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가관인 숭례문 현장
연합뉴스|기사입력 2008-02-15 10:23 |최종수정2008-02-15 10:59

가림막 안에서

(서울= 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1990년이었던 것 같다. 문화재 담당기자였던 필자는 지금은 없어진 옛 중앙청 건물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병삼 관장(2001년 작고)을 만났다.

인터뷰 도중 한 관장은 우리 국민의 문화재 의식 부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통탄했다. 몇 해 전에 경험한 중부고속도로 공사현장의 에피소드를 꺼내면서였다.

"이천 부근에서 낯선 사금파리같은 게 많이 나왔다길래 득달같이 현장으로 달려갔어요. 그랬더니 이게 뭡니까? 옛 도자기 파편들이 벌판에 허옇게 널려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현장을 이미 '시원하게' 밀어버린 불도저는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이 멀뚱멀뚱 서 있었구요."

한 관장은 어처구니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금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하기야 건설회사 입장에서는 뭐가 나와도 가급적 쉬쉬하며 공사를 밀어붙여야 했겠지요. 문화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겠어요? 괜히 골치만 아프겠지요. 발굴조사를 한다 어쩐다 하면 공기가 늘어나 손해일 테니까요. 수익과 효율로 먹고 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숭례문 복구작업 준비하는 인부들

그러면서 체념한 듯 이렇게 읊조렸다.

"하기야 국보 1호인 남대문(숭례문) 바로 밑으로 지하철(1호선)이 버젓이 관통하고, 보물 1호인 동대문 아래로는 하나도 부족해 두 개(1호선과 4호선)씩이나 떡하니 지나다니고 있으니, 말 다 한 거지요."

이번엔 뭐가 또 그리 급했을까?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의 목재와 기와 잔해 일부가 사건발생 나흘도 안된 14일 오전 일반 폐기물로 분류돼 폐기ㆍ파쇄됐다고 한다.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부재들만 빼고 말이다. 또다시 비난이 쏟아지는 건 당연하다.

이들 잔해는 굴착기 등 중장비로 다시 한번 짓밟힌 뒤 트럭에 실려 서울 은평구 수색역 인근의 폐기물처리장에 마구 내팽개쳐졌다. 엊그제만 해도 국보 1호의 몸체를 구성하던 유물들이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서둘러 치워진 것이다. 갈수록 가관이다싶다.

너무도 성급한 사후처리방식에 혀가 내둘려진다. 불 탄 잔해마저 소중한 유산일진대, 늙고 병들어 소용없어진 노인네를 하루아침에 고려장해버리는 야만적 무감각으로 문화재를 처분해대고 있다. '아, 대한민국' 소리가 절로 나온다. 성과와 효율에 매몰된 물질지상주의의 시대상이 그대로 느껴지기도 해 씁쓸하기 그지없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다.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원인을 철저히 파헤쳐야 하는 건 기본상식이다. 이번 화재의 건물이 일반 가정집의 허접한 행랑채도 아니잖는가. 한 시가 급하다고 치워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차근차근, 그리고 하나하나 뒤집어보며 역사의 뼈저린 교훈으로 삼아야 할 때인 것이다.

숭례문 복구작업 준비하는 인부들

다급한 가림막 설치와 잔해 처리는 책임회피와 사태미봉의 실상을 동시에 말해준다. 현실을 차갑게 들여다보려 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마주보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없는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망각을 통해 조금이라도 면책해보려는 얄팍하고 속좁은 술책이 깔려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필요한 건 '외면'이 아니고, '대면'이다. 문제 역시 외면으로 회피할 게 아니라 대면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숭례문 화재가 남기는 교훈은 반감될 수밖에 없고, 이런 사태가 재발되지 말란 법도 없다. 시민들이 날마다 화재현장을 찾아 '추모'하는 것은 시간이 남아 괜히 그러는 게 아니다.

한 관장이 우리 문화재 의식을 개탄한 지도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가 다시 살아와 지금의 숭례문 모습과 상황을 본다면 대체 무슨 말을 할까? 이런 마당에 한반도를 관통하는 운하 공사가 시작되면 인근 문화재에 어떤 변고들이 생길까 상상해보니 벌써부터 아찔해진다.
by 100명 2008. 2. 15. 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