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예고편엔 연령등급제가 없다
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7-07-22 20:42
지난 주말 오랜만에 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극장을 찾은 회사원 정민호(35·서울 상도동)씨는 불쾌한 일을 겪었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보러 갔는데, 본편 시작 전 공포영화 예고편이 잇따라 상영됐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보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장면들이 여과없이 상영되자, 아이들은 무섭다며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정씨는 황급히 아이들 눈과 귀를 가려줘야 했다. 그는 “아이들도 보는 영화에 ‘18세 이상 관람가’인 공포 영화 예고편을 틀면 어떡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본편보다 더 자극적인 예고편=최근 초·중등생은 물론 취학 전 아동까지 볼 수 있는 영화 앞에도 공포영화 예고편이 무차별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여름철을 맞아 호러 영화가 많아지면서 12세나 15세 이상 관람가는 물론 전체 관람가 영화에까지 예고편이 붙고 있는 것. 이 때문에 정서적으로 민감하고 자기 통제력이 취약한 아이들이 유해 영상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중학생까지 볼 수 있는 15세 미만 관람가는 ‘해리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다이하드 4.0’ ‘트랜스포머’ ‘파워레인저 매직포스&트레저포스’ 등 4∼5편이다. 이 중 ‘해리포터…’와 ‘파워레인저…’는 생후 2년 이상인 유아도 입장 가능한 전체 관람가 작품.

이들 작품 앞에는 15세 이상 관람가인 ‘므이’를 비롯해 18세 이상 관람가인 ‘리턴’ ‘1408’ ‘힛쳐’ 등 공포영화 예고편들이 상영되고 있다. ‘튜더스’ 같은 케이블TV 성인드라마의 광고까지 붙는다.

예고편은 홍보 효과 극대화를 위해 핵심 장면만 모아 만들기 때문에 오히려 본편보다 더 자극적인 경우가 많다. 일부 예고편에선 끔찍한 표정의 혼령이나 땅에 머리가 부딪혀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이 나온다. 칼이나 주사기를 휘두르거나, 피가 사방으로 튀는 잔인한 장면 등도 여과 없이 등장한다.

◆예고편도 본편처럼 등급 나눠야=현행 법규는 영화심의를 총괄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은 예고편만 상영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모든 예고편은 영등위에서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은 것이며, 청소년 및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라 해도 그 영화의 예고편은 어디서든 틀 수 있는 조건이다.

이에 대해 영등위 관계자는 “예고편은 유해성 여부를 철저히 판단하기 때문에 선정적인 장면이 나오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영등위의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끔찍한 장면이 예사로 등장하는 최근 예고편을 보면서 심의 잣대가 본편 심의 잣대보다 훨씬 더 관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는 실정이다.

예고편 편성권을 가진 극장 측에도 책임이 있다. 극장들은 각 영화사나 배급사로부터 예고편을 받아 일주일 단위로 편성하는데, 어떤 영화에 무슨 예고편을 붙이느냐는 전적으로 극장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가청소년위원회는 예고편도 관람 등급을 나눠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체환경팀 김성벽 팀장은 “현행 법규가 청소년 보호보다 영화 진흥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며 “영등위가 예고편 등급 분류를 세분하거나 더 엄격하게 심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근본적으로는 청소년 및 아동에 대한 유해 매체 여부 심의를 일괄적으로 담당할 기관 설립도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by 100명 2007. 7. 22. 2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