사료를 먹인 오리 요리'임을 감안할 때, '설퍼 덕'은 독극물인 유황이 든 요리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출입구에 커다란 메뉴판을 세워놓은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 30일 낮 이 앞을 지나던 미국인 여성 미누 모바레즈(Mobarrez)씨에게 '콩비지찌개'의 영어메뉴를 읽어보게 했다. "빈커드 리퓨즈 스튜(bean curd refuse stew)? '리퓨즈(거부하다)'는 뭐죠?" 그녀는 "어떤 음식인지 모르겠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리퓨즈'가 명사로 쓰이면 '레퓨스'로 읽고 '쓰레기, 찌꺼기'란 뜻이 된다. 두부를 만들고 남은 비지를 그렇게 번역했으나, 결국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메뉴가 됐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음식평론가 김순애씨는 "음식에 '유황'이나 '찌꺼기' 같은 단어를 쓰는 건 황당하고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연간 외국인 관광객 수가 600만을 넘는 한국의 식당 메뉴판을 엉터리 영어가 장악했다. 대부분은 황당한 직역(直譯)에 따른 것이다. 외국인에게 낯선 한식을 친절히 설명해야 할 영어메뉴가 오히려 혼란을 주는 셈이다.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이런 영어 메뉴판부터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황당한 단어, 황당한 직역

엉터리 영어메뉴의 주범은 엉뚱한 단어와 무리한 직역(直譯)이다. 인사동의 또 다른 한식당은 녹두전을 '그린 그램 팬케이크(green gram pancake)'라고 써놓았다. '그린 그램'은 녹두의 다른 이름이긴 하지만, 거의 쓰지 않는 단어다. 영국인 앤디 사이먼(Simon·24)씨는 "왜 무게 단위 '그램'이 들어갔는지 궁금하지만, 주문하기는 두렵다"고 말했다.

많은 식당이 순두부찌개를 '소프트 토푸 스튜(soft tofu stew)'로 쓴다. 그러나 이 번역엔 '고춧가루'라는 주요 재료가 빠져있다. 미국인 모바레즈씨는 "부드럽고 담백한 두부 요리인 줄 알았는데 매운 음식이라니 놀랍다"고 말했다.

외국인들에게 한식은 발음도 어렵고 외우기도 쉽지 않다. 된장찌개(doenjang-jjigae) 같은 메뉴는 난수표처럼 보인다. 푸드 스타일리스트 최지아씨는 최근 박사 논문 '한식에 대한 뉴욕 식도락가들의 인식 연구'에서 "뉴요커들은 '한국 음식은 발음하기 어려워 여러 번 들어도 기억에 남지 않는데 철자도 낯설어 메뉴 읽기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고 말했다.


◆바르고 맛있는 번역을

메뉴 번역이 우수한 곳으로는 삼청각, 용수산, N타워(옛 남산타워) 등 대형 한식당이 꼽힌다. 삼청각 김연수 이사는 "한국에 있는 외국 언론인에게 메뉴를 감수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식당들은 영어메뉴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내 D 한식당은 메뉴판 제작업체에 번역도 맡긴다. 그 결과 '순두부'를 '언커들드 빈 커드(uncurdled bean curd)'로 표기했다. '굳히지 않은 두부'란 뜻이라지만, '커드'가 '굳힌 것'이란 뜻이어서 결국 '굳히지 않은 콩 굳힌 것'이란 정체불명의 음식이 됐다.

관광공사는 작년 '외국인관광객을 위한 음식메뉴 및 접객회화' 책자를 6000부 인쇄, 배포했다. 누구나 관광공사 홈페이지(www.vist korea.or.kr)에서 이 인쇄물을 다운로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광공사의 번역은 "영어는 알지만 음식을 모르는 사람이 한 것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한 '외국인을 위한 한국음식안내'는 '맛깔스런' 번역으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총 발행부수 1만3000부 중 1만1000부를 재외한국공관과 국내 유관기관 등에 배포해, 존재 여부를 아는 식당조차 드물다.

◆영어메뉴 표준화 필요

메뉴 번역은 "음식 이름을 로마자 표기하고 간단한 설명을 달아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최지아씨는 "외국인들은 마늘, 생강, 파, 젓갈 같은 재료를 설명해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먹어보고 싶도록 글맛을 살린 번역이라면 금상첨화다. 음식평론가 김순애씨는 총각김치를 '베철러 김치(bachelor kimchi)'라고 번역한다. '총각'이란 뜻의 단어 '베철러'를 써서 궁금증을 일으킨 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설명하는 식이다.

한식을 세계화하려면 발음하기 쉬운 이름으로 영어 메뉴를 표준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뉴욕의 일부 일본식당에서는 한식의 '전'을 '지지미(chichimi)'란 이름으로 팔고 있다. 최지아씨는 "많은 서양인들이 '기무치'를 일본 음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에 '지지미'란 이름으로 전을 뺏길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5. 31. 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