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9)
보리스 옐친: 전제군주 같은 민주주의자, 개혁주의자


Boris Yeltsin


그는 민주주의와 법치제도, 자유시장주의를 믿었으나 실패한 구제자였다. 그러나 70년에 걸친 전체주의적 독재통치 해체에는 성공했다.

엘친은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국민의 자유선거로 당선된 정치인이었다. 민주정치를 실천하려했다가 후퇴한 그는 구 소련연방과 공산당 해체를 주도한 거물이었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헌법절차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 러시아 최초의 인물이다. 전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이하 ‘고’)가 공산당을 영속시키려 했다면 옐친은 그것을 없애버리려 했다. 개혁공약은 지키지 않았으나 언론검열 폐지, 국민의 정부비판 허용, 자유시장 체제 도입시도의 업적이 있다. 반대로 국유기업의 급격한 사유화를 추진, 해적판 자본주의를 추진했고 천연자원을 도용, 정치권과 결탁한 소수 부유계층을 탄생시킨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초강대국을 거지수준으로 만든 과거의 중앙집권적 통제경제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확언했다.

옐친은 모스코에서 1500킬로 떨어진 우랄 알타이 산맥 동쪽너머 농부가정에서 태어났다. 헛간 같은 단칸방에서 춥게 자란 가난을 그는 잊지 않았다. 3살 때 아버지는 스탈린의 숙청대상에 걸려 투옥됐다. 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전 사유재산을 가졌다는 것. 그는 장난이 심했다. 훔친 수류탄을 갖고 놀다가 폭발, 손가락 두 개를 잃었다. 말이 많고 산만했으며 툭하면 싸움질 하는 개구쟁이였다. 처음부터 권위에는 질색했다. 어느 모임에서 선생님을 공개비난, 이것이 알려지자 초등학교에서 쫓겨났다. 기술학교에 들어가 엔지니어가 된 후 건축업에 뛰어들었다. 이 시절 1년간 17번의 서면질책을 받아 이 방면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잠시 종사한 건축계에서 나와 30세에 공산당에 가입했다. 69년에는 건축담당 정식 간부당원이 됐다. 고위 당간부들과 늘 충돌하면서도 7년 후 지구 당위원장에 임명됐다.

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혁정책의 과감한 추진을 위해 옐친을 모스코로 데려왔다. 거구에 붉은 얼굴, 흰머리를 가진 옐친은 농촌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안고 의기양양해서 도착했다. 그는 곧 인기 인물이 됐다. 정부리무진 대신 시민버스를 타고 다녔고 야채가게에서는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한번은 “점원들이 물건을 왜 팔지 않고 특별손님을 위해서 감춰두느냐”고 고함쳐 묻기도 했다. 그는 곧 신중한 성격의 ‘고’와 대립했다. 87년11월 당대회에서 옐친은 ‘고’가 개혁에 늦장을 부린다고 공개비난, 면직 당했다. 옛날 같으면 그의 인생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련사상 70년 만에 처음인 89년의 민주선거에서 당선, 의회로 진출함으로서 권력에 복귀했다. 다음해 러시아 공산당 역사상 최후의 전국 당 대회에서 그는 탈당, 회의장을 극적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는 국민과 만났을 때 아주 자연스러웠다. 누구와도 악수하면서 저음의 큰 목소리로 농담을 나눴다. 그는 닳아빠지지 않은 농부의 순박함으로 비쳤다. 또한 상식이 풍부한 만만치 않은 농부였고 더욱이 국민주 보드카 애주가였다. 그때도 그의 인생은 일련의 돌발행동으로 끝나는 듯 했다. 국민들은 이를 그의 술 탓으로 돌렸다. 낯뜨거운 장난들, 약속시간 어기기, 불분명하고 모순된 발언, 이 모든 것들은 장시간의 비행기여행의 피로, 또는 병이 나서 아니면 약의 복용 탓으로 이해됐다.

그의 생애 최고의 순간은 91년8월 발생했다. 국민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고 하루 만에 세계 명사가 됐다. 그는 우익세력이 구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를 제거하기위해 벌인 쿠데타에서 그들이 몰고 온 탱크 위에 올라가 이렇게 선언했다. “러시아 시민들이여, 우리는 우익분자들의 반 개혁적, 반 헌법적 쿠데타에 직면했습니다. 우리는 이 반란자들에게 적절히 대응해야 합니다.” 수천명의 시민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쿠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는 ’고‘를 구했다. 지극히 용감한 행동이었다. 그는 ‘고’에겐 가시였다. 그러나 이날은 ‘고’의 가장 귀중한 협력자였다.

인기와 달리 그의 지도력은 감정적이고 투박했다. 그는 전제군주 같이 행동하는 민주주의자였다. 정적에는 무자비하게, 겁 없이 대항했다. 93년에는 탱크를 동원, 공산주의분자들이 지배하는 의회건물을 에워싸고 사격을 명령했다. 그는 클렘린 궁전에서 벌어지는 각종 음모의 주동자였다. 경제, 사회적 문제해결보다 정치게임을 더 즐겼다. 그는 정치고문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누구도 그에게 도전할 만한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98-99년에는 내각을 4번이나 전원 갈아치웠다. 경제는 불황주변을 헤맸으나 대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외교분야에서는 전의 초강대국 지위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가끔 서방과 대립했으나 정치적, 경제적 힘이 약해 자주 밀렸다. 그의 충성파들 조차 권력이양을 요구할 때면 그는 강력히 맞섰다. 공산당이 장악한 하원에서의 탄핵안도 물리쳤다. 96년 그는 심장에 4개의 새 혈관을 이식하는 ‘바이패스’ 수술을 받았고 다른 병들을 계속 앓았다. 점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정신상태도 불안했고 준비된 연설도 엉망으로 발표했다. 국민들은 누가 통치자인지 의문을 가졌다. 술중독이 원인으로 보였다. 99년 마지막 날 그는 국민과 세계가 다 같이 놀란 사실을 발표했다. “두 번째 임기가 끝나기 수개월 앞당겨 하야한다”면서 전 KGB 비밀경찰원 푸틴을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했다. 퇴임 후 그의 건강은 향상됐다. 그의 재임 중 국민의 생활수준은 악화하고 범죄는 넘쳤으나 자신을 포함, 일부특권층은 엄청난 재산을 쌓았다. 그것은 아주 특이한 정치변혁기였다.

옐친 : 31년2월 출생, 지난 23일 모스코에서 복합적 장기 기능악화로 사망. 76세. 유가족:부인과 딸 2.

by 100명 2007. 5. 22. 0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