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가 보다가 내가 죽을 것이야! 어느 IPTV 중독자의 고백

기사입력 2008-05-15 17:03


살다 살다 이렇게 살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요즘 아무 때나 보고 싶을 때 본다는 IPTV 때문에 방구석에 처박혀 지내며 사흘 밤낮을 내리 깨어 얻은 깨달음이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공연까지 온갖 콘텐츠를 유랑하다 폐인 직전에 이른 어느 IPTV 중독자로서 고백한다. 나 돌려 볼래~ 밤새도록!

두 달쯤 된 일이다. 친구 고아무개 양 집에 놀러 간 건. 분당 오피스텔에 사는 고 양은 내 주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랜 벗이자 싱글녀. 가구도 별로 없는 허허벌판(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평수가 엄청 큰 건 아니다. 걔나 나나 월급쟁이에 비슷한 처진데, 젠장 배 아파) 그녀의 집에서 유난히 눈에 띈 것은 36인치 LCD TV.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이상한 단말기 한 대. 그걸 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일이 그렇게 되려 했는지 그만 한눈에 쏙 들어와 버렸다. “야, 저거 뭐냐?”라고 묻자 고 양 왈, “내가 저거 때문에 요즘 주말에 밖엘 못 나가.”

누가 고 양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나?

내 친구 고 양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그놈, 소문은 들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실체를 확인하기는 처음인 IPTV 셋탑 박스였다. 뭐, 엄청난 보물 상자라고 할 수 없는, 평범하고 네모난 모양새였으나 그것이 영악한 요물이었음을 진정 난 몰랐던 것이다. 그날 밤 고 양과 나는 영화를 봤다. IPTV로. 아카데미시상식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였음을 감안해 고른 영화는 마리온 코틸라르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긴 감동 만발 영화 <라비앙 로즈>. 극장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그 위력적인 목소리를 들으며 흘렸던 눈물을 또 흘리고 싶어서 기꺼이 리모컨을 들었다. 최신작 요금 1,800원을 내라는 안내창의 확인 버튼도 단숨에 클릭해버렸다.

근데 1,800원이라니. 비싼 거 아냐? 내가 돈 내는 건 아니지만. 평범한 직장인 고 양은 오히려 담담했다. “괜찮아. 옛날에 비디오나 DVD 빌려 보는 값하고 비슷하잖아. 요즘 비디오가게 어디 눈에 보이데? 이걸로 보면 연체료도 안 물고 맘 편해, 야.”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신작은 부리나케 업데이트되고 요금이 부과되지 않는 공짜 콘텐츠도 많으니 간혹 극장에서 놓친 영화를 돈 내고 IPTV로 본다 한들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순간 ‘연체료의 황녀’로 비디오 가게를 먹여 살렸던 나의 음울한 과거가 흉부를 압박해온다.

여기서 한 술 더 뜨는 고 양. “IPTV 무료 체험 기간이라 난 3개월 동안 공짜로 보고 있어. 그거 아니? ㅁㄱTV 3개월 체험 기간 끝나면 정식으로 서비스 신청하라고 하는데, 그때 하는 사람도 있고, 안 하는 사람도 있어. 신청하면 매월 8,000원인가 하지 아마? 근데 ㅎㄴTV로 갈아타겠다며 버티면 또 무료 체험 3개월 준다니까. 그리고 3개월 지나면 신청 안 하겠다고 하고 ㅎㄴTV 무료 체험 3개월로 갈아타면 된다는 거. 그럼 계속 공짜로 몇 개월을 주욱 보는 거야. 내 주변에 그런 사람 엄청 많다 너.” 이야아, 요령 하나는 타고난 그녀. 그런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거니? 에디트 피아프의 풍운의 삶이 서린 ‘라비앙 로즈’를 들으면서, 고 양의 생활의 발견에 힘입어, 나도 그만 IPTV의 바다에 발을 담그고 말았다. 아뿔싸.

선택과 집중의 묘미

처음엔 안 되는 줄 알았다. 디지털 케이블 방송에 유료 채널까지 신청해서 1백 몇십 개 채널을 돌려 보고 살아왔던 터. IPTV까지 들여놓으면 다 에러 나는 거 아냐? 쫑 나는 거 아냐? 라는 무식한 생각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IPTV 셋탑 박스를 설치하러 온 기사님 한심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신다. “뭔 에러?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거라 상관없어요.” 말을 말 것을. 그리고 그날 내 손이 쫑 났다. 리모컨 돌려 보느라.

영화기자의 직업본능을 십분 발휘해 시작은 영화부터. 숨겨왔던 나의 진실 중 하나는 남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다닌 <카모메 식당>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그때까지 못 봤다는 것이었다. 금요일 오후 창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솔솔 맞으며 평안의 극치를 담은 영화 <카모메 식당>을 눌렀다. 게다가 그 영화는 공짜였다! 시집도 안 가는 공짜 근성이여. 물론 정식 서비스를 신청하면 월 8,000원 안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아무튼 영화를 보곤 진짜 핀란드에 확 가고 싶었다. 식당을 해보고 싶었다. 주인공이 만드는 커피처럼 나도 커피를 만들고 싶었다. 어지간히 감화, 감동한 나머지 정신이 출장 나간 데다, 불법 다운로드라는 어둠의 경로가 아니어도 영화를 TV로 다운로드 받아 답답한 컴퓨터 모니터가 아닌 커다란 TV 화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주전부리를 옆에 두고 푹신한 쿠션에 기대어 널브러진 채 볼 수 있다는 것, 화장실이 급하면 중간에 멈출 수 있고, 지루하면 32배속까지 돌려 볼 수 있다는 것,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총이 나를 어떤 피안의 경지로 몰고 갔다.

아직 공짜 콘텐츠들이 70% 정도다 보니 잘 고르면 줄기차게 영화를 볼 수 있다. <파괴지왕> <서유기 월광보합> <서유기 2: 선리기연> <가유희사> <가유희사 1997>등 주성치의 과거 영화들을 하루 만에 섭렵하며 희희낙락 일요일을 날려버리는 일도 이젠 일상의 한 풍경. 밤 새워 ‘금주의 신작’으로 올라온 한국영화, 외화들을 온통 쓸고 나면 동이 터오고 출근의 아침이 밝아온다. 야속한 월요일, 주말에 TV 시청으로 혹사당한 온몸은 근무 중 낮잠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유혹적인 게 영화뿐이랴. 평일에도 온갖 메뉴와 정보를 보기 위해 퇴근 후 IPTV 리모컨의 확인 버튼을 누르던 내 엄지손가락엔 몇 주 만에 확실히 굳은살이 박였다. 마감 때문에 못 봤던 수많은 드라마들과 개그 프로그램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신천지 세상이 있으니 어찌나 안심이 되는지. 이젠 수, 목 마감 체제에서 장안의 화제인 드라마, 업계에서 더더욱 매료된 드라마 <온에어>를 보러 촐싹거리며 집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황금어장>을 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느긋할 수 있다. 다음날 아침이면 잽싸게 업데이트를 해놓는 IPTV 업계 담당자들의 노고 덕분이다. 업체마다 업데이트 시간이 다르긴 하지만 향후 격한 경쟁으로 나날이 속도 경쟁은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어쩌면 그렇게들 업데이트에 혈안이 돼 있으신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대한민국의 빨리빨리 주의는 여기서도 적용된다.

때때로 죽여주는 톱가수의 옛 공연 실황이나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둘러싼 심도 깊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음, 뭔가 배우고 있어, 라고 여기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다. 국내 시합이든 해외 시합이든 온갖 경기들을 망라해놓은 스포츠 콘텐츠들을 둘러보면 그나마 스포츠 광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아마 가정이 있는 스포츠 광이었다면 일찌감치 이혼당했을 것이다. 요즘 첨단족은 방구석에 처박혀 자폐적으로 살아가는 히키코모리라는데, 이런 페이스로 가다간 그 대열에 합류하는 건 시간문제다. 4월의 마지막 주말엔 아예 TV를 틀어놓고 리모컨을 손에 들고 잠이 들었다.

빨리빨리 다운로드의 세계

3주 전, 나날이 인간관계를 허물어가며 밤마다 IPTV 삼매경에 빠지는 내 증상에 오염돼 아는 후배 한 명이 가입자가 됐다. 요즘 IPTV 가입자 수가 급속도로 늘었다는데, 후배는 나와 다른 타사의 IPTV를 신청해 서로 정보 교환에 나섰다. “먼저 런칭해서 그런지 ㅎㄴTV의 경우 콘텐츠가 훨씬 많은 것 같은데요.”, “어이구, ㅁㄱTV가 그걸 두고 볼 것 같니? 금방 따라잡을 거야.”, “근데 ㅁㄱTV는 드라마 업데이트 시간이 좀 늦던데. 담당자들이 일찍 퇴근하나 봐요?”

실제로 IPTV 대표 업체인 이 두 회사는 아주 사활을 걸고 콘텐츠를 그러모으고 있는 중이다. 후발 업체들이 생겨나긴 하겠지만 이 둘의 싸움은 매주 티가 난다. 그래서 우리 둘 다 마음에 안 드는 게 하나 있다. 과거엔 비디오 속에 심어진 호환, 마마 어쩌고 하는 공익 영상을 보는 게 스트레스였지만 요즘엔 IPTV들이 자체로 만든 홍보 영상을 메뉴 화면에 줄기차게 띄워놓고 선전을 하는 통에 스트레스다. 제일 못 믿겠는 건 ‘아이들에게 교육적이기 때문에 전 하루 종일 OOTV를 켜놓고 있어요’라고 하는 어느 어머니의 홍보성 동영상. 그 동영상이 뜰 때마다 어머님, 정말 그러세요? 아드님 폐인 되기 딱 좋은데요. 적당히 틀어주세요. 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다 근질댄다. 그래도 여전히 IPTV의 바다에서 헤매는 자에게 이 공간은 새로운 오아시스다. 멀티플렉스에서 간신히 걸려 있는 걸 확인한 다음날 바로 떨어진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를 그 주말에 업데이트해줬을 때. 딱 이런 심정이었다. 심. 봤. 다.

잘 찾아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업데이트된 옛날 미드나 중드(중국 드라마), 추억의 애니메이션들도 많다. 얼마 전 <스피드 레이서>에 관한 기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아무래도 이 영화의 원작 애니메이션 <마하 고고고>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하나 싶어 인터넷을 몇 시간째 서핑하면서 자료를 뒤지고 있다가 1967년작의 오프닝 동영상이나 보고 난 후 포기하는 심정으로 TV를 켰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IPTV를 뒤지는데, 애니메이션 섹션에 <달려라 번개호>라는 제목이 버젓이 올라와 있지 않은가. 다운로드 받아 보니 <마하 고고고>의 영문 더빙판인 <스피드 레이서>에 자막을 달아놓은 버전을 <달려라 번개호>라는 이름으로 올려놓은 것이다. 그날의 내 심정도 세 글자로 요약된다. 심. 봤. 다.

400만 명을 돌파하고 3월 중순 극장에서 내려온 한국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2주 전쯤 ‘독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한 IPTV에 업데이트됐을 때는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제작사에 판권료로 얼마를 줬기에? DVD 출시와 동시에 업데이트되거나 DVD 출시 이전에 극장에서 내리자마자 업데이트되는 영화들이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인다.

최근 한국영화들이 외화에 비하면 예전보다 훨씬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걸 보면서 설마, 부가판권 시장의 돌파구를 여기서나마 찾으려는 건가,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사실 작금의 상황에선 불법 다운로드를 잡고, 다운로드 콘텐츠를 유료화할 수 있는 지름길로 보이긴 한다. 그리 되면 좋긴 하겠지만. 한국영화 제작사들이나 외화 수입사들이 어떤 기준으로 IPTV와 계약하는 걸까. IPTV 같은 중개업자들이 열심히 손을 뻗치고 한국영화산업은 죽을 쑤는 요즘, 패키지로 싼 값에 넘기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쿨하고 멋지게 계약을 하는지. 영화진흥위원회 연구원들은 이런 거 리포트로 안 쓰나?

이상한 요금의 나라

한동안 IPTV를 보다 보니 느끼는 바가 있다. 큰 TV 화면으로 인터넷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지만, 그거 활용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아무래도 IPTV는 동영상의 바다. 그 바다의 과금체계란 게 어찌나 희한한지. IPTV 업체 홍보팀 직원도 아니니 낸들 그 기준을 빠삭하게 알 리는 만무하지만, 영화 콘텐츠를 즐겨 보는 입장에선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요금 부과의 대전제는 대중성이다. 당연하다. 극장에서의 흥행작, 시청률 높은 드라마, 개그 프로그램과 쇼 프로그램, 최신 게임이나 신작 다큐멘터리들을 비싸게 받는 건 이해는 간다. 그러나 작지만 알찬 영화, 걸작이지만 입소문을 타지 못한 영화는 여지없이 그냥 볼 수 있다! <색, 계>와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줄곧 1,800원을 받아도 영화 마니아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데스 프루프> 같은 영화는 늘 무료 콘텐츠에 속한다. 고전영화, 작가영화들은 역시나 찬밥. 자본의 논리가 그렇지 뭐. 1,800원, 1,000원, 500원, 무료 순으로 차등되고, HD급과 DVD급 화질로 차별되는 세상. 덕분에 난 놓쳤던 걸작들을 새록새록 챙겨 보고 있지만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작은 영화의 운명이 어쩐지 서글프다.

다사다난했던 3개월 무료 체험 기한이 끝나가고 있다. 친절한 나의 친구 고 양이 알려준 대로 ㅎㄴTV로 갈아탄다고 협박해 3개월 연장하고, 그 다음엔 ㅎㄴTV 무료 서비스로 또 3개월, 앞으로 6개월은 더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세월이 가는 걸 이런 걸로 느끼다니. 날이 갈수록 느는 건 살과 요령이요, 주는 건 체력과 시력이다. 폐인 모드에서 벗어나 인간관계를 복구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내성을 키울 수 있을 듯하다. 나도 살아야지.

마음속으론 오늘도 이렇게 기도한다. ‘IPTV 업체들이 콘텐츠 구입을 위해 피 튀기게 싸우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더더욱 후딱후딱 신작을 업데이트하게 하여 주시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극장에서 내린 영화들도 삽시간에 업데이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능하면 무료 콘텐츠를 대거 늘려주시고, 아무쪼록 업체들의 홍보 전략을 전격 교체해 무료 체험을 연장케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by 100명 2008. 5. 16. 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