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50대 기업(24) - Aqence France Press(AFP)(상)
통신사업의 아버지 아바의 선견지명


세계최대의 글로벌 저널리즘기업, 특종의 원산지

창업자: 샤를 루이 아바
특징: 세계 최고(最古)의 국제 통신사
주요 제품: 전 세계 언론사에 제공하는 기사, 사진, 그래픽
연간 매출: 2억 2,770만 달러
종업원 수: 1,998명
주요 경쟁사: 연합통신(UP), 로이터스, 국제합동통신(UPI)
사장 겸 CEO: 베르트랑 에브노
본사: 프랑스 파리
창업 연도: 1835년
웹사이트: www.afp.com


▲ 1972년 독일 뮌헨에서 열린 올림픽에 찬물을 끼얹은 아랍계 '검은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를 대량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AFP가 특종을 했다.
지난 150년 동안 프랑스 통신사(Agence France-Press, AFP)는 뉴스를 만들기보다는 그것을 전달하는 일에 더욱 익숙했다. 세계 유수의 통신사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들은 그 동안 요제프 스탈린과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인디라 간디의 사망을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렸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것도 이들이었으며, 1991년 반대파들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뒤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가장 먼저 인터뷰한 것도 이들이었다. 그리고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이들의 본사 인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었을 때, 이를 세상에 알린 것도 역시 AFP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부터 체첸 같은 오늘날의 분쟁 지역에 이르기까지 AFP는 언제나 지구 곳곳의 뜨거운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속보를 발송하고 있다. AFP에는 현재 200명의 사진기자, 1,200명의 기자, 2,000명의 진상 조사원들이 프랑스를 비롯, 세계 160여 개국에서 일하고 있다. 미국의 연합통신(AP), 국제합동통신(UPI), 영국의 로이터 통신과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뉴스 보급 조직으로 꼽히는 이들은 날마다 250여 장의 사진과 80개의 그래픽, 200만 단어의 기사를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아랍어, 포르투갈어로 배급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AFP 자체가 뉴스를 만든 적도 있다. 그 시발은 1940년대의 일로, 나치 하에서 지하 활동을 하던 기자들이 종전 후 AFP의 재조직을 위해 모여든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이었던 일은 1970년대의 일로 AFP의 편집국장이 <파리지앵 리베레>-‘자유 파리 시민’ 이라는 뜻-신문의 격렬했던 노사 충돌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기자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 현장에 뛰어들었을 때도 뉴스가 생겼다. 2000년 봄에는 인질극이 벌어지던 필리핀의 졸로 섬에서 AFP기자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회사 자체의 문제가 뉴스가 되기도 했다. 실종 사건이 발생한 2002년에 이들은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온라인 혁명에 적절하게 결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이들은 새로운 천년의 문턱을 넘고 있다. 오늘날은 최고의 통신 회사들도 세계의 뉴스를 전달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들 자신이 심심치 않게 뉴스의 소재가 되고 있다.

▲ 글로벌 저널리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샤를 루이 아바는 세계 최초로 AFP통신사를 설립했다.
AFP의 뿌리는 1832년, 샤를 루이 아바가 ‘뷔로 아바(Bureau Havas)’를 열고 외국 신문 기사들을 번역해서 파리 일대의 신문사들에 보급하기 시작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820년대부터 몇몇 회사들이 이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아바의 계획은 좀더 원대했다. ‘글로벌 저널리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아바는 1835년에 회사를 ‘아장스 아바(Agence Havas)’로 확대하고 자신과 동료들이 직접 취합한 뉴스를 송달하기 시작했다. 10년 후에 그는 프랑스에 최초의 전신 서비스를 개시해서, 뉴스들을 더 빨리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이 초창기의 직원들 가운데 파울 율리우스 로이터라는 번역자가 있었다. 그는 아바의 곁을 떠나 비슷한 통신사를 직접 차린 뒤 1851년에 영국으로 이주해서 회사의 이름을 ‘런던 로이터 전신회사’로 정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들은 ‘로이터 통신’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렸다.) 그 후 몇십 년이 지나는 동안 미국에서는 AP와 UPI가,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국영 통신사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 가운데는 아바 회사처럼 번역 서비스로 시작한 곳도 있고, 국내 은행가들에게 금융 자료를 제공하는 일을 출발점으로 삼은 곳도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프랑스의 선구자 AFP를 뒤따라 세계 곳곳의 뉴스를 모으고 그것을 기사로 써서 계약을 맺은 국내외의 신문, 정기 간행물, 무선국, 때에 따라 정부 기관들에까지 배급하는 업무로 이동해갔다.

▲ 1991년 고르바쵸프의 개방정책에 반대한 군부쿠데타가 발생,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때 보여준 옐친(연설중인 사람)의 용감한 대응으로 구소련체제는 붕괴했다. 이것 또한 AFP특종.
경쟁자들이 늘어가자 아바는 통신사 업무를 보완하기 위해 1852년에 ‘코레스퐁당스 제네랄 아바(Correspondance General Havas)’ 라는 이름의 광고 회사를 차렸다. 같은 해에 그는 세계 곳곳에 주재 통신원 제도를 실시해서, 한층 더 생생한 뉴스를 취합할 수 있게 했다. (아바의 광고 사업부들은 1920년에 다른 광고 회사와 합병되어서 업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는데, 통신 사업부가 언론 매체로서 높은 지위를 얻어가자 광고 회사의 존재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1879년에 아장스 아바는 프랑스에서 ‘공공 유한 회사(public limited company)’라고 부르는 종류의 회사가 되었지만, 이들의 목표는 결코 유한하지 않았다. 실제로 20세기로 들어섰을 무렵 이들은 증대해가는 전 세계 계약자들을 대상으로 이들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파악한 뉴스들을 흩뿌려주고 있었다. 게다가 다양한 분야에 속한 많은 기자들을 협력 관계로 끌어들여 그 분야에서 발생하는 일반적 뉴스를 공급 받음으로써, 자체 인력만으로는 생산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서비스와 방대한 범위의 뉴스 장악력을 갖게 되었다.

회사는 꾸준히 성장했고, 이에 따라 각종 사건에 대한 이들의 견해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자, 1940년에 이들의 광고 부문과 통신 부문을 분리하라고 명령하는 법령이 공포되었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의 매체들은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극히 어렵게 되었지만 1세기에 걸쳐 이어진 아장스 아바-당시에는 ‘오피스 프랑세 댕포르마시옹(Office Francais d’Information, OFI)’이라고 개칭-의 자유 언론의 전통은 그리 오래 짓밟히지 않았다.

by 100명 2007. 7. 23. 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