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 브랜드 선호의 함정

한겨레] 다들 미드 열풍이라고는 하지만 난 오히려 그 열풍이 시작된 뒤로 최신 미국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은 축이다. 여전히 충성심이 남아 있는 <시에스아이(CSI) 과학수사대>와 <하우스>를 제외하면 내가 보고 있는 ‘미드’는 주로 옛날 것들이다. 내가 지금 가장 열심히 보고 있는 것은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시즌3. 이 시리즈의 디브이디 세트는 국내에서도 시즌1이 나와 있다. 앞으로도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설정은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에피소드 시작과 끝에 나와 만담을 선보이고 그 사이에 히치콕과 동료들이 엄선한 서스펜스·추리 단편을 각색한 짧은 영화를 상영한다. 보면 거의 옛날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흥분에 사로잡힌다. 조셉 코튼, 찰스 브론슨, 베라 마일즈, 클로드 레인즈와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20여분짜리 짧은 영화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퇴장하는데, 마치 예고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 것 같다.

이들 중 진짜 ‘선물’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직접 감독한 에피소드들이다. 여러분이 히치콕의 팬이라면 시즌1에 속해 있는 <복수>나 <브레이크다운>은 꼭 봐야 할 것이다. 그 영화들은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그만큼이나 중요한 미니 히치콕 영화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이 존재했기 때문에 히치콕은 전성기에 알찬 중단편 영화들을 19편이나 남긴 독특한 경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재미있는 건 그 단편들에 대한 나의 기계적인 반응이다. 나는 일단 감독이 누구인지 모른 상태에서 작품을 본다. 그리고 단편을 보는 동안 이 작품이 제발 히치콕의 것이길 바란다. 히치콕은 한 시즌 당 서너 편 정도밖에 감독하지 않았으니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에피소드 끝에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름 대신 로버트 스티븐스나 폴 헨리드와 같은 시리즈의 단골 감독의 이름이 뜨면 살짝 맥이 풀린다. 물론 둘 다 아닌 경우도 있다. 시즌3부터면 로버트 알트만이나 아서 힐러와 같은 미래의 명감독들이 작품을 내던 시절이니 그 역시 선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반응이 옳은가?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거다. 예를 들어 시즌2의 <비오는 월요일>은 히치콕 자신이 직접 감독했지만 거의 졸작에 가까웠다. 시즌3에서도 빈센트 프라이스가 주연이고 역시 히치콕 자신이 직접 감독한 <완전 범죄>보다는 알트만의 <더 영 원(The Young One)> 쪽이 더 좋다. 한 마디로 엔드 크레디트 맨 앞에 달린 감독의 이름이 꼭 절대적인 기준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름들은 작품을 보장하는 대신 우리처럼 엉성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선입견을 부추킬 뿐이다. 그 때문에 걱정이 된다. 과연 나처럼 영화 저널리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소위 브랜드 이름들에 대해 과연 얼마나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는 걸까?

by 100명 2007. 12. 2. 2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