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혼’이 없는 ‘문화식민지’
창의성 실종된 ‘혼혈문화’… 美 소호의 실험성, 日 긴자의 품격은 어디에

아메리칸 그래피티(American Graffiti). 직역하면 ‘미국인의 낙서그림’쯤 되겠지만, 1990년대 초반 서울 압구정동에서 한때 잘 나간 가라오케 술집의 이름이었다. ‘아메리칸 그래피티’는 그 자체로 압구정 문화의 상징이다. 미국식 이름에 일본식 문화의 짬뽕. 미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이상한 퓨전.

사실 ‘압구정 문화’는 80년대 도쿄 긴자(銀座)나 하라주쿠(原宿)풍의 카페나 부티크, 술집 등이 신흥부자 동네인 압구정동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갈망한 젊은이들은 예쁘고 독특한 이국풍의 카페를 그들만의 사교무대로 삼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늘어난 카페와 술집들은 현대-한양 아파트 건너편 단독주택가를 독버섯처럼 잠식해 들어갔다. 70년대풍의 고급주택들은 이렇게 해서 하루가 다르게 개조되었고, 속칭 ‘압구정동’이 다시 탄생했다.

그러나 압구정동은 90년대 초반 M-TV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다시 대대적인 변모를 한다. M-TV의 뮤직 비디오에 자주 등장하는 흑인 하위문화가 음악은 물론 댄스, 패션, 건축, 외식산업, 스포츠(NBA나 ‘스트리트 농구’의 대유행도 M-TV의 수입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거의 전 지구적 영향을 미치면서 압구정동에도 실시간대의 ‘미국 냄새’가 실리기 시작했다. 90년대 초반 버블 경제 덕택으로 일찍 유학을 떠날 수 있던 유학생들이 여름이나 겨울 방학을 맞아 압구정동에 ‘복귀’할 때마다 그곳은 때론 ‘레게의 거리’로, 때론 ‘힙합의 거리’로 몸살을 앓았다. 압구정 후미진 골목들에 뉴욕의 소호(SOHO`:`South of Houston St.의 약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래피티가 조금씩 늘어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압구정의 정체성은 바로 이러한 혼혈에 있다. 문화의 다접종교배(多接種交配)로 인한 혼혈이 오늘날 압구정 문화를 형성하였다. 이는 길 하나 건너편인 청담동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압구정동이 10대들의 ‘그저 그런’ 놀이터로 퇴색하고, 그런 것에 짜증이 난 옛 ‘압구정 오렌지’ 출신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짓기 위해 그들 표현대로 ‘럭셔리(luxury)하고 고지어스(gorgeous)’한 청담동으로 엑소도스 했다고 하지만 ‘품격이 다르다’는 것 외에는 압구정동과 청담동의 변별점이 없다. 청담동 역시 또 하나의 압구정동일 뿐. 청담동에 이른바 퓨전 음식점들이 ‘뭔가 근사한 고급음식의 이미지’를 풍기며 번성하는 것도 이 지역의 태생적 혼혈주의를 상기하면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청담동을 포함해 압구정동은 긴자와 소호의 문화적 식민지인가. 그러나 압구정은 긴자가 아니다. 소호는 더 더욱 아니다. 이 지역에 화랑이 늘어난다고 해서 소호의 화랑가, 그곳의 예술정신과 견주는 일은 너무나 턱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압구정은 긴자도 아니고 소호도 아닌 그 어떤 공간을 만들었는가. 압구정이라는 장소와 공간은 우리의 도시와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by 100명 2008. 5. 19. 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