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삶을 제약하는 것들을 깨는 사람”

기사입력 2008-05-13 00:56


[한겨레] IPA 서울총회 연설 파무크, 황석영과 ‘경계와 조화’를 얘기하다

전통적 가치로서의 동양과 새로운 가치인 서양의 충돌, 민족주의와 서구 지향성 사이의 긴장과 갈등, 근대 민족국가를 세우면서 겪었던 내부의 격렬한 진통.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경계와 조화’라는 주제에 이미 친숙했던 한국과 터키의 작가는 할 얘기가 많았다. 12일 개막한 ‘제28차 국제출판협회(IPA) 서울총회’의 기조 연설자로 한국을 방문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무크(56)와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경계를 평생 넘나들며 살아 온” 한국의 대표 작가 황석영(65)씨가 대담을 나눴다. 파무크는 터키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스란히 살려 동양과 서양을 대비시키며 자국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작품을 선보여 왔으며, 200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두 사람은 강남 교보빌딩에 마련된 대담장에서 ‘경계와 조화’라는 커다란 주제 아래 문학이란 무엇인지,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서 생기는 경계를 어떻게 조화롭게 이끌어가야 하는지 등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대담은 문학평론가인 김동식 인하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됐다. 이날 대담장은 휴일임에도 몰려 온 200여 관객들로 가득 찼다. 20대 초반에서 30대의 젊은 독자들 사이에 머리가 희끗한 중년과 노인들이 한데 섞여 ‘경계와 조화’ 속에 대담을 경청했다.

두 작가는 우선 “작가란 금기를 깨는 사람”이라는 데 동의했다. 파무크는 “책상 앞에 혼자 앉아서 글을 쓴 35년 동안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경계를 발견했다”며 “작가는 금기돼 있는 것들, 삶을 제약하는 것들을 깨서 일상화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적 금기도 있겠지만, 작가는 가슴에서 나오는 진정성을 동력 삼아 숨겨진 미적 금기를 깨는 사람”이라며, 정해진 공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적 세계를 추구하는 작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에 황석영씨도 “내가 여태까지 썼던 작품은 모두 경계를 넘나들고, 경계를 깨거나, 경계에 속박당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경계는 나의 평생이며, 사실 한국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분단이라는) 실재하는 경계 속에 살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계, 국가적 경계와 우리 안에 내면화돼 있는 여러 경계를 뛰어넘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다원주의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작가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오르한 파무크…소재가 국내인지 국외인지 상관없어, 마음 속 우러나온 대로 글쓰는게 중요

황석영…다원주의 속 조화 이루는게 작가 역활, 나는 세계의 도처가 문학적 고향인 셈


이들은 동양과 서양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신의 경험을 들어 적극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황석영씨는 “파무크 선생이 <내 이름은 빨강>에서 보여준 새로운 다중화자 서술 방식은 우리 민담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 낯설지 않았다”며 “우리 젊은 작가들은 프랑스와 독일, 미국 소설을 흉내내는데, 자기만의 언어와 방법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세계적인 현실을 우리 고유의 양식에 담아 내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오래된 정원> <바리데기> <심청> 등의 작품에서 우리 판소리와 민속굿, 전통설화를 끌어와 고대와 현대의 경계가 넘나드는 작품들을 써 왔다”고 설명했다.


파무크는 “작품을 쓸 때 서양에서 수입한 것들을 터키의 전통적인 것과 함께 버무린다는 점에서 문학적 방법론에 있어 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라며 “<검은 책>에서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적 신비주의 알레고리를 포스트 모더니즘과 결합시켰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소설의 소재와 주제가 국내인지 국외인지, 전통적인 것인지 서양적인 것인지는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35년 동안 작가로 생활하면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빚지고 있는 전통은 없다.”

두 사람은 터키와 한국 모두 외국에 사는 자국민들이 많아지고, 그만큼 국내로 들어오는 외국인도 많아지는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파무크는 “문화적인 민족주의와 정치적인 민족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하기 때문에 문화적인 민족주의는 당연한 것이지만, 정치적인 민족주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표를 얻어내려는 수법에 불과하다.” 그는 “유럽 기자들과 인터뷰하면 항상 ‘독일에 있는 터키인들은 왜 우리처럼 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며 “그러나 독일 내 터키 사람들의 문제는 독일의 문제이고, 마찬가지로 터키에 사는 소수자들의 문제는 터키의 문제”라며 우리 내면의 인종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석영씨는 “베를린 망명 시절 남한에서는 지명수배자가 됐고 북한에서는 외부인이 되는 무국적자 경험을 하며 두 국가의 민족주의 실체를 봤다”며 “내가 ‘세계 시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민족은 어떻게 하냐’고 얘기하는데, 작가는 국경과 민족, 국가에 연연해하지 않는 존재이며 작가에게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했다.

자신의 문학적 고향을 묻는 질문에 파무크는 자신이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란 ‘이스탄불 토박이’라고 답했으며, 황석영씨는 만주에서 태어나 남한, 일본, 북한, 베를린 등을 돌며 산 ‘외박이’라고 말했다.

“콘래드, 나보코프, 나이폴처럼 언어, 국민, 문화, 나라, 대륙, 더욱이 문명을 성공적으로 바꾸면서 글을 쓴 작가들이 있다. 그들이 창조적 정체성을 유배 혹은 이주에서 얻었던 것처럼, 나는 평생 이스탄불에 매여 살았고, 도시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 됐다.”(파무크)

“나는 땅에 뿌리를 박은 사람이 아니고 심리적 고향들을 돌아다니는, ‘외박이’ 뿌리를 지닌 사람이다. 세계의 도처가 문학적 고향인 셈이다.”(황석영)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대화를 이어가던 두 사람은 “종이와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설명하는 사람은 항상 존재하며, 인류가 계속되는 한 문학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아 확인하며 대담을 마쳤다.
by 100명 2008. 5. 13. 0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