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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빛나는 아이디어 계속 히트
만화, 실사영화, 엔터테인먼트에서 탁월, 나이들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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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디즈니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혁신적인 가족 여흥 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했고, 그에 따라 <보물섬>, <해저 2만리>, <데이비 크로킷> 등의 실사 영화와 <복슬 강아지>, <얼빠진 교수>, <부모의 덫>과 같은 청소년 코미디 영화가 탄생했다. 1954년에 그는 텔레비전 이라는 떠오르는 매체로 이동해서, <미키 마우스 클럽>, <조로> 등을 선보였으며, 나중에는 최초의 비흑백 주간 프로그램으로 그 제목도 절묘한 <원더풀 월드 오브 컬러(Wonderful World of Color)>를 내보냈다. 1955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에 디즈니랜드를 열었는데, 이 살아있는 마법의 세계는 디즈니와 그 제국의 명성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이를 통해 시작되어 지금껏 이어지는 테마 파크 열풍은 파리에서 도쿄를 지나 라스베이거스 까지 이어졌다. (디즈니 사의 다음 세대는 1971년 플로리다에 월트 디즈니 월드를 건설하면서 이 열풍을 다시 한 번 띄워 올렸다. 테마 파크는 아직도 디즈니 사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이며, 세계 곳곳에 유사한 시설을 많이 촉발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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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획을 위한 토지 구입은 익명의 구매자에 의해 조용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가 월트 디즈니 사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이미 3만 에이커가 넘는 땅이 필지별로 흩어진 채 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플로리다 주 정부는 올랜도 라는 활기 없는 도시를 관광 명소로 꾸미겠다는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이 계획을 허가하면서 그 일대에 자치권을 주어 디즈니 사가 이를 위한 도로를 건설하고 하수도를 관리하고 용수 관리 시설을 만들고 치안과 소방을 담당하며 전체 계획과 구역 계획을 관리하게 했다. 그 결과 올랜도 시 뿐 아니라 어느 자치 단체도 이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없었고, 디즈니 사는 스스로 채권을 발행하고 세금을 매겼다. 게다가 이들은 심지어 설비 투자 비용 중 일부를 상각 하지 않고 법인세에서 공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합법적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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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암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48개의 오스카 상과 일곱 개의 에미 상을 비롯해서 수천 건의 포상을 받았으며, 그의 명성은 전 세계 구석구석에 뻗쳤다. 그가 건설한 두 개의 테마 파크는 전 세계 테마 파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장소가 되어, 해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환상을 만끽하고 미키 마우스와 그 친구들이 새겨진 라이선스 상품들을 구매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느덧 창의력은 시들어갔다. 그 후 7년 동안 출시된 <맨발의 사장님>, <도널드 덕의 신나는 잔치> 같은 영화들은 예술적으로도 밋밋하고 상업적으로도 지지부진 했다. 월트 아저씨의 그림자는 사방에서 밟혔지만, 반짝이는 불꽃도 감동적인 비전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클 아이스너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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