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8)
준 콜웃 : 캐나다사회의 양심과 자존심


June Callwood 1924-07년
평생을 바친 사회활동가, 빈민구호가, 인권옹호가



검은색 바지 차림에 어께에 숄을 걸친 준 콜웃은 지난달 7일 토론토 작가모임(Writers Trust)에서 수상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국민작가’ 정도의 대우를 받은 피에르 버튼(Berton)이나 소설가 버나드 오스트리(Ostry)같은 수상자들이 수상 후 타계한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참석자들의 기립박수에 자기감정을 거부하면서 그는 “남에게 도움 주는 순간이라면 결코 외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우리는 방관자가 아니라 공범자가 된 것이다”고도 훈시했다. 캐나다의 최대, 최고의 양심이요, 행동주의자로서의 교리를 전한 후 그는 암으로 숨을 헐떡이면서 자리를 떴다. 그의 마지막 공개석상이었다.

행동파, 세속의 성인, 모금위원장, 시민운동가, 인권 및 반전쟁 운동가인 그는 약 30여권의 책을 썼다. 잡지에는 1천개 이상의 글을 기고했고 몸 담았던 그롭 앤드 메일 지에는 500편 이상의 칼럼을 썼다. 심지어 2개의 TV 쇼의 호스트를 맡았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술, 인권옹호, 시민권리, 극빈자 복지 등을 위한 약 50개의 단체를 ‘출범’시켰다. 이 숫자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가입’하는 단체 수보다 많다. 이 대가로 그는 명예학위 20개, 캐나다 국가훈장(Companion of the Order of Canada)을 받았고 거리 이름과 공원이름이 그의 이름을 땄다.

부모는 생계에 바빠 둘 다 자녀양육에는 등한했다. 이 덕분에 준은 어려서부터 자신이 알아서 행동하고 책 속에서 지혜와 위안을 찾는 생활을 터득했다. 다만 두 분의 할아버지는 손녀를 미치게 사랑했다. 이래서 준은 부모의 관심 부족이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란 서로가 도우며 산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자랐다. 나는 또한 세상에 두려워 할 것이란 없다는 태도를 배웠다.” ‘두려움 없음’은 그의 생애의 특징이었고 그를 크게 도왔다. 수많은 글을 써도 절대로 회고록은 없었다. “나는 자기반성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 자신에 그리 복잡다단해서 다시 설명해야할 것은 없었다.” 또한 그는 자기 기억을 다시 색칠하지 않고 생애를 기술할 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맘 속에 남은 기자정신은 이런 색칠을 용납하지 않았다.

준 로즈 콜웃은 온타리오 서남부 지방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여자 동생이 1명 있었다. 어머니 쪽은 1650년께 퀘벡시티에 정착했고 원주민 피가 섞였다. 영국계인 아버지는 연관공(plumber)이었으나 난봉꾼이었고 어머니 생애를 무척 힘들게 했다. 어머니는 수녀원 생활이 싫어 16살 때 아버지와 함께 도망쳤다. 친 할아버지는 온타리오주에서 치안판사였다. 외할아버지 빌 라브아(Lavoie)는 미국 주류판매 금지 시절(1920-33년) 밀주로 돈을 벌었다. 6살 때 콜웃은 가톨릭학교에 입학했다가 즉시 3학년으로 월반했다. 책벌레인 그는 도서관에서 읽고 또 읽었다. 10살 때 쇠로 만든 밀크통 재생업을 하던 부모의 사업이 망하고 빚을 잔뜩 졌다. 빚 갚기에 지친 아버지는 집을 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두 딸을 데리고 바느질을 시작했다. 내리 사흘간 감자만 먹은 적도 있었다. 그것도 사 온 것이 아니고 추수하고 난 남의 밭에서 파 온 것이었다. 2차 대전을 거쳐 그는 브랜트포드 소재 고교로 진학, 응원부원이 됐다. 당시 급우들 말에 의하면 “그녀는 몹시 예뻤고 그의 개방된 마음씨는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독창성 역시 감탄 대상이었다.” 수영선수로 다이빙 챔피언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학교 교지에 글을 꾸준히 썼고 단편소설 공모에서 상도 탔다.

하루는 어머니가 말다툼 끝에 “난 너희들을 먹여 살리는 데 지쳤다”고 소리치자 그는 지역신문사에 철자교정원으로 취직, 주 7.50달러를 받았다. 평생을 담은 언론계 최초의 직장이었다. 42년 토론토 스타지는 주 25달러를 제의했다. “나는 18살이었지만 하이 힐을 신어도 12살 정도로 보였다. 간부들이 나를 보자마자 그들은 나를 얕보았다.” 2주후 사진설명을 쓰면서 육군의 탱크이름을 틀렸다고 해고됐다. 준은 전투기 스핏파이어 조종사를 지망했으나 공군은 “여자들을 조종사로 훈련하지 않는다.”고 답장, 실망시켰다. 찾아간 그롭 앤드 메일지는 의료협회 총회 취재를 시험 삼아 맡겼다.

그는 수줍고 두려워 취재를 할 수가 없었다. 토론토 스타 기자가 그녀를 불쌍히 생각, 자기 기사 송고 후 기사를 대신 써주었다. 덕분에 그롭 지에 기자로 고용됐다. 남자기자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준은 남자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의 여성차별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롭지의 존경하던 트렌트 프레인 기자와 결혼했을 때는 그가 19살이던 44년이었다. 당시 기혼여성은 집에서 애나 기르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신문사 요청으로 일을 계속했고 처녀성을 썼다. 부부는 금슬이 아주 좋아 서로를 ‘꿈같은 배필’이란 뜻으로 드리미(dreamy)라고 불렀다. 결혼 3개월 후 준이 임신을 하자 임산부 취업이 문제가 됐다. 기자직 대신 애기 낳기, 기르기를 선택했다. 기자직을 사임하고 집에서 애를 보면서 프리랜서 기자(소속 회사 없이 글을 써서 파는 기자)가 됐다. 자기를 가르친 단발 엔진 비행기 여교관, 여성합창단, 16살로 54년 온타리오호수를 수영으로 횡단한 마리린 벨, 피임약 등 각종 분야가 그의 주제였다. 미국의 바바라 월터즈(미국 TV프로듀서/인터뷰어)등 세계 유명인사들의 연설문이나 글의 대필자 일도 맡았다.

3명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에서 글을 쓰면서 행복한 살림을 하던 그녀에게 우울증(디플레션)이 엄습했다. 모든 일을 중단한 그녀는 의사치료를 받았고 이때의 경험을 모아 64년 자기 본명으로 책을 냈다.

60년대는 준이 사회활동가로 지칠 줄 모르게 활약한 시기였다. 준의 생애 중 많은 일들이 애들로 해서 일어났지만 이것 역시 그랬다. 10대 소년 장남 ‘바니’는 히피 소굴인 토론토의 욕빌지역에 살았는데 가난한 친구를 자주 집에 데려왔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깨달았다. 그는 월세 600달러짜리의 집을 빌려 오갈 데 없는 청소년을 위한 주거지를 만들었다. 이 액수는 잡지에 글 한편 쓰고 받는 정도였다. 그녀는 이런 호스텔을 5-6개 세웠다. 68년에는 베트남전쟁 반대 궐기대회에 참여하는등 거리의 투사가 됐다. 시위하다가 경찰에 잡혀 ‘돈 제일’ 감옥에서 ‘콩밥’도 먹었다. 이 경험이 그를 사회운동가로 만들었다. 그래도 그녀는 늘 귀거리, 하이힐, 어울리는 핸드백을 든 숙녀차림이었다. 다음 20년간 그는 집 나온 여성보호소, 애를 낳은 청소년 보호소들의 설립했다. 시민의 권리찾기 운동, 기독교및 유태교 통합위원회, 작가협회, 펜(PEN)클럽 등에도 깊이 관여했다.

2003년 암의 진단과 함께 또 하나의 불행이 닥쳤다. 애지중지하던 20살짜리 막내아들 캐시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퀸스대학교로 돌아가던 중 중앙선을 넘어 온 차에 받혀 목숨을 잃었다. 토론토의 에이즈 환자를 위한 ‘캐이시 하우스’는 그를 기념해서 생겼다. 암은 진행됐지만 그는 평온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후회도 없었다. 지난달 21일 프린세스 마가렛 암병원에 입원한 그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러면서도 초코렛을 씹고, 쉐리 술을 마셨다. 언제나처럼 끝까지 모범을 보이면서.

by 100명 2007. 5. 22. 0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