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남편, 회사 공금 들고 '바다 이야기'에 또 빠졌다

기사입력 2008-04-29 03:11 |최종수정2008-04-29 06:31

27일 오후 5시쯤 경기도 안양시 안양역 근처의 한 건물 2층에 있는‘바다이야기’게임장에서 게임기 앞에 앉은 손님들이 게임에 몰 두해 있다. 조백건 기자

2년전 전국 휩쓸던 사행성 도박 게임 다시 기승 주택가에도 '진출'… 업자 "투자비 20일이면 회수"

지난 23일 오후 6시쯤. 서울 종로구 종로3가 지하철역 주변의 뒷골목. 낡은 회색 재킷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이모(여·42)씨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골목을 돌아 다니고 있었다. 이씨는 골목 곳곳에 철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남자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남편을 찾고 있었다.

"혹시 이런 사람 보신 적 있으세요?"

이씨의 남편은 성인오락실 불법도박 '바다이야기'에 빠져 지난 17일 회사 공금 1000만원을 들고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다. 2006년 전국을 도박장으로 만들다시피 한 바로 그 게임.

"남편이 회사 공금이든, 아이들 학원비든 돈만 생기면 며칠 동안 사라졌다가 오락실에서 몽땅 탕진하곤 했어요. 회사 공금 다 써버리기 전에 찾지 않으면 큰일 나요."

이씨는 예전에 '바다이야기'를 하고 있던 남편을 찾아낸 한 빌딩 지하 1층의 오락실 철문을 두드렸지만 굳게 잠긴 철문은 꿈쩍 하지 않았다. 이씨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은 현장을 둘러본 뒤 "수색영장 없이는 함부로 철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갈 순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20여분 뒤 경찰관이 건물 관리인 협조를 얻어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1개월 전 경찰 단속에 걸려 폐업한 오락실이었다.

불법도박 오락기 '바다이야기'가 부활하고 있다. 2006년 대대적인 단속 이후 사라졌던 바다이야기 오락실이 최근 들어 다시 주택가 골목까지 침투했다.

◆주택가 지하에서도 바다이야기

21일 오후 9시쯤 경기도 안양시 평촌동 지하철역 주변 9층 빌딩 앞. 문지기로 보이는 중년 남성에게 "게임 할 데 없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히 '고래' 잘 나오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줬다.

전화를 걸자 한 남성이 "평촌 학원가로 오라", "고깃집 앞으로 와서 전화를 하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 오라"며 '007작전'을 하듯 안내했다. 마지막으로 "전등을 깜빡일 테니, 그 집 앞으로 오라"고 하더니, 근처의 한 3층 주택 1층 현관 전등이 두 번 깜빡였다. 그 주택 주변은 2~3층짜리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평범한 주택가였다.

현관문을 열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 회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손님 20여명이 50여대의 바다이야기 게임에 빠져 있었다. 업소 종업원은 "새로 오는 손님은 우리 직원(문지기)과 가게 앞 CCTV를 모두 통과해야만 들어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열심히 버튼을 누르던 40대 남성이 화면 속에 '고래'가 등장하자 "나왔다, 나왔어!"라며 소리를 질렀다. 옆에 있던 종업원은 "29번에 고래 나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며 장단을 맞췄다.

바다이야기의 '예시' 기능이다. 화면에 고래나 상어 등의 그림이 나와 조만간 높은 배당이 터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기능 때문에 사람들은 게임기에 앉으면 빈털터리가 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한다. 이 남자도 '예시'가 있었지만 1시간이 지나도록 '대박'이 터지지 않았다.

◆헐값 바다이야기 게임기 다시 기승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의 지난해 12월 조사에 따르면 현재 바다이야기와 같은 불법 사행성오락실 수는 전국에서 4000여 곳에 이른다. 바다이야기가 성행하던 2006년 8월 등록된 성인오락실 수는 1만5000여 곳이었다.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 박응식 회장은 "추정치라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단속으로 거의 사라졌던 바다이야기가 최근에는 2년 전의 3분의 1 수준으로 회복했다"고 말했다.

밀거래 되는 바다이야기 게임기 시세로도 최근 바다이야기가 부활하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국컴퓨터게임산업중앙회에 따르면 2006년 8월 바다이야기 게임기 한 대 가격은 700만원까지 치솟았다.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된 이후 지난해 5월에는 대당 30만~40만원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가격이 다시 오르기 시작해 최근 가격은 100만원까지 회복했다.

P씨는 "2년 전에 비하면 아직 게임기 가격이 싸다"면서 "5000만원만 주면 게임기 50대 들여 놓고 장사를 시작할 수 있고, 20일만 지나면 투자비는 뽑을 수 있다"고 말했다.

업주와 경찰 간의 '검은 거래'도 여전하다. 지난 1월 창원지검은 단속 정보를 빼내 성인오락실 업주에게 전해준 마산 동부경찰서의 지구대 소속 경찰관 12명을 무더기로 적발했다. 서울 종로 3가 일대 골목길은 불법 성인오락실 밀집지역으로 유명하다. 40~50여 개가 모여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서울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신고가 들어 와도 압수수색 영장이 없으면 무작정 들어가서 단속할 수 없다"면서 "곳곳에 생겨나는 오락실을 모두 단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by 100명 2008. 4. 29. 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