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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도… 죽음도… 쉬어가네!
청산도 당리에서 읍리 쪽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청보리밭 풍경. 돌을 계단처럼 쌓아 만든 다랑논에 청보리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청산도의 청보리밭은 이른 봄이 가장 아름답다지만, 솜털 같은 억새와 어우러진 이즈음의 풍경도 봄 못지않다. |
그 섬에서는 시간이 더디고, 또 부드럽게 흐릅니다. 이른 봄에 청보리밭 길이 아름답다는 전남 완도군의 청산도입니다. 유려하게 쌓인 돌담을 휘휘 돌아서 ‘천천히 가는 시간’의 아름다움. 그 느린 시간의 아름다움은 영화 ‘서편제’의 롱테이크 샷에서 익히 목격한 바 있지요. 그 청산도의 ‘느림’이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산도가 전남 신안의 증도, 담양의 장평면, 장흥의 유치면과 함께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슬로시티(이탈리아 명 치타슬로) 국제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그들이 인증을 해주건 안 해주건, 그게 뭐 그리 대수겠습니까. 청산도에서의 시간은 앞으로도 지금까지와 같은 속도로 흘러갈 것이고, 섬마을의 아름다운 돌담이며 ‘구들논’의 풍경도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예부터 느린 삶을 지켜온 섬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늦게나마 인정해주는 기념비쯤으로 쓰인다면 ‘슬로시티’의 국제인증은 축하해 마지않을 일입니다.
청산도 당리에서 만난 배영자(여·65)씨가 외양간 처마에 메주를 매다는 모습. 외양간의 송아지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
그 슬로시티로 가는 길입니다. 전남 완도에서 청산도로 드는 뱃길. 해무가 짙게 끼어있던 날이었습니다. 완도여객선터미널 앞에는 일찍부터 배편을 기다리던 손님이 있습니다. 색색의 종이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상여. 청산도 주민 중 누군가 세상을 뜬 모양입니다. 꽃상여와 함께 ‘청산고속훼리’를 타고 청산항에 도착했습니다.
청산도 선착장에서는 대통령 선거 후보의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섬마을은 조용한데, 경제를 살리겠다느니, 새 세상을 열어보이겠다는 포부가 거센 해풍에 저 혼자 펄럭입니다. 여의도 면적 14배의 작지 않은 섬. 그러나 하루 세 번 완도행 페리호가 오가는 청산항은 작은 다방과 밥집 몇개, 그리고 아직도 지난 봄에 붙여 놓았을 ‘입춘대길’을 유리창에 붙여둔 구멍가게가 있을 뿐입니다.
돌아올 때쯤 알게 된 것이지만, 청산도에서는 ‘한 장의 사진’ 같은 아름다운 풍광만을 찾아다닐 일은 아니었습니다. 섬마을에 지천인 다랑논과 구들논, 견고하고 유려하게 쌓은 돌담과 이제 막 싹을 틔운 청보리들이 모두 다 아름다웠습니다. 특히 청산도의 구들논은 입이 딱 벌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남해며 지리산 일원의 다랑논은 수없이 봐왔지만, 이런 논은 처음입니다. 구들논이란 구들을 놓듯이 돌로 바닥을 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노동으로 땅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폭이 겨우 2m도 안 돼서 쌀 몇말이나 나올까 싶은 논도 있습니다.
북을 들고 앞장선 상두꾼의 상여소리를 따라, 꽃상여가 지리해수욕장 앞을 지나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모두 뒤를 따랐다. |
그러나 이런 풍경보다는 섬 안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투박한 삶이 뭉클하게 마음을 끌어당겼습니다. 구들논의 조형미보다는 그 구들논을 놓았을 고된 노동의 손이, 한 촌로가 갓 빚은 메주를 외양간에 내거는 풍경보다는 그 촌로가 불쑥 내미는 시루떡 한 조각이 더 감동적이었던 것이지요. 윷판이 벌어져 떠들썩한 상가(喪家) 마당에서 타닥거리는 장작불의 불티가 밤하늘로 올라 가득한 별 사이로 사라져버리는 모습도 사람들의 온기로 더 아름다웠습니다. 잊고 있었던, 오래 된 삶의 모습들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 섬에서는 좀처럼 느린 속도에 보조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선착장 앞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해도, 그제서야 주전자에 물을 담아 난로에 얹어놓는 속도를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민박집 아저씨도 “고작 하루 반나절 동안 뭘 보겠느냐”며 “더 묵고 가라”고 손을 잡아 끌었지만, 예정되지 않은 일정에 익숙지 않아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언젠가 일을 놓고 시외버스를 갈아타면서 천천히 청산도에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낯선 도시에서 청산도에 ‘슬로시티’란 이름을 붙여주기 이미 오래전부터 청산도는 ‘느린 삶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이 땅에 그런 곳이 청산도뿐이겠습니까. 다만 우리들이 그것을 몰라봤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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