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한국 멜로영화를 살리는 방법

기사입력 2008-06-29 09:01

망해버린 한국 멜로영화를 살리는 방법

【서울=뉴시스】

◇이문원의 문화비평

한국 멜로영화가 전멸 상태다. 아직 여름 시즌이어서 멜로가 득세하는 계절까지 기다려봐야 안다지만, 가을·겨울에도 딱히 멜로 영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들 멜로 영화 기획을 꺼리는 분위기다.

이유를 따져보면, 다소 미묘하다. 멜로 영화는 사실 흥행이 안 되는 장르는 아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너는 내 운명’,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 1년에 한 두 편씩은 꾸준히 히트작을 내왔다. 한국영화 흥행이 전반적으로 저하됐던 지난해에도 허진호 감독의 ‘행복’ 등이 선전했다.

물론 실패작도 많지만, 장르의 존속여부는 실패작의 개수가 아니라 흥행작이 존재하느냐에 의존한다. 상대적으로 값싸게 만들어 여전히 중박 흥행을 내다볼 수 있는 멜로 영화의 제작 부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선뜻 이해가는 일은 아니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물론 몇 가지로 추론해볼 수는 있다.

먼저, 멜로에 신진작가들의 염증을 들 수 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한국영화의 지극한 멜로 성향은 한국영화가 극복해야할 과제처럼 여겨지곤 했다. 한국인이 멜로적 감수성을 쉽게 받아들이다 보니 모든 장르, 모든 소재에 이를 적용해버려 그렇다. 결국 여러 대담한 기획들도 모두 다 비슷비슷한 영화로 끝나버렸고, 감정과잉의 멜로 형식은 첨예한 소재, 신선한 소재들을 다루는데 적절치 않다는 결론이 섰다. 지금의 ‘점차적 멜로 거부’ 현상은 이런 알레르기 증세에 일정부분 원인이 있다는 분석이다.

멜로 영화의 흥행 한계선도 멜로 거부의 원인이 된다. 멜로 영화는 대박이 나기 어렵다. 아무리 사회파적 성향을 뒤집어씌워 사회적 대의 마케팅을 시도해도 한계는 언제나 300만 선으로 나온다. 과거 ‘편지’, ‘약속’ 등의 멜로영화가 한 해 통산 흥행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시장 파이가 아직 작을 때여서 1위 등극이 가능했을 뿐 그 당시에도 멜로는 잘해야 300만 선이었다는 분석이다. 결국 지금의 대박신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패턴과는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멜로 영화 자체도 구조가 닮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남녀 간 사랑을 토대로 한 멜로 영화도 결국은 남성 중심과 여성 중심으로 패턴이 나뉜다. 그러나 지난해만 봐도 ‘황진이’, ‘두번째 사랑’,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어깨 너머의 연인’ 등 여성 중심 내러티브의 멜로 영화들은 단 한 편의 예외도 없이 실패했다.

멜로영화는 기본적으로 스타파워에 기대야 하는데, 현 시점 여자스타의 티켓파워가 거의 전무해서 그렇다. 결국 남은 길은 남성 중심이지만, 무조건 한 방향으로만 치달으면 안 그래도 한계가 있는 멜로 형식인데, 모조리 국화빵처럼 같은 모양새가 된다. 만드는 쪽도 피로하고, 관객도 염증을 느끼리라는 예상이 서게 된다.

물론 이밖에도 원인은 더 많을 수 있다. 멜로가 점차 유료적 매력을 잃고 무료의 TV브라운관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결국 스타 캐스팅이 관건인데, 대박 흥행력이 부족한 멜로 장르를 스타들이 기피하는 현실도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이제 모든 시즌을 파고들어 그 어느 시즌이건 멜로 등 중급영화는 경쟁력이 휘발되고 있는 상황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렇게만 보면 멜로 영화는 분명 ‘사라지는 게 당연한’ 장르가 되어버린다. 제작진의 열의부족, 시장성향 불일치, 장르 내적 결함 등 원인도 다양하다. TV브라운관에서 중장년층용 무료 콘텐츠로만 소화되는 게 순리적인 흐름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멜로는 여전히 ‘쓸 만한’ 장르다. 어느 나라, 민족이나 ‘기본정서’라는 게 존재한다. 그게 한국에선 신파 성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를 봐도 그렇고, 수백 년 간 지속된 절대성향을 돌아봐도 그렇다. 결국 신파적 성향은 우리가 버려야 할 ‘형식’이 아니라,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정서’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건 멜로 장르의 재편이지 포기가 아니다. 잘만 가다듬으면 홍콩 하세편이나 일본 전대물처럼 ‘자국에서만 만들고 소화되는’ 국지색 강한 불침범 절대 흥행 장르로 탈바꿈할 수 있다.

먼저, 멜로 성향은 한국영화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니다. 오히려 살려야 한다. 국내도 국내지만, 한국영화가 세계시장에서 ‘개성’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은 바로 멜로 성향에 있다. 이를 빼버리면 그저 할리우드 아류 콘텐츠 생산국이 된다. 따지고 보면, 해외에서 비평적 성공을 거둔 한국영화는 대부분 멜로색을 뺀 장르 영화들이었지만, 실제로 돈을 벌어들인 영화는 대부분 멜로영화들이었다. 특색이 있으니 마니아층이 생겨 그렇다. 일본 시장의 한국영화 흥행 1,2,3위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외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등 모두 멜로 영화들임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살리되 가다듬는’ 방향으로 가야한다는 이야기다. 멜로의 문제는 항상 여기에 장르를 걸칠 때 벌어진다. 조폭 장르를 걸치면 ‘사랑’처럼 시대착오적인 유물이 돼버리고, 정치를 걸치면 ‘오래된 정원’처럼 마케팅 요소를 잃고 표류하며, 공포를 걸치면 ‘가위’ 수준의 신파극으로 가버린다. 이 작업만 제어하면 된다. 멜로는 철저히 멜로로만 가야한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멜로는 항상 ‘순수 멜로’였다. 영역을 좁혀 특화시키는 게 목적이 돼야 한다.

다음으로, 멜로영화 흥행한계선은 장르의 한계선이 아니라 관람층의 한계선임을 이해해야 한다. 멜로영화의 절대다수는 등장인물이 30대 이상이다. 40대도 많다. 30대의 세련된 로맨스는 20대도 반응하지만, 최루성 로맨스는 좀처럼 어린 세대를 끌기 힘들다. 문제는 현재 주관람층이 20,30대 여성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현재 멜로영화 구조로는 주관람층을 살짝 비껴 간 관람층만 흡수하기에 대박이 힘든 것이다.

해법은 쉽다. 등장인물 연령대를 낮추면 된다. 20대 초중반으로 설정하면 20,30대가 포괄된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성공은 이런 공식에서 나왔다. 여기에 젊은층이 관심 있어 하는 사회적 이슈를 끼워 넣으면 정확히 터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성공 배경이다. 이처럼 주관람층에 맞춰 세팅할 생각을 않고 고정 세팅만으로 대박 힘들다 투정 부리면 흥행전략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성 중심 내러티브로 흘러 피로감이 심해질 수밖에 없는 멜로 구성 공식도 조금만 발상을 전환하면 쉽게 해결된다. 멜로는 꼭 남녀 투톱 캐스팅일 필요가 없다. 여성 캐릭터는 기계적으로 남겨놓고 남성들 간의 유대 중심으로도 멜로는 흘러간다. ‘태양은 없다’가 그랬다.

나아가 여자들 간의 유대 중심으로도 멜로는 간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다. 티켓파워를 아예 포기해 버리면 더 쉽다. 10대 소녀와 30대 남성의 로맨스는 여성 중심으로 흘러도 똑같은 효과를 낸다. 신인과 특A급 스타의 협연에선, 내러티브가 신인 중심으로 흘러도 결국 특A급 스타의 존재가 더 부각된다.

이런 공식은 사실 이미 타국에서 입증이 된 것들이다. 멜랑콜리한 정서와 사회파적 성향에 있어 우리와 문화정서가 유사한 이탈리아에서 이런 식으로 멜로를 재편했다. 장르에 멜로를 섞지 않고 순수멜로를 추구했고, 10대 콘텐츠로 재편해 자국시장점유율 40%대를 회복했다.

장르는 버리는 게 아니다. 변형시키는 거다. 같은 맥락으로 현재 사멸 중인 공포 장르, 에로 장르도 절대 버려선 안 된다. 이를 어떻게 변형시키고, 그 변형을 어떻게 홍보할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장르 유행은 그렇게 새것과 옛것이 물갈이되며 일어나는 것이다. 결국 대중문화산업이란 이 태피스트리를 얼마나 치밀하게 짜느냐에 달려있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by 100명 2008. 6. 29. 1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