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세대를 떠난 ‘인물’들(27)
절지 스트라스잭: 폴랜드 해방 위해 17세에 자원입대


적진 후방의 비밀작전요원이나 불발로 그쳐
해군장교로 특채됐다가 군함설계사로 인생마감



할리팍스 폭격기의 점프대 옆에서 절지 스트라스잭(Jerzy Straszak)은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온 몸은 무장으로 무거웠고 어께엔 낙하산을 매었다. 1944년 7월30일 밤. 독일 나치가 점령한 폴랜드 상공. 낙하 직전이었다. 여러 기억이 그의 마음을 기습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기억들을 애써 지우고 수 천 피트 밑에서 무엇이 그를 기다릴지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폴랜드 빨지산 부대가 맞아 줄까, 아니면 낙하하는 동안 독일군이 기관총으로 그의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을까. 영국 특별작전부(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소속인 그는 폴랜드 게릴라들을 접촉해서 후방정보를 수집해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이 작전을 위해 그는 소리 소문 없이 암살하는 법은 물론 라디오교신, 적진 교란작전(사보타쥐)과 각종 무기 다루는 법 및 폭약취급 훈련을 받았다. 그의 희망은 폴랜드의 해군장교가 되어 조국을 독일군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40년 7월 독일이 유럽을 대부분 점령하자 윈스톤 처칠 수상의 특명으로 특별작전부가 창설됐다. 임무는 독일군에게 점령된 유럽 곳곳에 글자그대로 ‘불을 지르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달리는 기차를 폭파하고, 독일 요인들을 암살하며, 중요한 정보를 영국으로 보냈다. 작전수행 중 많은 요원이 독일 비밀경찰 게스타포에 잡혀 고문 끝에 처형됐다. 목숨은 애초부터 없는 것으로 치고 살았다.

조국 해방을 위해서라면 스트라스잭은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폴랜드는 독일이 침공한 39년 9월1일로부터 불과 1개월 후 완전 점령당하자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를 포함, 군인 수 만명이 정부와 함께 도망쳤다.

스트라스잭은 폴랜드 북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6살 때 학업을 중단하고 폴랜드 선원이 되고자 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꼭 1개월 전인 39년 8월1일 그는 학생 항해사로 처음 선원 실습에 나갔다가 스웨덴에서 독일군에게 나포, 억류됐다. 3개월 후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폴랜드 해군에 지원했다. 겨우 17세였지만 조국폴랜드 해방은 그의 인생목표였다. 그 후 그는 적 잠수함을 잡는 수중음파탐지기 작동 요원으로 근무했다. 폴랜드 구축함을 타고 악천후의 영국해협(프랑스와의 해협)을 초계하는 것은 “선상유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고장 난 기관차를 타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라고 그는 회고했다. “영국 프라이마우스 해군기지에 돌아오면 우리는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맥주를 마셨다. 영화를 보거나 여자를 차에 태울 수 있지만 다음날 새벽 6시면 다시 승선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더욱 여자를 데리고 어디든지 가려면 군복을 다려야했다. 그래 우린 모두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도로 맥주를 마시려고 했다.”

하루는 그는 점심시간에 술에 취했다. 여주인은 그를 술에서 깨우려고 자기 침대에 눕혔다. 그는 술에서 깨어났을 때 몹시 창피했다. 가까스로 승선은 했지만 그는 이 술집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술 김에 무슨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몸을 철저히 관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40년 12월 그는 540톤짜리 조선소에서 방금 나온 새 잠수함 소콜(Sokol)호로 이전됐다. 2개월 후 소콜은 경계 임무 차 바다로 나갔다. 소콜을 포함, 12척의 연합군 잠수함이 프랑스 브레스트 항을 에워쌌다. 이들은 독일의 초강력 전함순양함 샤른호르스트 호와 그네이센호 가 항구를 나오기만 하면 어떻게든 공격, 격침하는 임무를 띄었다. 스트라스잭은 좁은 잠수함 속에서 33명의 병사들과 함께 어께를 비비며 3주간을 지냈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고, 개인공간이나 개인시간이라곤 없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이 문제였다. 사용 후 손잡이막대를 순서대로 조심해서 잡아 다니지 않으면 난리가 벌어졌다. 이뿐이 아니라 요리사는 ‘잔혹하다’고 할 정도로 음식이 나빴다. 두 번째 날 소콜 호는 2척의 대 잠수함용 독일 구축함 공격을 받았다. 급잠수에 성공했으나 총 10개의 수중폭뢰가 소콜을 향해 떨어졌다. 스트라스잭은 “아마도 나는 그때 내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무섭지도 않았고 목숨이 붙어있을지 상상하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만 해도 당시 죽음에 거의 가까이 갔던 상황은 소름 끼치는 순간이었다.” 소콜은 간신히 위기를 모면, 34명 모두가 목숨을 건졌다.

스트라스잭은 언제나 더 많은 활동을 희망했다. 43년에는 해군 정보대로 자원했다. 그는 적극적인 인생살이를 원했다. 뜨뜨미지근한 것은 질색이었다. 언제나 현재의 작전은 마지막 작전보다 더 위험했으나 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수개월 후인 44년1월 용맹과 충성심을 높이 산 그는 폴랜드 해군사령관의 특명으로 장교에 임명됐고 해군소속 특별작전부(SOE)에서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 그날 폴랜드 상공에서 뛰어내리려던 그의 낙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장교의 “뛰어내려”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날씨 탓이었다. 실망을 안고 그는 이태리 기지로 돌아가는 9시간 비행에 몸을 맡겼다. 다음날인 8월1일 그는 다시 한번 전날 다녀온 긴 비행길에 올라 낙하를 시도했으나 결과는 전날과 같았다. “두 번 다 그의 착지점은 그를 맞을 준비가 안됐거나 찾을 수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히려 그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와 50년 친구인 오타와 거주 루카시윅즈의 말이다. 스트라스잭은 이런 운명으로해서 8월1일 독일점령군을 상대로 와르소에서 봉기한 폴랜드 국내 군과 합세할 수 없었다. 이 봉기가 63일 후 끝났을 때 폴랜드군은 5만3천명의 인명피해를 입었고 수도 와르소의 85%가 파괴되는 엄청난 손실이 있었다.

그는 낙하실패 후 종전까지 8개월간 독학,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고 영국 그라스고의 해양구조물 건축학과를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53년 캐나다로 이민한 후 캐나다 해군에서 군함 을 설계했다. 국방부에서 83년까지 일했다.

절지 스트라스잭 : 22년 9월 폴랜드 출생, 작년 11월 오타와에서 심장질환 사망. 향년 84세,

*** 스파이, 적진교란등의 교육을 받은 그는 뜻을 펴지 못한 채 캐나다로 이민, 해군에서 군함을 설계했다.

by 100명 2007. 5. 22. 07:57