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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소속'규정이 주식공모 제약
'정부 소속'규정이 주식공모 제약
인터넷과 멀티미디어 시대에 대처 못한 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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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 이들의 광고 부문이 그랬던 것과 비슷하게, AFP의 공공기관 비슷한 지위는 나중에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하지만 전후의 긴박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AFP는 집단적 힘을 모아서 전 세계의 네트워크를 재건해나갔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최초의 1급 특종을 건져냈다. 스탈린의 사망을 알린 것이다. 1950년대 내내 이들의 명성과 지평은 동시에 높고도 넓어졌다. 1957년에 이르면 이들의 사무실은 프랑스에만 25개, 해외에는 59개에 이르렀다. 116개국에 객원 통신원을 두었으며, 78개국에 뉴스를 공급했다. 그리고 1950년대 말에는 베이징에 사무실을 개설하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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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의 성장에 발을 맞추어 전 세계의 뉴스 송신 기술도 함께 성장해서, 1960년대에 이르면 AFP를 비롯한 주요 통신사들은 전 세계 곳곳으로 문자와 화상을 순식간에 전달하는 최신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텔레비전 뉴스가 성장함에 따라 뉴스 서비스 고객의 영역도 더욱 넓어졌고, AFP는 이들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전 세계의 대중 매체들은 통신사들에 의존해서 각 지역의 뉴스나 과학, 종교 등 전문 분야의 소식을 얻고 전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나라가 국영 통신사를 꾸렸고, 이해 관계가 공통된 지역에서는 서로 인력을 공유하여 모두에게 개방되는 공용 서비스를 창출하기도 했다.
AFP에게 그 다음의 몇 년 간은 극적인 도약과 침체가 교차된 시기였다. 1972년 올림픽 때는 이스라엘 인질들이 살해되었다는 특종을 터뜨려서, <워싱턴 포스트>, <로스앤젤레스 타임즈>같은 미국 내 유수의 신문들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1975년 <파리지앵 리베레>의 소요 현장에서 편집국장 베르나르 카반이 살해된 것은 AFP에 짙은 어둠을 던져주었다. <파리지앵 리베레>는 1944년 한 레지스탕스 활동가가 창간한 조간 신문으로, 그 동안 파리의 유력 일간지로 성장해 있었다. 하지만 노조와 사용자 간에 발생한 격렬하고도 오랜 분규가 사회 문제로까지 떠올랐고, 이 분규는 2년 후 카반이 죽고 나서야 완전히 해결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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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AFP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적인 뉴스 매체로 확고한 위치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북아메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태평양, 유럽 아프리카 지역에 지역 관할 본부를 두고 있다. 3,400명의 편집진은 일반 뉴스를 포함해서 경제, 비즈니스, 스포츠 뉴스를 여섯 개 언어로 제공한다. 이들은 세계 주요 지역에 대한 뉴스 공급자로도 권위를 누리고 있으며, 프랑스 국내 뉴스에 관한 한 가장 신뢰할 만한 기사의 출처로 평가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애초에 AFP를 보호하기 위해 부여된 국영 기간 비슷한 지위가 오늘날 이들에게 족쇄가 되고 있다. 이러한 공공성 때문에 이들은 오늘날 절박하게 요구되는 공적 자본을 공모하지 못하고 있다. AFP를 프랑스 정부의 관할 아래 두는 조례를 변경하자는 안이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노력은 안팎의 저항에 의해 중지되었고, 결국 이들은 인터넷과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으로 경쟁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해나갈 능력을 잃고 말았다.
AFP가 볼 때는 불쾌한 일이지만, 이러한 사실은 새 천년 벽두의 몇 달 동안 전 세계 뉴스에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AFP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AFP가 뉴스를 만들기 보다 전달하는 위치로 하루 빨리 돌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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