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5) - Walt Disney(월트 디즈니)(중)
디즈니의 빛나는 아이디어 계속 히트

만화, 실사영화, 엔터테인먼트에서 탁월, 나이들 때까지만...



▲ 실사영화<쾌걸 조로>를 구상할 당시의 월트 디즈니. 벽은 조로영화에 관한 스케치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고 대중의 찬사를 받음으로써 디즈니 사에 알찬 소득을 안겨 주었다. 디즈니는 이 수익금으로 버뱅크에 최신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지었고, 여기서 태어난 일련의 작품들은 스타일의 혁명성과 상업적인 흥행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이 당시의 <피노키오>, <밤비>, <피터팬> 등은 오늘날까지도 인기를 잃지 않는 고전으로 남았다.

하지만 디즈니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혁신적인 가족 여흥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고, 그에 따라 <보물섬>, <해저 2만리>, <데이비 크로킷> 등의 실사 영화와 <복슬 강아지>, <얼빠진 교수>, <부모의 덫>과 같은 청소년 코미디 영화가 탄생했다. 1954년에 그는 텔레비전 이라는 떠오르는 매체로 이동해서, <미키 마우스 클럽>, <조로> 등을 선보였으며, 나중에는 최초의 비흑백 주간 프로그램으로 그 제목도 절묘한 <원더풀 월드 오브 컬러(Wonderful World of Color)>를 내보냈다. 1955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를 열었는데, 이 살아있는 마법의 세계는 디즈니와 그 제국의 명성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이를 통해 시작되어 지금껏 이어지는 테마 파크 열풍은 파리에서 도쿄를 지나 라스베이거스 까지 이어졌다. (디즈니 사의 다음 세대는 1971년 플로리다에 월트 디즈니 월드를 건설하면서 이 열풍을 다시 한 번 띄워 올렸다. 테마 파크는 아직도 디즈니 사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곳곳에 유사한 시설을 많이 촉발 시키고 있다.)

▲ 1940년에 제작을 시작한 만화영화 <판타지아>(왼쪽), 영화탄생 50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디지털로 완성시킨 1990년의 <판타지아>(오른쪽). 레오폴도 스토콥스키의 지휘로 필라델피아 필하모닉이 연주를 맡은 클래식과 만화가 결합된, 40년대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영화였다.
1965년에 월트 디즈니는 미국 도시 생활의 문제점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미래의 실험적 모범 공동체(Experimental Prototype Community of Tomorrow, 약칭 EPCOT)’ 설계 사업을 직접 이끌고, 이를 ‘미국 산업체가 가진 창조성의 살아 있는 전시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맨해튼의 두 배 넓이에 이르는 43평방 마일의 오렌지 농장, 덤불, 습지, 채소 경작지를 사들였다. 이것은 디즈니가 죽을 때까지 ‘플로리다 계획’이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월트 디즈니 월드는 1971년에 개장했고 EPCOT 센터는 그 11년 후에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 센터의 목적은 애초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변경되었다.)

이 계획을 위한 토지 구입은 익명의 구매자에 의해 조용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가 월트 디즈니 사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미 3만 에이커가 넘는 땅이 필지별로 흩어진 채 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플로리다 주 정부는 올랜도 라는 활기 없는 도시를 관광 명소로 꾸미겠다는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이 계획을 허가하면서 그 일대에 자치권을 주어 디즈니 사가 이를 위한 도로를 건설하고 하수도를 관리하고 용수 관리 시설을 만들고 치안과 소방을 담당하며 전체 계획과 구역 계획을 관리하게 했다. 그 결과 올랜도 시 뿐 아니라 어느 자치 단체도 이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없었고, 디즈니 사는 스스로 채권을 발행하고 세금을 매겼다. 게다가 이들은 심지어 설비 투자 비용 중 일부를 상각 하지 않고 법인세에서 공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합법적 이었다.

▲ 월트 디즈니가 새로운 사업으로 구상한 디즈니랜드는 올랜도로부터 캘리포니아, 도쿄, 파리등지로 퍼져 나가고 있다.
디즈니는 사업가로서도 독창적인 인물이었다. 디즈니는 대중에게는 다정한 아저씨 같은 이미지를 유지했지만,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그의 인력이 생산해내는 최고의 작품과 서비스뿐이었다. 그는 직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최상급의 고객 서비스를 전달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훈련 프로그램과 엄격한 종업원 행동 지침을 실행했다. 이런 식으로 눈에 보이는 완벽성을 추구하는 그의 행동-예를 들어 테마 파크의 남성 직원들에게 수염을 기르는 일을 전면 금지한 것과 같은-은 때때로 많은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지침들은 디즈니가 부모들에게 언제나 믿음을 주고 아이들에게는 변함없는 즐거움을 주는 브랜드로 자리잡는 데 큰 기여를 했다.

1966년에 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48개의 오스카 상과 일곱 개의 에미 상을 비롯해서 수천 건의 포상을 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전 세계 구석구석에 뻗쳤다. 그가 건설한 두 개의 테마 파크는 전 세계 테마 파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소가 되어, 해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환상을 만끽하고 미키 마우스와 그 친구들이 새겨진 라이선스 상품들을 구매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덧 창의력은 시들어갔다. 그 후 7년 동안 출시된 <맨발의 사장님>, <도널드 덕의 신나는 잔치> 같은 영화들은 예술적으로도 밋밋하고 상업적으로도 지지부진 했다. 월트 아저씨의 그림자는 사방에서 밟혔지만, 반짝이는 불꽃도 감동적인 비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클 아이스너가 등장했다.

by 100명 2007. 7. 23. 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