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처한 시점은 숙종 중기와 비슷"

기사입력 2008-05-19 03:22 |최종수정2008-05-19 06:44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대통령 자문 미래기획委 주제발표

경제·문화로 패러다임이 바뀌어 가고있는 시대에

문화 대국 지향해야 비전


"지금은 숙종(肅宗) 중기쯤 와 있다고 봐야죠."

취임 석 달째를 맞은 정옥자(鄭玉子·66)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6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위상을 조선시대에 비유해 평가했다. 과천 청사 집무실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세 점과 명나라 화가 팔대산인(八大山人)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조선 후기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정 위원장은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자문 미래기획위원회에서 〈선진 일류국가를 위한 건국 60년사〉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兩亂)으로 큰 상처를 입었던 조선왕조는 17세기에 경제적 재건과 자부심 회복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견제와 균형, 상호 감시체제가 확립됐고 국가 청사진이 제시됐죠."

바로 그 모습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의 참상을 겪은 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통해 국가 재건의 기틀을 갖춰 온 대한민국의 '건국 60년사'와 통한다는 것이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갈 무렵이 바로 '숙종(재위 1674~ 1720) 중기'로, 지금 우리가 처한 시점과 비슷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제는 문화대국을 지향해야 할 때

그렇다면 '재건기'를 끝낸 18세기부터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가 됩니다. 탕평정치의 안정기를 맞아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스스로 문화의 중심국이라는 조선중화(朝鮮中華) 사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현재 우리의 비전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세계는 군사와 정치의 제국주의 시대에서 '경제'와 '문화'로 패러다임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문화 대국을 지향할 때입니다. 경제 능력이 필요조건이라면 문화 능력은 충분조건이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고품격이 되려면 국민의 문화능력이 높아져서 생활방식의 향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녀는 앞으로 미래기획위원회의 '민간 위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미래기획위원회 발표에서 건국 60년사를 '국민 모두의 승리와 성공의 역사'라고 평가하셨습니다. 현대사 전공자가 아닌데, 국사편찬위원장 자격으로 말한 겁니까?

"요즘 들어 역사가 대단히 이데올로기화하지 않았습니까? 좌(左)편향에 이어 우(右)편향적인 역사 인식이 출현했는데, 극과 극은 모두 위험합니다. 균형과 통합의 역사 인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발표 요청을 받고 '그게 꼭 국사편찬위원장으로서 할 일인가'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위원장 자리 자체가 나라를 위한 마지막 봉사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역사는 자부심과 창조적 활력의 원천'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순기능이지요. 물론 역사는 수치심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역사의 거울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겠어요? 17세기 국가 재건기에 우리는 '평화를 지향하는 문화대국'의 길을 택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사관으로 보면 문약(文弱)한 나라라고 하겠지만, 지금의 패러다임으로 보면 '평화' '경제' '문화'라는 중요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의 역사 인식은 지나치게 자기 비하 쪽으로 쏠렸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가 그런 말도 할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변방 종족이 아니었다"

―지난 정부 때는 역사학자로서 '역사가 너무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하셨지요.

"좌파 역사관은 기본적으로는 자기반성에서 출발한 비판적인 역사 인식입니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다 보니 자기비하적이고 친(親)북한적인 성향을 띠게 됐지요. '기회주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패배했다'는 역사 인식은 기가 막힐 정도로 편향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걸 극복하고자 나온 뉴라이트쪽의 책 역시 일제에 의해 비로소 근대화가 이뤄졌다는 식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개방과 세계화의 능력을 갖추지 못한 변방 종족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국사편찬위원회를 어떤 방향으로 이끄실 생각인지요?

"활력을 되찾을 것이고 근·현대사쪽 인원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을 겁니다. 일반인들이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알 수 있도록 많은 것을 개발할 생각입니다. 《삼국사기》 《고려사》 《비변사등록》 같은 옛 자료들의 원문과 번역문을 계속 인터넷에 띄울 겁니다."

―역사의 대중화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군요.

"얼마 전《조선왕조실록》 전문(全文)을 무료로 공개한 뒤로 사람들이 역사를 대하는 모습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사료 원문을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궁중암투만 다루던 사극 드라마도 이젠 개혁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 동안 사극을 전혀 안 보다가 요즘은 좀 봐요. 이제 학자들도 '교수를 위한 논문' '연구실을 위한 논문'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알맹이가 들어 있으면서도 아주 수려한 논문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문·사·철(文史哲)을 겸비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도 늘 얘기하고 있어요."

정옥자 위원장은

1981년 서울대 국사학과 전임강사가 된 뒤 조선 후기사 연구로 학계와 일반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최초의 여성 규장각 관장' '최초의 여성 국사편찬위원장'이 돼 화제를 모았다. 6·25 전쟁 때 청평호수를 건너다 아버지와 세 여동생을 눈 앞에서 잃는 비극을 체험한 뒤 '평화사관'의 역사 인식을 줄곧 견지해 왔다. 그는 아직도 전쟁영화를 보지 못하고 비행기 소리에도 놀란다고 한다. 결혼 뒤 10년 동안 전업주부였다가 30대 중반에 다시 공부를 시작해 교수가 됐으며, 1986년에는 전두환 정권의 정권 연장 기도를 반대하는 서울대 교수들의 서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열린 미래기획위원회 회의에서 '건국 60년사'를 주제발표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과천 집무실에서 인터뷰했다. /유석재 기자
by 100명 2008. 5. 19. 0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