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끼고 사는 대한민국

기사입력 2008-05-20 02:21 |최종수정2008-05-20 07:29


[중앙일보 김기찬.한은화]

공무원인 이모(42·경기 수원)씨의 주말은 침대 위에서 TV를 켜는 것으로 시작된다. TV를 보다 졸리면 낮잠을 잔다. 초등학생인 두 딸에게 끌려나가다시피 해 놀이터에 잠깐 나가지만 이내 다시 TV 앞에 앉는다. 이씨는 “휴일이라고 가족과 뭘 해보려고 해도 마땅한 것이 없다”며 “아내에게 ‘TV를 끌어안고 산다’는 핀잔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서울 목동에 사는 김순영(44·가명)씨는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에 가면 케이블TV 리모컨을 집는다. 지나간 드라마부터 오락 프로그램까지 채널을 돌려가며 본다. 5, 6시간은 넘기는 게 보통이다. 친구와 얘기할 때도 드라마 주인공이 소재다.

한국인이 TV에 빠져 있다. 2004년 7월, 주 5일 근무제 도입으로 여가 시간이 많아졌지만 대부분을 TV 앞에서 보내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서베이리서치센터가 실시한 ‘2007 한국종합사회조사(KGSS)’ 결과다. 조사는 지난해 6~8월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남녀 1457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 결과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여가활동은 ‘TV·DVD 시청(5점 만점에 4.6)’이었다. 그 다음은 ▶음악 듣기(3.7) ▶전화 수다(3.6) ▶인터넷·컴퓨터(3.4) ▶운동(3.3) ▶친구와 만남(3.2) 순이었다.

또 조사 대상들은 시간이 나면 자기 계발보다는 쉬는 쪽을 택하고 있다. 여가가 생기면 주로 휴식을 취하고(3.5) 자기 계발을 한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2.5점).

양종회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인들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여가를 활용하는 방법에 익숙지 않다”며 “최근 젊은이를 중심으로 미술이나 뮤지컬·여행처럼 다양한 여가 활동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소수”라고 말했다.

◇여가가 오히려 스트레스=대기업에 다니는 직장인 원모(43·경기 용인)씨는 토요일이 와도 별로 즐겁지가 않다. 주5일제 초기에는 매주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원씨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나가기가 힘들다”며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놀러 가자고 조르지만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 역시 주말이면 TV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원씨는 “가족이 바라는 걸 못 해 주는 스트레스에 TV를 보다 보면 오히려 몸이 더 피곤하다”고 털어놨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동우 대구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쉬는 데 급급하다 보니 능동적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인이 여가 활동을 하며 느끼는 만족도는 크게 낮다. 100점 만점에 53.4점이다. 가족 관계 만족도(76.8점)는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삶에 대한 만족도(60.7점) ▶행복감(63점)은 높지 않게 나타났다. 소득 만족도는 45.7점으로 낮았다. 이런 분석은 통계청의 사회통계조사에서도 나타난다. 2000년 조사에서는 국민의 68.4%가 여가 활동이 불만족스럽다고 응답했으나 그 비율이 2004년 72.7%, 2007년 78.4%로 높아졌다.
by 100명 2008. 5. 20. 08: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