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옛 영릉은 장경왕후 무덤"

기사입력 2008-07-14 18:10 |최종수정2008-07-14 18:15

허탕친 세종대왕 초장지 발굴 (서울=연합뉴스) 국가정보원 경내 세종대왕 초장지라 해서 중앙문화재연구원이 문화재청 의뢰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초장지가 아닌 다른 조선시대 회곽묘로 밝혀졌다. << 문화부 기사참조 >> eoyyie@yna.co.kr

안경호씨 구명.."세종 초장지는 인릉"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3-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주도한 발굴 성과를 토대로 문화재청이 조선 4대 세종이 처음 묻힌 초장지(初葬地)라 해서 최근 대대적인 재발굴 조사까지 벌인 국가정보원 부지 안 이른바 '옛 영릉'(舊英陵)은 중종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처음에 묻었던 '옛 희릉(禧陵)'이 있던 곳으로 밝혀졌다.

1973년 '옛 영릉' 발굴 당시, 봉분 석실 동남쪽 16m 지점에서 출토된 유물로, 이곳에 묻힌 주인공이 세종이었음을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 묘지석(墓誌石) 파편이 실은 장경왕후의 무덤에 쓴 신도비문의 일부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문화재수리기술자이자 문화재(건축)학 실측설계 전문가인 안경호 씨는 최근 발간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계간 한국학 기관지 '정신문화연구' 2008년 여름호 제31권 제2호(통권 111호)에 투고한 '세종대왕 초장지(舊英陵)에 대한 재론(再論)'이란 논문에서 이 비문 파편에서 확인되는 텍스트가 장경왕후를 위한 지문(誌文)임을 밝혀냈다.

이 지석 파편은 당시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밑변 101cm, 높이 41cm, 두께 15cm에 총 39행에 걸쳐 750-800여 자 정도의 글자가 확인되며 "그 중에서 글자의 윤곽이 분명한 것이 총 100여 자 정도"였다. 이 중 "확실히 판독할 수 있는 문장은 '在高麗太祖朝樹…' '私親求曰…' '曰蒙恩至大 更無深頓…' 등의 몇 구절"에 불과했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당시 이런 구절들이 문헌에 남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비문과 "한 구절도 들어맞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이 지석은 소헌왕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그렇다면 세종대왕의 것으로 추정할 수 밖에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발굴보고서에서 도출했다.

비문이 소헌왕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으니, 그의 남편 세종대왕의 비문일 수밖에 없다는 '이상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렇지만 안씨는 발굴보고서가 소개한 이런 구절들이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행록이나 행장, 혹은 교서 따위의 글을 모아 숙종 7년(1681)에 처음 간행하기 시작한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라는 문헌에 수록된 장경왕후의 지문에서 고스란히 발견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허탕친 세종대왕 초장지 발굴 (서울=연합뉴스) 국가정보원 경내 세종대왕 초장지라 해서 중앙문화재연구원이 문화재청 의뢰로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초장지가 아닌 다른 조선시대 회곽묘로 밝혀졌다. << 문화부 기사참조 >> eoyyie@yna.co.kr

즉, 이 장경왕후 비문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발굴한 비편에 보이는 '在高麗太祖朝樹…'와 같은 구절들이 그대로 나온다는 것이다.

나아가 안씨는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문헌기록을 검토해 본 결과로도 국정원 안 '옛 영릉' 부지는 결코 세종대왕 초장지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 초장지는 어디일까?

안씨는 관련 문헌기록을 근거로 서울 서초구 내곡동 소재 제23대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를 합장한 인릉(仁陵) 일대라고 주장했다.

문화재청은 국정원 경내 소위 '옛 영릉' 구역을 세종대왕 초장지로 간주하고는 올초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지하식 회곽(灰槨)을 안치한 조선시대 무덤 1기를 확인하긴 했으나, 세종실록 등에 남은 세종의 영릉 관련 기록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옛 영릉 출토 유물이라 해서 70년대 발굴조사 완료와 더불어 사업회 경내로 옮겨져 보관 중이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42호로 일괄 지정된 '구(舊) 영릉 석물'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
by 100명 2008. 7. 14.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