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통하는 정서(外畵)는 따로 있다

조선일보|기사입력 2007-12-21 06:52 |최종수정2007-12-21 08:55

영화‘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

‘어거스트 러쉬’ 등

한국적 드라마와 감수성 자극하는 음악 있는 작품들이 흥행

‘오스틴 파워’ ‘웨딩 크러셔’등 미국식 코미디는 안통해


‘거친 녀석들(Wild Hogs).’ 이 제목이 반갑다면 당신은 전국 6000명 안에 들었다는 얘기다. ‘척 앤 래리’는 어떤가. “나 봤어!”라고 외친다면, 당신은 6만명 안에 포함된 것이다. 반면 ‘어거스트 러쉬’를 알고 있다 해도 별 일은 아니다. 한국선 100만명이 넘게 봤으니까.

그런데 미국에선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2월 20일 기준 현재 한국에서 135만명을 끌어 모으며 흥행하고 있는 ‘어거스트 러쉬’는 2848만 달러를 벌며 미국 박스 오피스 77위에 머물러 있다. 반면 한국에서 1주일 만에 문을 내린 ‘거친 녀석들’은 1억 6827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미국 흥행 10위를 기록했다. 한국에서 성공하는 외화? 분명 따로 있다.

영화‘어거스트 러쉬’

◆동화적 스토리와 음악, 관객을 사로잡다.

‘트랜스포머’ ‘스파이더 맨3’ 등 올 한 해를 강타했던 블록버스터를 제외하고 가장 성공한 외국 작품으로는 프레디 하이모어가 천재 음악가로 변신한 ‘어거스트 러쉬’와 휴 그랜트, 드루 베리모어가 주연한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이 꼽힌다. 모두 100만명 이상을 끌어 모았다.

그렇다고 이 영화들이 미국에서도 대단한 히트를 쳤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미국 박스 오피스 집계 사이트인 ‘박스 오피스 모조(www.boxofficemojo.com)’에 따르면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은 42위에, ‘어거스트 러쉬’는 77위에 그쳤다. 일종의 ‘뮤직 드라마’에 가까운 아일랜드 독립 영화인 ‘원스’의 한국 흥행은 더욱 놀랍다. 원스가 전 세계에서 벌어들인 돈은 1464만 달러. 한국에서만 2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145만 달러를 벌었다. 전 세계 10분의 1이다.

한국관객은 왜 이 영화들을 택했을까. 전문가들은 ‘한국적 드라마와 감수성을 자극하는 음악’을 꼽고 있다. 청주대 영화학과 심은진 교수는 “한국 드라마의 흥행 요소를 보면 신분 격차 등을 딛고 일어난 판타지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기반이 된다”며 “한국적 정서는 감정 변화가 뚜렷하고 미성숙한 ‘청소년기’ 감정 곡선을 지니고 있어 애틋한 러브 스토리가 큰 인기다”고 평했다. 배경 음악이 여느 팝송 못지않게 인기를 끄는 것도 중요한 흥행 요인 중 하나다. CJ 엔터테인먼트가 공동 투자한 ‘어거스트 러쉬’의 경우 이러한 ‘한국적 정서’ 때문에 전격적으로 투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몇몇 한국 투자회사들이 동시에 입찰서를 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기존 한국 영화에서는 향유할 수 없는 섬세한 감수성을 외국 영화에서 찾는다는 해석도 있다. 홍성남 영화평론가는 “일본 문학이나 ‘원스’ 같은 해외 독립 영화가 20대 초·중반, 특히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며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주는 한국 영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이 외국영화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미국식 언어 유희 코미디는 어려워

영화‘거친 녀석들’

반면 ‘미국식 코미디’는 한국에선 형편없이 추락한다. 1억2146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올 한 해 미국 저예산 영화 중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된 ‘슈퍼 배드’의 경우, 앞으로도 국내 개봉 계획이 없다.

한국소니픽쳐스 마케팅팀 허인실 과장은 “청소년들의 성장담을 그리긴 했지만 말장난식 성적(性的) 용어와 속어가 난무하고 워낙 미국적인 상황들이라 개봉하지 않을 예정”이라며 “한국에선 해피 엔딩 드라마와 액션 블록버스터를 제외하고 미국 코미디가 인기 얻기란 무척이나 어렵다”고 전했다.

또 ‘번역’도 걸림돌이다. 미국식 유머와 패러디, 말의 묘미를 잘 살리지 못하면 내용 전달이 힘들다. 단적으로 ‘오스틴 파워’ 시리즈가 그렇다. ‘오스틴 파워2’는 1999년 개봉 당시 미국 흥행 4위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국내 관객 대부분은 ‘어디서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나마 12만명 정도를 모은 것도 주한 미군 덕분이라는 유머까지 있을 정도다.

2005년 미국 박스 오피스 6위를 기록한 ‘웨딩 크러셔’의 경우 남의 결혼식에 무조건 참석해 훼방 놓는 미국식 코드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들으며 열흘 만에 문을 내렸고, 스티브 카렐의 히트작 ‘40살까지 못해본 남자’는 미국에서 1억 달러 이상을 벌었지만, 한국에선 5만명 정도를 들이는 데 그쳤다. 홍성남 평론가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경우 한국에서 여성들의 호응을 얻어야 성공하는데, 농도 짙은 성적 코믹 상황만 이어지는 영화는 여심(女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평했다.
by 100명 2007. 12. 21. 1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