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 대신 지팡이 하나로 세상 누볐다
시각장애 넘어 19세기 세계일주
18년 동안 200개 문화권 탐험한
제임스 홀먼의 삶이자 역사서

» 세계를 더듬다
세계를 더듬다
제이슨 로버츠 지음·황의방 옮김/까치·1만3500원

‘장님, 코끼리 만지기’란 통념을 비웃듯 코끼리를 아예 사냥해버린 시각 장애인이 있었다. 〈세계를 더듬다〉의 주인공인 제임스 홀먼(사진·1786~1857)은 지팡이 하나로 18년 동안 세계 200개 문화권 40만㎞를 돌아다녔다. 지구를 10바퀴 돌거나 달나라에 가는 거리와 맞먹는다고 한다. 그의 발길이 닿지 못한 곳은 한국이나 베트남처럼 몇개 안 되는 ‘은둔국’뿐이었다. 19세기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이내 잊혀져버린 그를 이 책의 지은이가 자료 추적을 통해 21세기에 되살려냈다.

영국 해군에 입대하면서 어릴 적 세계일주의 꿈을 키워가던 홀먼은 불행히도 20대 초반의 나이에 압박붕대로 눈을 감싼 채 빛과 영원히 이별하고 만다. 충격이 가실 무렵 침묵과 정적 속에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체득한 홀먼은 지팡이에서 반향되는 소리로 거리를 읽어내고 어두울 때 필기할 수 있는 기계인 ‘녹토그래프’를 이용해 글을 썼다.

» 제임스 홀먼
어렵게 해군 기사단원이 되는 기회를 잡은 홀먼은 마침내 대여행가의 삶을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력장애에다 다리까지 불편했지만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에 대항해 싸웠고 시베리아에서는 감금돼 죽을 뻔한 ‘무모한’ 모험가였다. 홀먼은 자신의 모험을 “세상의 기쁨과 교감하는 행위”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여행 중 숱한 죽음의 고비를 맞았던 그에게 가장 낯선 시련은 불타는 정글 속을 걷는 것이었다. “불이 붙어 딱딱거리는 연속음은 기관총 소리 같고 그 소리가 메아리를 일으키면 전쟁터에 온 느낌이다.” 시각 장애인의 여행기에서 화산의 유황 냄새, 고독한 섬의 새소리, 창틀의 새벽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돼 오는 것은 그의 감각적 촉수 덕분이다.

홀먼의 여행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풍경 중 사뭇 부러운 것은 육감적 여인들과의 교제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 없네. 하지만 마음속에 피어나는 꽃봉오리는 볼 수 있다네.” 방랑시인이기도 한 그가 인용하길 좋아했다는 〈여행가〉 한 대목은 은둔자들을 점잖게 동정하고 있다. “영혼을 불사르고 그 불꽃 속에서 바르르 떨게 하는 그 힘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의 무덤덤한 삶은 꺼져가는 모닥불 같은 것.” 이 책은 특수한 개인의 여행기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초반 사회·문화적 조류와 만날 수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뒤집어 말하면 당시 시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따라붙지 않으면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인명과 지명에 막혀 길을 헤맬 수도 있다. 세계를 더듬지 못하고 코끼리만 만지다 나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by 100명 2007. 8. 18. 1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