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30)
버타 윌슨: 최초의 여성 대법관
Bertha Wilson(1923-2007)


인권헌장및 가정법 해석에서 남자판사 집단에 용감히 대항
법정서 변론경험 전무한 ‘변호사의 변호사’
여성, 소시민, 소수민족 위한 진취적 의견 내놓아



버타 윌슨이 50년대 중반 법학도가 되기 위해 법대 입학을 문의했을 때 받은 모욕적 충고를 그대로 따랐더라면 오늘날 캐나다의 사법제도는 지금과 아주 달랐을 것이다. “마담, 우린 아마추어 법학도를 받아드릴 자리는 없습니다. 집에서 뜨개질이나 하시죠.” 54년 가을 댈하우지대학교 법과대학장은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잘 못 보았다. 이정도에 포기할 그녀가 아니었다. 집요한 그녀의 요구는 마침내 자신을 늦깎이 법대생으로 만들었다.

윌슨 판사가 여성최초로 연방대법관에 임명된 것은 성의 장벽을 넘었다는 것보다 더 심오한 의미를 가졌다. 그는 82년, 여왕이 인권헌장에 서명하러 캐나다에 도착하기 3주전 대법관에 임명됐다. 이 때문에 그녀의 재직 시기는 헌법이 된 헌장을 여러 각도에서 테스트하는 기간이었다. 여성의 낙태권리에서부터 난민신청자의 재심청구권 등, 개인과 단체의 권리, 자유의 규정 등이 정립되지 않아 헌장해석에 문제가 많던 때였다. 본인이 여성이라는 점, 문제가 많던 시기 이외에 그의 개성이 있었다. 철두철미한 성실함, 다수의견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자기의견을 밝히는 용기, 고독하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는 신념이 있었다. 남자 판사들의 의견에 동조했더라면 법조인생은 훨씬 쉬었을 것이었다. 이름은 내지 못했을지라도.

그녀의 대법관 임명은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온타리오주의 남성중심의 보수적 사법계는 “그녀는 아직 대법관이 될 ‘준비’가 안됐다. 그녀보다는 준비된 남성후보자들이 여럿 있다”고 연방정부에 건의했다. 당시 그녀는 온타리오주 항소법원 판사였다. 존경받는 대법원장 보라 라스킨 조차도 임명권자인 트뤼도수상에게 강력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 그는 캐나다 법조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녀와 브라이언 딕슨 대법관은 인권헌장의 연출자요, 법조항 해석에 근육을 제공한 공로자”라는 평가에 이의가 없기 때문이다.

버타 윌슨은 스콧랜드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간호원 어머니와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고등학교 중퇴자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영국서 석사를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얻은 후 21살 때 장로교 목사와 결혼했다. 49년 캐나다로 이주, 남편은 오타와부근서 목회했고 한국전 때는 해군군목으로 한국에 파견됐다. 그 후 핼리팍스에 정착, 이때 댈하우지 법대 문을 두드린 것이다. 31세 초년생으로 급우들보다는 거의 10여년은 더 늙었다. 그러나 때를 잘 만났던가? 같은 반의 50명 학생 중에는 여학생이 5명이나 되어 많은 위안과 도움이 됐다. 57년 졸업 후 토론토의 기업문제 전문 변호사회사에 취직했다. 68년에는 이 회사의 ‘동업자’가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판결분석과 연구에 뛰어나 주로 ‘변호사의 변호사’ 역할을 맡았다. 고객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후에 컴퓨터에 이관했지만 정보를 수동으로 찾는 복잡한 제도를 개발 유지하는 일 등을 훌륭히 수행했다.

75년 성탄절 직전, 당시 자유당정부는 그를 온타리오주 항소법원(하급법원 판결을 재심하는 법원)판사로 임명했다. 사상 최초의 여성이어서 본인과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한 번도 재판정에서 변론한 적도 없고 보통 변호사들 같은 변호사노릇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정법이 대폭 정비되고 새롭게 된 시기, 인권헌장이 자주 도마에 오르는 때, 그의 판결은 여권신장 관계자들은 물론, 전국 법조인들의 관심과 눈길을 끌었다. 자신을 여권신장 투쟁에 올인하는 변호사로 보지는 않았으나 늘 새롭고 흥미로운 법해석을 내놓았다.

82년 대법관이 된 그달부터 그는 남자판사들과 의견대립의 늪에 빠졌다. 그는 늘 외톨이였고 보수, 전통적 사고방식의 남자그룹에 맞서 투쟁해야 했다. 그 점에서 그의 용기는 후대법조인들의 모범이었다. 그는 남자판사들로부터 같은 급의 판사로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것이다.

91년 67세 때 대법원에서 은퇴한 뒤 원주민-백인관계를 다루는 특별위원회 위원장직을 3년간 수행했다. 이어서 캐나다 변호사협회 요청으로 ‘법조계에서의 여성지위 문제’를 조사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최고영예인 캐나다 왕립협회(Royal Society of Canada) 회원이며 국가최고훈장(A Companion of Order of Canada)을 받았다. “여자 주제에...집에서 뜨개질이나 하라”는 법학대학장의 충고는 한참 빗나갔다.

버타 윌슨 : 23년 스콧랜드 출생, 지난달 28일 오타와에서 알차이머 병으로 사망. 83세. 유족은 남편 존 윌슨 목사(61년 해로).

by 100명 2007. 5. 22. 0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