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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공개
기사입력 2008-05-27 22:34
"태극기 깃대 처음엔 오른쪽"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정착한 현재의 태극기는 그 이전에 나온 태극기와 구도가 많이 다르다.
붉은색과 파란색이 교차하는 중앙 태극 문양은 그 교차 모양이 현재와는 반대인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주변 네 귀퉁이에 배치된 건(乾)ㆍ곤(坤)ㆍ감(坎)ㆍ리(離) 위치 또한 현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연구성과는 이런 의문의 일단을 깃대 위치의 변화에서 풀 수도 있다는 시사를 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7일 서울 대우재단 제2세미나실에서 개최한 제243회 월례연구발표회에서 한 교수는 논문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박영효 태극기.1882)와 외아문 제작 국기(1884)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를 통해 깃대 위치가 변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현재 태극기를 비롯한 각국 국기는 그 깃대는 왼쪽에 배치하고 깃발은 오른쪽에 두는 것이 관례지만, 태극기가 처음 제작돼 활용되기 시작한 1880년대 무렵만 해도 이와는 반대로 깃대가 깃발 오른쪽에 배치됐다고 한다.
그 근거로 한 교수는 영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최근 발굴한 두 종류의 태극기 자료 즉, 1882년 11월 제작 박영효 태극기와 1884년 6월10일자로 조선 주재 영국 총영사 애스턴이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에게 보낸 '조선국기'(Corean National Flag) 등을 들었다.
이 중에서도 '조선국기'에는 태극기 오른쪽에 깃대가 명확히 표시돼 있다.
한 교수에 의하면 비단 이뿐만 아니라 같은 1880년대 작품인 '시사신보'라는 잡지에 수록된 조선국기 그림이라든가 유길준의 '상회규칙'에 수록된 '국기' 또한 같은 배치를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태극기가 그 이후 어느 시점부터 깃대 위치가 왼쪽으로 바뀐 것이다.
한 교수는 이런 깃대의 위치 변화가 태극기의 앞뒷면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런 주장에 대해 독립운동사연구소측은 "초기 태극기 문양이 지금 기준으로 언뜻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유를 깃대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박영효 태극기'..최초 국기 놓고 학계 논란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박영효의 태극기'냐 `고려국기(高麗國旗)'냐.
최초의 국기가 어떤 것이냐를 놓고 학계의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1883년 3월 조선의 국기로 채택된 태극기는 수신사 박영효가 1882년 9월25일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태극기 제작 경위와 최초의 태극기 형태 등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7일 개최한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보고회'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역사학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이른바 `박영효 태극기'가 국기로서의 자격을 갖춘 최초의 태극기라고 주장했다.
'박영효 태극기'는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던 중인 1882년 11월1일, 당시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가 주일 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한국의 국기가 될 기(a flag said to be The National Flag of Korea)'라는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첨부돼 있다.
한 교수는 ▲고종이 외교고문에게 하사했던 데니태극기(1890년) 등 19세기말-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태극기들과 모양이 유사한 점 ▲일본 정부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에 들어 있었다는 점 ▲태극기 안에 가로 세로 규격이 정확하게 명기된 점 ▲ 지금까지 태극기 원형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대청국속 고려국기'(大淸國屬 高麗國旗)와도 바탕색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제외하고 똑 같았던 점 등을 근거로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는 점은 이처럼 명백한 만큼 최초 국기 논의를 끝내고 한 발 더 나아가 그 원형을 발견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자"고 주장했다.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를 정면 반박했다.
김 교수는 "태극기는 조.미 조약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당사국인 조선과 미국, 양국의 교섭을 주관한 청나라가 협상의 주체였다. 일본은 객체일 뿐이다. 이에 따라 일본 측 자료는 방증자료는 될지언정 사실을 입증할 주요 자료는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반면 1883년 3월에 만들어진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었다. 조선 정부가 국기를 그려 청국에 보낸 것이다"라며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의 문서에 명기화 돼 있지만 박영효 태극기는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게재돼 있다. 어느 것이 신뢰할 만한가"라고 반문했다.
고려국기의 명칭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다.
한 교수는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태극기 중 음양 속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은 고려국기 밖에 없다. 청국이 `대청국속 고려국기'라고 명칭뿐 아니라 모양마저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조선정부가 그려서 보냈다고 외교문서 첫머리에 나오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며 반박했다.
최초의 국기가 어떤 것이냐를 놓고 학계의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1883년 3월 조선의 국기로 채택된 태극기는 수신사 박영효가 1882년 9월25일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태극기 제작 경위와 최초의 태극기 형태 등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7일 개최한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보고회'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역사학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제작 국기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이른바 `박영효 태극기'가 국기로서의 자격을 갖춘 최초의 태극기라고 주장했다.
'박영효 태극기'는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던 중인 1882년 11월1일, 당시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가 주일 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한국의 국기가 될 기(a flag said to be The National Flag of Korea)'라는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첨부돼 있다.
한 교수는 ▲고종이 외교고문에게 하사했던 데니태극기(1890년) 등 19세기말-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태극기들과 모양이 유사한 점 ▲일본 정부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에 들어 있었다는 점 ▲태극기 안에 가로 세로 규격이 정확하게 명기된 점 ▲ 지금까지 태극기 원형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대청국속 고려국기'(大淸國屬 高麗國旗)와도 바탕색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제외하고 똑 같았던 점 등을 근거로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는 점은 이처럼 명백한 만큼 최초 국기 논의를 끝내고 한 발 더 나아가 그 원형을 발견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자"고 주장했다.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를 정면 반박했다.
김 교수는 "태극기는 조.미 조약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당사국인 조선과 미국, 양국의 교섭을 주관한 청나라가 협상의 주체였다. 일본은 객체일 뿐이다. 이에 따라 일본 측 자료는 방증자료는 될지언정 사실을 입증할 주요 자료는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반면 1883년 3월에 만들어진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었다. 조선 정부가 국기를 그려 청국에 보낸 것이다"라며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의 문서에 명기화 돼 있지만 박영효 태극기는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게재돼 있다. 어느 것이 신뢰할 만한가"라고 반문했다.
고려국기의 명칭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다.
한 교수는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태극기 중 음양 속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은 고려국기 밖에 없다. 청국이 `대청국속 고려국기'라고 명칭뿐 아니라 모양마저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조선정부가 그려서 보냈다고 외교문서 첫머리에 나오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며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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