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112·끝>태국 방콕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7-07-06 10:45

방콕은 사람을 들뜨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후텁지근한 열기와 뜨거운 햇살 아래서 몸과 마음의 긴장은 풀리고, 배를 타고 넘실거리는 차오프라야 강을 달리다 보면 낯선 이국 땅에 왔음을 실감한다. 온갖 과일과 음식, 피로를 풀어 주는 마사지, 라이브 뮤직 등도 즐길 수 있다. 그 흥분이 지나쳐 금단의 환락가를 기웃거리는 여행자들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왓프라께오(에메랄드 사원), 왓아룬(새벽의 사원) 등 아름다운 불교 유적지와 함께 태국 사람들의 순박한 미소와 인심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상이라는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 그동안 자신을 규정했던 관습과 의식에서 해방되며 모든 것이 다 허용될 것 같은 아찔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방콕에서 이를 잘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카오산 로드라는 거리다.

1960년대를 거쳐 70년대로 넘어오면서 서양에서는 반문화 운동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은 효율성과 경쟁을 내세우는 숨막힐 듯한 산업사회에 반항하며, 배낭을 둘러메고 인도나 동남아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여행 행태는 예전과 달랐다. 사회로 복귀할 의무가 없었던 그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은 채 장기간 자유롭게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이들의 근거지를 흔히 ‘3K’라 불렀는데, 인도네시아 발리의 쿠타 비치, 네팔의 카트만두,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이었다. 이곳들에는 엄청나게 싼 숙소들이 들어섰고, 히피들은 마리화나를 피워대며 장기 체류를 했다. 그러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정치적으로 격변기를 맞으며 새로운 ‘K’로 부상한 곳이 바로 태국 방콕의 카오산 로드다.

이곳은 여행자들의 해방구와도 같은 곳이다. 거리 주변에는 3000∼4000원의 저렴한 게스트 하우스부터 에어컨과 화장실이 딸린 1만∼3만원대의 여행자 숙소 수백개가 몰려 있다. 또 식당, 오픈 카페, 환전소, 저렴한 비행기표를 파는 여행사, 국제전화 거는 곳, 편의점, 약국, 술집, 옷가게, 기념품 상점, 마사지 숍 등 여행자를 위한 모든 것이 모여 있다.

이 주변은 방콕 관광의 중심지다. 걸어서 20∼30분 거리에 왕궁과 에메랄드 불상을 모셔 놓은 왓프라께오, 부처님의 와상이 있는 왓포(포 사원)와 왕의 광장이란 뜻의 사남 루앙과 국립 박물관 등이 있다. 또한 강을 건너면 왓아룬이 있으며, 강변에서 통근배나 유람선을 타고 차오프라야 강을 달릴 수가 있다.

◇공항버스를 타고 카오산 로드로 가는 배낭 여행자들

한국 여행자들이 이 거리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초부터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 배낭 여행자들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 게스트 하우스들도 생겼으며, 방콕보다도 카오산 로드에서의 추억을 더 그리워하는 여행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 거리는 태국이되 태국이 아니고, 획일적인 의식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은 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자유다. 철학자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어느 세상으로부터도 탈코드·탈영토화 된 곳이다. 젊은 여행자들은 자신들이 소속됐던 영토와 코드를 벗어나, 이곳에서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여행자들을 만나 해방감을 만끽한다.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 카오산 로드는 방콕의 명소가 되었다. 어떤 역사 유적지나 특별한 볼거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모여들어 만드는 다양한 풍경과 자유의 열기를 보려고 관광객들이 찾는 것이다.

◇카오산 로드에서 머리를 따는 서양 아이들(왼쪽) ◇카오산 로드의 식당

이런 과정에서 이곳의 임대료는 치솟았다. 자본이 투자되면서 점점 고급 숙소와 음식점, 술집들이 들어섰으며 외국 여행자들뿐 아니라 방콕의 돈 있는 젊은이들이 몰려와 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배낭여행자들은 카오산로드 주변으로 밀려났고, 그들이 뿜어내는 열기도 그들을 따라 주변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카오산 로드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독특한 여행자의 거리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거니는 것은 단지 먹고 마시고 놀고 싶은 충동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은 방콕 어디서나, 아니 세계 어디서나 가능하다.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는 여행자들이 뿜어내는 열기에 취해, 각박하고 틀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 할 수 있는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올여름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배낭을 메고 이 거리로 찾아들고 있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카오산 로드의 광고

# 여행 에피소드

이 거리에 처음 갔을 때는 1988년 늦가을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인 보기가 매우 힘들어, 이 거리의 많은 상인들은 ‘까올리(코리아)’라며 신기해하고 반가워했다. 그후 인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방콕에 들른 것은 1991년 초였는데, 한국 여행자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곳의 여행사 사람이나 음식점 종업원들이 한국인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아 보니 이곳에 장기체류하며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몇몇 한국 여행자들 때문에 한국인 이미지가 매우 나빠져 있었다. 또한 점점 사람들이 밀려들면서 상인들과 숙소 종업원들도 불친절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없었던 마사지 업소도 생겼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종업원을 고용해 손님을 끄는 술집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에 실망하고 예전의 소박한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여행자들은 주변으로 물러가기 시작했지만, 그곳도 어김없이 자본의 집중과 인간소외는 발생하고 있다.

# 여행정보

수완나품 신공항 청사 바로 앞에서 카오산 로드까지 AE2 공항버스가 가는데,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 이 버스보다는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시내버스가 더 빠르다. 공항청사 앞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교통센터까지 가서 556번 시내버스를 타면 카오산로드까지 간다.

by 100명 2007. 7. 23. 2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